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분짓기에 대한 생각들

2021.10.30 16:17

thoma 조회 수:464

다녀올 곳이 있어서 오랜만에 장거리 운전을 하면서 이런저런 생각을 해 봤습니다. 날씨가 흐려서 운전하기 좋았습니다. 산이 노릇노릇 울긋불긋해졌습니다. 곧 헐벗겠죠.


예전에는 계층이나 교양의 차이는 이루어지기 어려운 사랑이야기의 조건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지금은 그냥 인간의, 인간 관계의 조건이라고 생각합니다. 


넷플릭스에서 독일산 '향수'라는 드라마를 우연히 클릭해서 2화까지 봤습니다. 끔찍한 범죄 수사물인데 수사관이나 피해자의 주변인이나, 등장인물들 누구도 엽기적으로 훼손된 시신에 놀라지 않는 놀라운 드라마더군요. 이런 일쯤 일상이잖아, 라는 듯이요. 춥고 비오는 날씨의 연속에다가 축축한 숲이 배경이라 그럭저럭 보고 있는데 접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너무 막나가는 내용이고 공감 지점이 안 생겨서요. 이 드라마의 피해자 주변 친구들은 청소년기에 같은 학교를 다니며 자기들끼리 어울려 다니던 패거리입니다. 그 중 한 명은 이가 못 생겨 '합죽이'란 별명으로 불리는데 함께 학교를 다닌 다른 이들 말로는 왜 그 패거리에 얘가 꼈는지 알 수 없다는 겁니다. 성적, 외모, 취향 등이 낄 수 있는 애가 아니라면서요. 패거리에 낀 이유는 이후 회차에 나올테죠. 

개인적인 얘길 조금 하자면 중학교 때 같은 반 친구들과 작은 모임 같은 걸 만들었어요. 실장, 부실장, 공부 잘 하는 애 등등 소위 반에서 잘 나가는 애들 대여섯이었는데 한 달에 한 번 모여서 빵집엘 가서 수다를 하기도 하고 극장엘 가거나 대학 캠퍼스에 구경을 가기도 하는 뭐 별거 안 하는 모임이었습니다. 어느 날 그 중 한 명이 자신과 친한 다른 반 애를 넣자고 해서 그애도 함께했는데 저는 내심 불만이었어요. 제가 그애랑 안 친하고 그닥 좋아하지 않는 타입이기도 했지만 우리 반에서도 왜 우리만 어울려야 하는지 반의 다른 애들 눈치가 보이던 차에 딴 반 잘 나가는 애까지 넣자니 더 모임의 성격이 이상해지는 것 같았습니다. 사실 애당초 성격이랄 것도 없어서 오래 가지 않아 모임은 흐지부지해졌지만 그때의 느낌이 아직 기억납니다. 모임에 들지 않은 우리 반 애들이 보기에 어땠을까 싶은 생각이요. 인간의 이런 구분짓기는 뿌리가 깊어서 거의 본능적인가 싶습니다.


'세상의 모든 계절'은 참 잔인한 내용의 영화라는 생각을 합니다. 제 맘대로 생각을 뻗어나가며 써 본다면, 그렇습니다. 이 부부는 메리의 의존적이고 자기파악이 안 되는 성향을 일찌감치 말해 줄 수 있었을 텐데요. 메리라는 사람에게 진지했다면 싸울 것 같으면 싸우고 관계가 끊어질 것 같으면 그랬어야 하지 않을까요. 이십 년 세월을 자신들의 '두루 좋은 사람' 이미지를 유지하느라 진실하지 않은 관계를 지속하고 있었던 것 아닌가요. 톰과 제리가 '두루 좋은 사람' 이미지를 유지해야 한다고 의식하고 사는 위선자들은 아니겠지만, 나쁜 사람이란 소리를 피할 수 있는 교양인의 제스추어가 뼈속 깊다는 생각은 듭니다. 결국 그들의 삶이 메리의 삶이 될 수 없음에도 될 수 있는 것처럼 생각하게 합니다. 결정적인 순간에 처절하게 구분지어지고, 구경꾼임을 알게 하고요. 구경꾼으로 말석에 끼어 있는 것만으로 감지덕지해야 하나 싶기도 합니다. 로이배티님 말씀처럼 이 부부와 메리 캐릭터는 매우 거리가 멀죠. 제가 어느 쪽으로 더 가 있느냐 하면 메리가 너무 싫지만 메리 쪽 인간이기 때문에 아예 내쫓지 않고 자신들의 행복의 자리에 말석을 내주고 보게 하는 잔인함이 노여웠습니다. 이 행복한 부부를 중심으로 제각각 불행을 안고 사는 주변인들을 보면서, 본 영화가 교묘한 후기 자본주의에 대한 우화인가 싶기도 하고요. 집에 디브이디가 있어 한 번 더 봤는데, 그때의 체하는 느낌이 다시 살아났습니다. 배우들의 연기는 더 보탤 말이 없어요. 

어떻게 글을 끝낼까....솔직히 말해서 아들의 애인은, 죄송하지만 재수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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