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02.23 17:10
캐스린 비글로는 [허트 로커]에 이은 차기작 소재로 실패로 돌아간 2001년 빈라덴 암살작전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촬영에 들어가기 직전 엉뚱한 뉴스가 날아옵니다. 미국이
정말로 빈라덴을 암살해버렸던 거죠. 저 같으면 그래도 밀어붙였을 것 같은데, 비글로는
빈라덴 암살까지를 다룬 새로운 영화를 만드는 쪽을 택했습니다. 이해 갑니다. 빈라덴이
죽은 이후 관객들이 실패한 암살작전까지 신경 쓸 생각은 없을 테니까요. 하지만 그래도
당시의 각본이 더 드라마와 캐릭터가 풍부했을 거라는 생각이 들지 않을 수 없습니다.
[제로 다크 서티]의 주인공은 10년에 걸친 빈라덴 사냥에 온몸을 바친 CIA 요원입니다.
마야라는 이름이 붙은 이 요원은 이 사건에 관여한 실존인물들을 뒤섞어 만든 허구의
캐릭터입니다. 아마 이 영화에 나오는 대부분 사람들이 그렇겠죠. 대부분 현역 요원이어서
신원 노출이 불가능했다고 합니다. 하여간 이 인물은 빈라덴의 직속부하를 추적하다가
결국 빈라덴의 은신처를 밝혀내고 맙니다. 그 다음에 우리가 이미 뉴스를 통해 알고 있던 제거작전이
시작되지요.
분명한 정치적 의견 같은 것은 쉽게 찾아볼 수 없는 영화입니다. 물론 CIA 요원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미국영화이니 거기에 따른 선천적인 편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그것은 관객들이
처음부터 예상할 수 있는 것이라 자동적인 교정이 가능하지요. 그것을 제외하면 영화는
별다른 코멘터리 없이 일어났던 사건들만을 허구의 틀 안에서 보여주는 것으로
만족합니다. 그것만으로도 재미있는 첩보영화의 소재로는 충분하죠. 단지 이 영화가 액션보다는
끊임없는 기다림과 시행착오의 이야기라는 점은 알아두어야 합니다.
제가 재미있다고 생각한 건 주인공 마야가 빈라덴 암살작전의 중요성이나 그 정치적 의미에
대해 단 한 번도 깊이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이들은 그냥 마야의 개인적인 임무입니다.
마야의 의무감이나 집착 역시 그 자신과 집단 안에서만 형성됩니다. 여기엔 애국심이나
정치는 핑계에 불과합니다. 영화 속에서 마야에게 중요한 것은 그것이 자신의 전인생을
바친 자기 일이라는 것입니다. 그 때문에 주변 동료들이 다치거나 죽어간 것도
이유는 되겠지만. [제로 다크 서티]는 빈라덴 암살작전에 대한 이야기라기보다는,
학교를 졸업한 뒤로 10년 동안 한 가지 일만 생각하고 한 가지 일만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영화에는 몇몇 불편한 장면들이 있습니다. 알카에다 요원에 대한 잔인한
고문으로 시작하는 도입부부터 그렇습니다. 많은 비평가들은 이 영화가 고문을 미화한다고
비판했는데, 글쎄요. 그렇게 보기는 쉽지 않습니다. 일단 영화 속 고문은 여전히
불쾌한 행위입니다. 그리고 미국이 당시 행한 게 분명한 고문을 무시한다면 그것이야말로
거짓말이겠죠. 어차피 이런 첩보전에는 어두운 면이 있기 마련이고, 영화가 '사실'을
그리고 싶다면 그를 피하고 갈 수는 없을 겁니다. 그렇다고 반대로 고문을 과하게
예민하게 그리는 것도 거짓말일 거고요. 전 처음엔 질겁하다가 점점 고문에 대해
냉담해져 가는 마야의 모습이 사실적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비인간적인 임무에
진력이 나 떠나가는 댄의 모습도 그럴싸하고요. 저에겐 이런 것들이 오히려 별다른 의견주장
없이 이야기를 단순한 흑백구분으로 떨어지는 걸 막는 것처럼 보입니다.
마찬가지로 전 영화의 클라이막스가 준 것 역시 미국의 주적을 암살함으로써 발생하는
카타르시스는 아니었던 것 같습니다. 제가 미국인들의 애국심에 편승하지 못했기 때문일
수도 있었지만, 전 그런 건 거의 느끼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전 '그렇게 일이 끝나버렸으니
앞으로 마야는 어떻게 하나?'라고 걱정했어요. 마지막 장면에 의도적으로 과장한
공허함과 외로움 역시 그를 살리기 위한 도구에 가깝지 않았을까요.
존 르 카레와 같은 냉전시대 스파이물의 거장들은 스파이 소설을 통해 냉전구도라는
특별한 조건의 틈새가 만들어낸 기이한 종류의 인물들을 그렸습니다. 아마
[제로 다크 서티]가 그린 것도 포스트 9/11 이후 첩보세계의 틈새에서 일하는
특별한 종류의 사람들인지도 모르겠습니다.
(13/02/23)
★★★☆
기타등등
정말 오래간만에 여자주인공을 내세운 비글로 영화죠. 중간중간에 나온 텔레비전 시리즈 에피소드나 단편을 제외하면.
감독: Kathryn Bigelow, 배우: Jessica Chastain, Kyle Chandler, Jennifer Ehle, Jason Clarke, Mark Strong, Édgar Ramírez, James Gandolfini, John Barrowman
IMDb http://www.imdb.com/title/tt1790885/
Naver http://movie.naver.com/movie/bi/mi/basic.nhn?code=85141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24 | 쎄시봉 (2015) [2] | DJUNA | 2015.01.22 | 15388 |
» | 제로 다크 서티 Zero Dark Thirty (2012) [2] [1] | DJUNA | 2013.02.23 | 15627 |
22 | 아메리칸 허슬 American Hustle (2013) [7] [6] | DJUNA | 2014.02.23 | 15728 |
21 | 아르고 Argo (2012) [12] [2] | DJUNA | 2012.10.21 | 15972 |
20 | 남영동1985 (2012) [4] [1] | DJUNA | 2012.11.07 | 16042 |
19 | 변호인 (2013) [3] [5] | DJUNA | 2014.01.24 | 16175 |
18 | 파파로티 (2013) [4] [1] | DJUNA | 2013.03.04 | 16818 |
17 | 더 임파서블 The Impossible (2012) [6] [38] | DJUNA | 2013.01.05 | 17205 |
16 | 링컨 Lincoln (2012) [10] [2] | DJUNA | 2013.02.23 | 17517 |
15 | 레버넌트: 죽음에서 돌아온 자 The Revenant (2015) [4] | DJUNA | 2016.01.17 | 17973 |
14 | 동주 (2016) [1] | DJUNA | 2016.02.01 | 18319 |
13 | 덩케르크 Dunkirk (2017) [5] | DJUNA | 2017.07.18 | 18359 |
12 | 부러진 화살 (2011) [4] [1] | DJUNA | 2011.12.22 | 19064 |
11 | 사도 (2015) [14] | DJUNA | 2015.09.05 | 19923 |
10 | 킹스 스피치 The King's Speech (2010) [13] [1] | DJUNA | 2011.03.10 | 20429 |
9 | 도가니 (2011) [10] [2] | DJUNA | 2011.09.07 | 20843 |
8 | 명량 (2014) [4] | DJUNA | 2014.07.30 | 2361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