2023.03.01 00:53
스탕달의 [적과 흑]을 읽었습니다. 올해 읽은 16번째, 17번째 책입니다. 한 달에 한 권 이상 옛날 고전을 읽기로 계획을 세웠는데,
두 번째 책이에요. 열린책들 번역을 골랐는데, 저번 정음사 번역을 80년대 쯤에 읽었으니 30여년만에 처음 다시 읽은 거죠.
전 이 작품을 제라르 필리프와 다니엘 다리외 나오는 클로드 오탕-라라의 영화로 처음 접했습니다. 당시 우리집의 의견은 “진짜
불란서 고전 미남은 제라르 필리프이고 아랑 드롱은 (계급비하적 욕)이나 좋아하는 싸구려”라는 것이었습니다. 거기 세뇌되어
그런지 몰라도 전 제라르 필리프 쪽이 더 좋습니다. 알랭 들롱과 달리 요절해서 추한 꼴을 안 보여주었기 때문인지도 모르죠.
하지만 그 때문에 쥘리앵 소렐을 조금 나이 든 모습으로 상상하는 부작용이 생겼습니다. 소렐은 어리잖아요. 소설 시작할
무렵엔 틴에이저입니다. 제라르 필리프는 당시 30대 초반.
[보바리 부인]이 그런 것처럼 실화 소재 소설입니다. 소렐의 모델은 앙투안 베르테라는 남자인데, [적과 흑]의 줄거리를 온 몸으로
써가며 살다가 1828년에 단두형에 처해졌습니다. 소렐만큼 재미있는 사람은 아니었을지 몰라도 자기만의 열정과 야망과 광기를
갖고 있었겠죠. 소설 후반에서 소렐은 베르테가 짜놓은 각본에 갇힌 것 같다는 느낌도 줍니다. 그리고 여담이지만 아무리
옛날이라도 어떻게 그 정도 죄로 사형에 처해질 수 있을까요.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으니 할 말은 없지만요.
프랑스 작가들이 좋아하는, 미모와 재능을 모두 갖춘 젊은 남자가 19세기 격동기에서 어떻게 출세를 좀 해보려 한다는 이야기입니다.
이들 중 일부는 성공하고 상당수는 실패하는데, 성공하는 애들은 상대적으로 덜 재미있거나 그 과정 중 시시해집니다. 19세기 소설
주인공의 매력은 성공과 그렇게 잘 붙지 않기 때문이지요. 소렐도 자신의 죽음을 받아들인 뒤에 가장 괜찮습니다.
암담한 실화에 바탕을 둔, 암담하게 끝나는 이야기인데, 의외로 소설은 밝습니다. 이 밝음은 스탕달 자신이 소설 안에서 인정하고
있지요. 밝고 호탕하고 엄청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작품입니다. 긴 소설이지만 각각의 챕터는 짧고 늘 분주하게 움직이고 있지요.
그 액션 상당 부분은 심리 묘사지만 그렇다고 그게 액션이 아니라는 건 아닙니다. 프랑스 소설이 정말로 재미있어지기 시작할
무렵의 작품이에요.
엄청난 열정으로 가득 찬 소설이지만, 사랑과 연인을 단순화하지는 않습니다. ‘귀족 딸과 결혼해 한몫 잡아보려던 남자가 방해가
되는 옛 여자친구를 죽일 뻔 했고 그 결과 목이 날아갔다’라는 현실 세계의 실화가 모델이니 어쩔 수 없죠. 스탕달은 로맨틱한
열정으로 세 주인공, 그러니까 소렐, 레날 부인, 마틸드를 불태우지만 그러는 동안에도 이 사람들의 이기주의, 변덕, 우스꽝스러운 단점들을
가차없이 묘사하지요. 그리고 그 성격의 원인도 정확하게 분석합니다. 당연히 계급은 중요한 역할을 하고, 아, 그래요. 어떤
책을 읽느냐, 또는 읽지 않느냐도 중요합니다. 이건 [보바리 부인]도 그런데. 지금 한국의 스탕달은 웹소설을 쓰는 대신
웹소설을 읽는 독자들의 내면을 분석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부제가 [1830년대의 연대기]이고, 작품이 쓰여지던 당시의 프랑스 사회의 정교한 묘사가 소설의 자연스러운 일부가 되는
작품입니다. 이 사회적 깊이가 ‘소설의 두께’를 만들어내죠. 그리고 이 작품을 ‘현대소설’로 만듭니다. 훌륭한 통찰력으로 동시대의 모습을
생생하게 그려낸 작품들은 시대가 지난 뒤에도 그 동시대적인 현재성을 잃지 않는데, [적과 흑]이 그런 경우입니다.
그리고 저는 코르셋을 입은 여자들과 수염 기른 남자들이 나오는 19세기 초 프랑스 배경 소설에서 지금 한국의 모습을 읽는 경우가 많아서 종종 움찔하게 됩니다.
(23/03/01)
기타등등
다른 각색이 뭐가 있나 찾아봤는데, 유안 맥그리거가 쥘리앵 소렐을 연기한 적 있었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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