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버스라는 설정

2023.05.17 09:31

Sonny 조회 수:626

어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하는 유운성 평론가의 비평에 대한 강의를 듣고 왔습니다. 강의는 재미있었는데 제 육신이 노곤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버려서 잠이 깰 때는 겸연쩍더군요. 그래도 후반부에 영화평론가를 영화 작품이나 감독에게 종속된 직업군인 것처럼, 모더레이터로 활용하는 지금의 기조에 대해 비판조로 말씀하시는 게 꽤 와닿았습니다. 비평은 현재 여행지가 사라져버린 기행문처럼 영화가 없더라도 읽을 수 있는 종류의 글이 되어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신선했습니다.


유운성 평론가의 강연 중 제일 흥미로웠던 것은 멀티버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스필버그의 [파벨만스]를 이야기하면서, 이 영화는 최근의 멀티버스 서사에 당황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는군요. 스필버그는 본인이 제작에 참여했던 [백 투 더 퓨처]의 타임머신이나, 직접 감독했던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위조 개념으로 정작 본인이 지금의 멀티버스 세계관의 창시자 같은 사람입니다. 어딜 가도 자신과 같은 자신이 있고 과거를 가든 미래를 가든 계속 '지금, 여기'라는 현재성을 느끼게 된다는 그 설정이 지금은 독립영화에든 상업영화에든 너무 당연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그걸 낯설어한다는 것입니다. 멀티버스 설정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의 설정이 크게 먹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세계의 현재로 슉 가버리면 되니까요.


듣고보니 저도 저런 감각을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볼 때 느꼈던 것 같습니다. 살아남은 어벤져스들이 머리를 맞대고 내놓은 해결책이 멀티버스였죠. 그걸 보면서 좀 얍삽하다고 느꼈습니다. 죽음이란 사건의 가장 강력한 점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영화의 러닝타임 안에서 일어난 일도 아니고, 심지어 전편에서 벌어진 죽음이란 사건을 어쩔 수 없이 납득한 관객들에게 '다른 세계로 가면 되지!'라고 하는 게 이 세계의 불변의 법칙을 함부로 건드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픽션이라는 것이 종종 비현실적인 초월적 법칙을 제공해서 쾌감을 제공하는 것이긴 합니다만 모든 불행과 슬픔조차도 간단하게 무위로 돌릴 수 있는 이 세계관에 대해서는 뭔가 좀 의구심을 품게 됩니다. 글쎄요, 그게 그렇게 뚝딱 이뤄지는 일일까요.


멀티버스 안에서는 뭐든지 가능합니다. 모두가 바라는 성공과 행복은 물론이고 꿈도 꾸기 싫은 실패와 비참까지도 겪을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체험의 전능함을 부여하는 이 세계관 안에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과연 현재, 이 곳의 나 자신일까요. 혹은 벌어지지 않은 세계를 근거로 들면서 무한한 가능성에 홀로 취하는 것일까요. 수천만의 세계 중에서 하나뿐인 세계라는 이 관념이 우리에게 어떤 감각을 부여할지 좀 의심스럽습니다. 유운성 평론가는 이 멀티버스를 오가는 느낌이 포르노 서칭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는데(유운성 평론가 본인이 제시한 개념이 아니라 이미 서구 평론가 쪽에서 나왔던 지적이라고 합니다) 그런 식의 유물론적 감각이 우리의 픽션세계설정도 바꾸는 것 같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0808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9879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0138
123331 [펌] 일본 관료주의... 뭐 이런 것들이 ㅡㅡ;; [16] 01410 2011.03.19 5911
123330 [바낭] 인간관계와 결혼식 [22] Planetes 2010.12.29 5911
123329 방금 스타골든벨, 나르샤가 김정민 루머에 대해 직접 밝혔네요 [4] mezq 2010.09.25 5911
123328 김정은의 초콜릿에서 연아 노래 불렀어요 [11] 사람 2010.08.02 5911
123327 김광진 의원 놀랍네요. [29] 푸른새벽 2016.02.23 5910
123326 가장 섹시한 시각 [19] eltee 2012.08.03 5910
123325 엄마가 힛걸에 미쳤어요ㅡ.ㅡ [20] dl 2011.12.16 5910
123324 여의사 부끄럽다 치료거부, 환자사망... [12] clancy 2012.07.23 5910
123323 어제 무도에 나온 한의사 진짜로 저렇게 진료하나요? [11] zerokul 2013.07.21 5909
123322 오늘의 정봉주 접견 서신.jpg [65] 푸른새벽 2012.02.03 5909
123321 20대 후반~30대 초중반 남자 가방 추천 부탁드립니다..선물용이에요.. [7] being 2010.10.10 5908
123320 서울시의회, 민주당 압승 [4] 빈칸 2010.06.03 5908
123319 김완선과 왕가위가 [9] 감자쥬스 2011.05.24 5907
123318 남자의 질투심 유발을 위해 옛 애인과 단 둘이 저녁식사라.. [17] 2012.07.13 5906
123317 우울증은 두뇌에 해부학적 이상을 일으키는... <우울증에 반대한다> [7] being 2011.02.12 5906
123316 한겨레신문에서 역대급 만평 나왔네요. [13] soboo 2014.06.02 5905
123315 흔한 미국 의료비 경험담 [31] 레옴 2014.05.16 5904
123314 길거리 헌팅! [32] 태평 2013.04.18 5904
123313 정말 이해안가는 투애니원의 행보..... [16] 디나 2010.08.04 5904
123312 오늘 장소 헌팅차 듀게분들 댁에 다녀왔습니다. 변태충 2010.06.23 5904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