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7.08 14:22
추리소설 작가들은 주인공 탐정 캐릭터를 중심으로 시리즈물을 만드는 전통이 있습니다. 에드거 알랜 포의 오귀스트 뒤팽에서 시작해서 시리즈의 전통을 세웠다고 할 수 있는 셜록 홈즈 이후로 수많은
탐정 시리즈가 존재합니다. 제가 추리소설의 재미를 처음 알게 된 1980년
초대에도 셜록 홈즈나 괴도 괴도 루팡 시리즈는 대부분 번역이 되어서 도서관에 있었고, 애거서 크리스티는
전집도 나와 있었어요. 물론 이중에는 완역이 아니라 좀 편집된 번역판도 있었고, 번역 자체가 부실할 때도 있었지만 나중에 완역본이 나오기 전에는 그런 사실 자체를 모르고 열심히 읽었습니다.
하지만 수많은 탐정 시리즈들 중 당연히 극히 일부만 번역되었고요. 시리즈 대표작만 번역본이 나온 경우가 많은데 어떨 때는 참 답답했습니다. 맘에 꼭 든 탐정이 있고, 관련 시리즈로 뭐뭐가 있다고 책 해설에 적혀있는데 한글 번역본이 없어요! 어느 정도 영어가 깨인 다음에는 원서라도 구해서 읽고 싶지만 그때는 원서도 매우 드물었거든요. 특히 추리소설 같은 대중문학 영어 원서는 공공도서관에는 없었습니다.
그러다 1990년대 후반쯤 되서 인터넷이 대중화되자 해외 사이트를 통해서 원서를 구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해외 배송으로 구입하는 원서는 비쌌고, 전공 관련 도서라면 모를까 재미로 읽는 추리소설을 그렇게 구입한다는 건 생각하기 어려웠습니다. 그러다가 어떤 추리소설은 초소형 페이퍼백이라는 아주 합리적인 가격대로 있다는 걸 알았을 때 얼마나 기뻤는지 모릅니다. 그렇게 해서 제가 페이퍼백을 모으기 시작한 추리소설은 렉스 스타우트의 네로 울프 시리즈였습니다.
국내 추리소설 전집에 있는 대표작인 ‘요리장이 너무 많다’를 읽으며 이 미식가 탐정의 매력에 흠뻑 빠졌었는데요. 원서로 1권인 ‘독사’부터 읽기 시작하니까 온천 휴양지에서 벌어지는 ‘요리장’은 울프가 집을 떠나 벌어지는 상당히 드문 사건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뉴욕의 자기 집을 절대 떠나지 않고 자기 일정을 죽어도 고수하는 괴짜 탐정의 세계는 첫 권에서부터 거의 완벽한 완결성을 가지고 마지막 권까지 이어진다고 합니다.
아직 마지막 권을 못 보아서 이렇게 말씀드리는데요. 제가 소형 페이퍼백을 구입해서 보던 시절에는 이미 페이퍼백이 절판되기 시작해서요. 네로 울프 시리즈 전체 46권 중에서 한 절반 정도는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흥미로운 책들이 먼저 나가기 때문에 진짜 궁금한 책인 ‘여자들이 너무 많다’나 울프의 과거를 암시하는 ‘블랙 마운틴’같은 책은 절판이었습니다.
근데 다시 몇 년이 지나니 전자책이 상용화되기 시작합니다. 안그래도 책장에 넘치는 책들이 부담스러웠는데 이걸 전자책으로 모으면 된다는 생각이 들어서 절판되었던 책들을 하나 둘씩 전자책으로 주문해서 읽기 시작했습니다. 그리고 올해 초 건강 문제로 집에서 쉬면서 뭔가 가볍고 흥미로운 책들을 실컷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서 네로 울프를 첫권부터 마지막까지 읽어 보자는 계획을 세웠고요. 시리즈 순서대로 읽기 시작하되 중간 중간 못 구한 절판본들은 전자책으로 구입해서 보기로 합니다. 이렇게 순서대로 원서로 읽다 보다 보니 언어를 까다롭게 사용하는 네로 울프의 원래 표현이 궁금해서 유일한 번역본인 ‘요리장이 너무 많다’도 결국 원서로 다시 구입했습니다.
