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1.10.30 16:17
다녀올 곳이 있어서 오랜만에 장거리 운전을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날씨가 흐려서 운전하기 좋았습니다. 산이 노릇노릇 울긋불긋해졌습니다. 곧 헐벗겠죠.
예전에는 계층이나 교양의 차이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사랑이야기의 조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그냥 인간의, 인간 관계의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넷플릭스에서 독일산 '향수'라는 드라마를 우연히 클릭해서 2화까지 봤습니다. 끔찍한 범죄 수사물인데 수사관이나 피해자의 주변인이나, 등장인물들 누구도 엽기적으로 훼손된 시신에 놀라지 않는 놀라운 드라마더군요. 이런 일쯤 일상이잖아, 라는 듯이요. 춥고 비오는 날씨의 연속에다가 축축한 숲이 배경이라 그럭저럭 보고 있는데 접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막나가는 내용이고 공감 지점이 안 생겨서요. 이 드라마의 피해자 주변 친구들은 청소년기에 같은 학교를 다니며 자기들끼리 어울려 다니던 패거리입니다. 그 중 한 명은 이가 못 생겨 '합죽이'란 별명으로 불리는데 함께 학교를 다닌 다른 이들 말로는 왜 그 패거리에 얘가 꼈는지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성적, 외모, 취향 등이 낄 수 있는 애가 아니라면서요. 패거리에 낀 이유는 이후 회차에 나올테죠.
개인적인 얘길 조금 하자면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들과 작은 모임 같은 걸 만들었어요. 실장, 부실장, 공부 잘 하는 애 등등 소위 반에서 잘 나가는 애들 대여섯이었는데 한 달에 한 번 모여서 빵집엘 가서 수다를 하기도 하고 극장엘 가거나 대학 캠퍼스에 구경을 가기도 하는 뭐 별거 안 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 중 한 명이 자신과 친한 다른 반 애를 넣자고 해서 그애도 함께했는데 저는 내심 불만이었어요. 제가 그애랑 안 친하고 그닥 좋아하지 않는 타입이기도 했지만 우리 반에서도 왜 우리만 어울려야 하는지 반의 다른 애들 눈치가 보이던 차에 딴 반 잘 나가는 애까지 넣자니 더 모임의 성격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애당초 성격이랄 것도 없어서 오래 가지 않아 모임은 흐지부지해졌지만 그때의 느낌이 아직 기억납니다. 모임에 들지 않은 우리 반 애들이 보기에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요. 인간의 이런 구분짓기는 뿌리가 깊어서 거의 본능적인가 싶습니다.
'세상의 모든 계절'은 참 잔인한 내용의 영화라는 생각을 합니다. 제 맘대로 생각을 뻗어나가며 써 본다면, 그렇습니다. 이 부부는 메리의 의존적이고 자기파악이 안 되는 성향을 일찌감치 말해 줄 수 있었을 텐데요. 메리라는 사람에게 진지했다면 싸울 것 같으면 싸우고 관계가 끊어질 것 같으면 그랬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십 년 세월을 자신들의 '두루 좋은 사람' 이미지를 유지하느라 진실하지 않은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요. 톰과 제리가 '두루 좋은 사람' 이미지를 유지해야 한다고 의식하고 사는 위선자들은 아니겠지만, 나쁜 사람이란 소리를 피할 수 있는 교양인의 제스추어가 뼈속 깊다는 생각은 듭니다. 결국 그들의 삶이 메리의 삶이 될 수 없음에도 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처절하게 구분지어지고, 구경꾼임을 알게 하고요. 구경꾼으로 말석에 끼어 있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해야 하나 싶기도 합니다. 로이배티님 말씀처럼 이 부부와 메리 캐릭터는 매우 거리가 멀죠. 제가 어느 쪽으로 더 가 있느냐 하면 메리가 너무 싫지만 메리 쪽 인간이기 때문에 아예 내쫓지 않고 자신들의 행복의 자리에 말석을 내주고 보게 하는 잔인함이 노여웠습니다. 이 행복한 부부를 중심으로 제각각 불행을 안고 사는 주변인들을 보면서, 본 영화가 교묘한 후기 자본주의에 대한 우화인가 싶기도 하고요. 집에 디브이디가 있어 한 번 더 봤는데, 그때의 체하는 느낌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더 보탤 말이 없어요.
어떻게 글을 끝낼까....솔직히 말해서 아들의 애인은, 죄송하지만 재수없었습니다.
2021.10.30 16:47
2021.10.30 16:56
중간에 나오는 그 알콜 중독이 된 친구나 마지막에 데려오는 친척도 메리처럼 병크는 안터뜨리지만 결국 톰과 제리 부부 옆에서 비참해보일 수 밖에 없는 사람들로 보였습니다. 이거 후기 여기저기서 찾아보다가 "전염되지 않는 행복"이라는 표현을 봤는데 딱인 것 같아요 ㅋㅋ
2021.10.30 17:02
아직 보지 않아서 이런 말 위험하지만 시놉시스나 리뷰들로 봐선 같은 감독의 '해피 고 럭키'와 약간 비슷한 소재를 다르게 보여준 것 같기도 하구요. 그 영화 주인공과 이 영화의 제리 부부가 좀 비슷한 것 같아요. 주변 사람들과의 관계도 그렇구요. 그 영화까지 보고 나면 이 영화를 좀 더 이해할 수 있을까요. 아마 궁금한 점만 더 늘어날 것 같지만요. ㅋㅋ
2021.10.30 17:14
그렇게 예상하실 수 있을 것 같기도 한데 해피 고 럭키의 주인공은 정말 어디 판타지 속에서 튀어나온 것 같은 저세상 텐션의 캐릭터이고 자기가 먼저 매우 적극적으로 행복 전도사 역할을 하려하기 때문에 많이 다릅니다. 마이크 리 감독 필모에서도 제일 튀는 주인공일 거에요.
