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5.17 09:31
어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하는 유운성 평론가의 비평에 대한 강의를 듣고 왔습니다. 강의는 재미있었는데 제 육신이 노곤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버려서 잠이 깰 때는 겸연쩍더군요. 그래도 후반부에 영화평론가를 영화 작품이나 감독에게 종속된 직업군인 것처럼, 모더레이터로 활용하는 지금의 기조에 대해 비판조로 말씀하시는 게 꽤 와닿았습니다. 비평은 현재 여행지가 사라져버린 기행문처럼 영화가 없더라도 읽을 수 있는 종류의 글이 되어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신선했습니다.
유운성 평론가의 강연 중 제일 흥미로웠던 것은 멀티버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스필버그의 [파벨만스]를 이야기하면서, 이 영화는 최근의 멀티버스 서사에 당황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는군요. 스필버그는 본인이 제작에 참여했던 [백 투 더 퓨처]의 타임머신이나, 직접 감독했던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위조 개념으로 정작 본인이 지금의 멀티버스 세계관의 창시자 같은 사람입니다. 어딜 가도 자신과 같은 자신이 있고 과거를 가든 미래를 가든 계속 '지금, 여기'라는 현재성을 느끼게 된다는 그 설정이 지금은 독립영화에든 상업영화에든 너무 당연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그걸 낯설어한다는 것입니다. 멀티버스 설정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의 설정이 크게 먹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세계의 현재로 슉 가버리면 되니까요.
듣고보니 저도 저런 감각을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볼 때 느꼈던 것 같습니다. 살아남은 어벤져스들이 머리를 맞대고 내놓은 해결책이 멀티버스였죠. 그걸 보면서 좀 얍삽하다고 느꼈습니다. 죽음이란 사건의 가장 강력한 점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영화의 러닝타임 안에서 일어난 일도 아니고, 심지어 전편에서 벌어진 죽음이란 사건을 어쩔 수 없이 납득한 관객들에게 '다른 세계로 가면 되지!'라고 하는 게 이 세계의 불변의 법칙을 함부로 건드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픽션이라는 것이 종종 비현실적인 초월적 법칙을 제공해서 쾌감을 제공하는 것이긴 합니다만 모든 불행과 슬픔조차도 간단하게 무위로 돌릴 수 있는 이 세계관에 대해서는 뭔가 좀 의구심을 품게 됩니다. 글쎄요, 그게 그렇게 뚝딱 이뤄지는 일일까요.
멀티버스 안에서는 뭐든지 가능합니다. 모두가 바라는 성공과 행복은 물론이고 꿈도 꾸기 싫은 실패와 비참까지도 겪을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체험의 전능함을 부여하는 이 세계관 안에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과연 현재, 이 곳의 나 자신일까요. 혹은 벌어지지 않은 세계를 근거로 들면서 무한한 가능성에 홀로 취하는 것일까요. 수천만의 세계 중에서 하나뿐인 세계라는 이 관념이 우리에게 어떤 감각을 부여할지 좀 의심스럽습니다. 유운성 평론가는 이 멀티버스를 오가는 느낌이 포르노 서칭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는데(유운성 평론가 본인이 제시한 개념이 아니라 이미 서구 평론가 쪽에서 나왔던 지적이라고 합니다) 그런 식의 유물론적 감각이 우리의 픽션세계설정도 바꾸는 것 같습니다.
2023.05.17 11:37
2023.05.17 11:53
모티 앤 릭 나중에 한번 봐봐야겠군요 시간이 날 지 모르겠지만...
2023.05.17 13:05
앗, 다시 찾아보니 [릭 앤 모티]였네요. 바꾸지 않고 놔두겠습니다. (창피)
2023.05.17 12:32
과거는 변합니다 보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게 아니라 그냥 달라집니다 만일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건 그냥 그 개인이 과거에 얽매이기 때문입니다
2023.05.17 12:54
마블 영화들은 관객을 너무 안전하게 위치하게 해요. 그건 그것대로 좋지만 너무 그것만 있어도 안되겠죠.
다 한 때가 아닌가 합니다.
2023.05.17 13:06
2023.05.17 18:56
2023.05.17 19:06
그쵸. 그냥 외전 같은 이야기인데 본편에서 하나의 창구로만 이용해버리는 건 뭔가 소모적이면서 전혀 멀티버스스럽지가 않죠. 그래서 어제 유운성 평론가는 멀티버스가 멀티버스가 아니라 울트라버스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더군요.
2023.05.18 08:26
다중 우주라는 게 충분히 재밌게 써먹기 좋은 소재이긴 한데 요즘 마블의 멀티버스는 뭔가 고갈된 아이디어를 극복하기 위한 꼼수 같아서요. '노 웨이 홈' 같은 식으로 한 번 아주아주 알차게 써먹고 넘기면 좋은데요. 다음 스파이더맨 애니메이션도 또 멀티버스인 것 같고... 미리 질려 버리는 느낌입니다. ㅋㅋ
2023.05.18 09:22
다음 스파이더맨 애니메이션은 마블과는 큰 관련이 없습니다 ㅎㅎ 어떻게 보면 그 작품이 멀티버스를 훨씬 더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고도 느껴져요. 그림체까지 완전히 다른 캐릭터들이 나오는 게 정말 애니메이션에서만 구현가능한 멀티버스같더군요 전 그 스파이더맨은 기대 중입니다... (평론가님도 앞으로 스파이더맨은 이제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더군요 ㅎㅎ)
2023.05.19 11:07
2023.05.19 11:48
편의에 따라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만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개념으로 이해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유운성 평론가가 [백 투 더 퓨처]가 시간여행물인 걸 몰라서 그렇게 설명한 게 아닙니다. "돌이킬 수 없음"의 개념이 점점 무효화되어가는 영화적 세계관에 대해 설명하려는 의미입니다. 그 기준이 차원이 됐든 시간축이 됐든, 영화의 주인공들이 갑자기 다른 세계로 가버리면서 뭔가를 뒤바꾼다는 그 개념 자체가 영화 속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2023.05.19 18:24
저는 (코믹스에서는 계속 써먹어왔지만, 죽어버린 컨텐츠를 돌려막기나 영원히 우려먹기 위한 도구로..) 멀티버스가 대중적으로 현시점에 올라오는 이유가 있으리라고 생각하는 편입니다. 개인의 특성이 가상세계를 통해 옛날 페르소나라고 불렸던 시절의 상상을 뛰어넘는 수준으로 파편화 되고 있기 때문이라고요. 이 가상공간에서 저 가상공간으로 휙 뛰어넘고 전의 정체성을 폐기하는, 혹은 다중계정은 당연하고 여러 카테고리로 자신의 프사를 스위칭하는 이 세계의 반영이라고 생각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