처음에는 몇십권이 넘는 시리즈가 비슷비슷한 구성이라니 좀 지루할 수 있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예전에 읽었던 책을 다시 읽어도 잘근잘근 씹어먹는 재미가 있습니다. 범인이 누구라는게 중요한게 아니라 네로 울프와 아치 굿윈 두 주인공들이 티격태격하는 성격묘사의 디테일들이 재미있고 언어를 세련되게 사용하는 스타우트의 표현들이 좋아서 어떻게 읽어도 흥미 진진합니다.
책 머리에는 여러 작가들이 추천사 같은 글을 써 놓았는데 그중에는 스타우트 사후에 네로 울프 시리즈를 이어서 쓰는 모 작가에서부터 동료 추리소설 필자까지 다양합니다. 이들은 자기가 좋아하는 네로 울프 책에서부터 작가인 스타우트와의 인연까지 여러가지 이야기를 하는데요. 이들의 사연을 읽으면서 내가 왜 이 시리즈를 이렇게 즐기는지 설명할 수 있는 한 구절을 찾았습니다.
어떤 여성 작가가 자기가 이 시리즈를 좋아하는 이유를 늘어놓은 서문 마지막에
“Let The Misogynist Suffer”
라고 적어 놓았거든요.
주인공 울프는 전반적으로 사람을 안 좋아하지만 특히 여자를 싫어하는 여성혐오자인데요. 대부분의 사건에는 의뢰인에서부터 증인, 범인까지 당연히 여자들이 역할을 하고요. 이 게으른 명탐정이 본인의 호화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일하면서 괴로워하는 모습을 보는게 상당히 즐겁거든요. 그래서 저의 네로 울프 전집 도장 깨기의 구호로 삼으려고 합니다.
2024.07.08 15:29
2024.07.10 10:26
세상은 넓고 읽고 싶은 추리소설 시리즈는 많다는 것은 항상 위안이 됩니다. 말씀하신 시리즈들은 기억해 두겠습니다~
2024.07.10 01:35
2024.07.10 10:28
맞아요. 무슨 세계의 명탐정 책이 있어서 안락의자 탐정부터 하드보일드 탐정까지 문학계 유명한 탐정들을 소개하는 내용의 책이 있었어요. 아주 황당한 탐정 소개도 몇몇 있었는데 아직도 기억나는게 엄청난 글래머인 여자 탐정이 범인을 깨닫는 순간 속옷 끈이 터진다는 묘사가 있었어요;;;;;
2024.07.10 10:41
아 저도 그 설명 기억나는데요!!! 아마도 ally님과 같은 책을 읽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반갑습니다.... 하하하. 그 책 아직도 어디 남아 있으면 다시 읽어보고 싶네요. ㅋㅋㅋ
짐작대로 원서로 읽고 계시군요. 시리즈는 말씀하신 경우를 생각하면 부럽습니다.
추리 소설을 많이 읽은 독자는 아니지만 제 취향에 맞아서 좋아하게 된 시리즈가 나타났을 때 소개가 빈약하여 실망할 때가 자주 있었거든요. 87분서 시리즈 경우도 일부만 나와서...그리고 시리즈의 경우에 순서대로 안 나오는 건 왜일까요. 이왕 펴내기로 했으면 시리즈 순서대로 내주면 얼마나 좋을까 싶지요.
그래도 좋아하는 시리즈들 87분서시리즈, 메그레경감시리즈, 하라 료의 소설 등 나온 건 거진 읽었고 즐겼고 마르틴베크시리즈는 완결까지 봐서 좋았네요. 밑에 언급한 로런스 블록의 메슈 스커더 시리즈는 예전에 세 권인가 읽었는데 기억이 잘 안나는 현상이..언제 다시 볼까 생각하고 있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