문제는 그 판타지 캐릭터가 마이크 리 감독의 극 사실주의 영국 세계관에서 태어났다는 건데 ㅋㅋ 하여간 직접 보시길 추천합니다. 샐리 호킨스의 연기가 너무 좋거든요. 완전한 대척점을 이루는 에디 마산의 연기도 훌륭하고
2021.10.30 18:58
불행한 사람을 쉽게 비난할 수 없는 것처럼 행복하고 모범적으로 살고 있는 사람을 칭찬할 수도 없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걸 보여주는 영화가 아닌가 싶었습니다. 이런 얘기는 자칫하면 교조적으로 흐를 수 있는데, 어떻게 보자면 잘 위장해서 보여준 것 아닌가 싶어요.
가정이나 사회 생활 순탄한 사람들이 교회까지 곁들이고(?) 있는 것을 보면 느끼는 게 있는데, 톰과 제리에게서도 비슷한 느낌을 가졌습니다.
진지한 관계맺음이라기 보다는 자신들의 행복한 생활의 일환으로 주변을 챙기는 것으로 보여요. 가까운 이들을 모른 척할 수 없으니까요. 그래서 이들의 가정은 정말 철옹성 같습니다. 제가 정말 삐딱하게 감상하지요.
2021.11.02 13:20
무슨 말인지 잘 알 것 같아요. 중산충의 위선을 말하시는 거 아닌지. 저는 그런 위선이 역겹다고 어렸을 때는 생각했는데, 살아 보니 중산층 되는 것도 어렵고 위선, 겉으로 착한 척하는 것도 어렵더라구요. 주변을 챙기며 자신 가정의 철옹성을 쌓는 것도 누구나 할 수 있는 것은 아니구나 싶었어요.
사실을 말하자면 톰과 제리처럼 살고 싶습니다.
시작부터 끝까지 겉으로 보이는 모습들만 보여주지 내면을 친절하게 설명해주진 않는 영화라서 각자 생각대로 해석이 많이 달라질 수 있는 것 같아요. 예를 들어 톰&제리 가족도 겉보기엔 내추럴 본 위너들 같지만 사실 그런 이미지와 행복을 유지하기 위해 물밑에서 사력을 다할 수 있는 거지만 영화에선 확인할 길이 없구요. 그 재수 없는 며느리 후보(사실 어떤 면에서 재수 없다고 느끼셨는지는 저도 이해할 것 같습니다 ㅋㅋ)도 그게 타고난 성격일 수도 있지만 사실 평소엔 칙칙한 캐릭터인데 장래 시부모 만나는 자리여서 거기서만 사력을 다해서 긍정왕 코스프레를 했을지도 모르구요.
만약 '제리네도 사실 그렇게 살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고 가정하고 본다면 제가 봤던 거랑은 이야기가 많이 달라지겠죠. 사람들은 누구나 타인들을 수용할 공간을 '어느 정도'씩 갖추고 그 공간을 활용해서 남들과 어울리며 살지만, 당연히도 그 공간엔 한계가 있기 때문에 누군가가 메리처럼 그냥 훅 들어와 버리면 대부분은 제리네처럼 일단 밀쳐내기를 택할 거에요. 제리네가 진작에 메리에게 상담을 권하지 않은 것도 비슷한 맥락으로 이해할 수 있구요. 자기 자신도 아니고 가족도 아닌 남에게 정색하고 '넌 시급한 치료가 필요해'라고 주장하려면 현대 사회의 세련된 교양인(??)들에게 은연 중에 합의된 선을 많이 넘어야 하죠. 걍 가볍게 '상담 한 번 받아보면 어때? 보탬이 될지도 모르는데...' 라고 말하는 정도야 괜찮겠지만 메리가 그 정도 말로 상담 받으러갈 사람도 아니었던 것 같구요.
그래서 전 메리는 물론이고 제리네도 비난하거나 풍자하려는 의도의 이야기는 아니라고 봤습니다. 굳이 말하자면 평범한 사람들에게 보편적으로 존재하는 '한계'에 대한 이야기에 가까워 보였어요. 아무리 교양 있고 생각 올바르게 박히고 주변 사람 챙기기 좋아하는 사람이어도 (영화 속 제리네 모습을 보면 그렇죠.) 결국 타인을 위해 자신의 무언가를 내주는 데에는 한계가 있다는 것. 적당히 거리를 두고 사는 게 국룰이긴 한데 그걸로는 부족한 사람들이 현실에 존재하고 그건 매우 안타깝지만 어쨌든 그게 세상 살이라는 것... 정도요.
뭐 당연히 사람마다 다를 테니 제 느낌이 맞다는 얘긴 아니구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