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2.17 20:58
한 15년 전에 이 사람에 대한 글을 쓴 것 같은데, 원래 제가 한이야기 또 하고 또하는 사람이라서요
밑에 로이배티님의 슬램덩크에 대한 글을 읽으면서 저한테는 당연히 기억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그때 몰랐지만 마지막이었던 그날 저녁, 왜였는 지 기억나지 않는 이유로 대학로에서 만나고 (집도 학교도 대학로와는 전혀 관계없는데, 거기다가 공연을 봤다는 기억도 없고요) 집으로 돌아오는 좌석버스에서 오빠가 슬램덩크에 대해 이야기 했어요. 요즘 자신이 아주 재미있게 보는 만화라고. '정말 좋아하는 이유는 아이들이 발전을 안해, 그냥 그 성격 드대로야, 원래 스포츠 만화 보면 막 애들이 변하잖아'. 그날 일이 거의 기억나지 않는데 딱 그 순간만요. 아마 오빠랑 둘이 킥킥 거리면서 웃어서, 집에 돌아와서 걸어가면 되는 거리에 살던 이모네 사촌 동생 책장에서 그 다음날부터 슬램덩크를 읽어서 이겠죠.
아버지가 돌아가신 해 겨울 방학에 만난 오빠는 정말 오빠 였습니다. 그렇게 마지막으로 보고 스웨덴에 왔다 연락이 끊어졌어도 별 걱정없었어요. 둘이 아는 사람이 있어서 언젠가 마음 먹으면 다시 만나겠지 했거든요. 정말 오빠가 아빠가 되고 내가 엄마가 되어서 애들이랑 다 같이 만나야지 라고 생각했었지요. 그러다 그 지인분께 오빠 어떻게 지내요? 라고 물었을 때 스스로 삶을 마감했다는 답을 들었을 때 제가 받은 충격은 참 컸습니다. (그는 화학자였어요. 그런데 전공지식을 사용하다니 하고 화를 냈던 기억이) 15년전에도 썼는 데 엄마랑 동생이, 사람이 좀 어두웠다고 말했을 때 화도 많이 났고요. 제가 오빠를 기억하면 처음으로 떠오르는 장면은 늘 4월 어느날 해가 잘 들어오던 제 방에서 어깨를 대고 앉아 조근 조근 삶에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인가 (정말로 그의 말이 맞았어요) 말해주던 모습이거든요. 얼떨결에 동생하겠다고 한 아이가 영화보러가자고 하면 정말 본인은 별로인 영화도 같이 보러가 주고 (너 보여줄려고 온 영화니 니가 좋았다면 좋네) .
그 소식을 듣고 한참 오빠를 기억하던 시기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오빠 꿈을 꾸었습니다. 꿈에서 한참을 같이 있었는데 오빠가 이제 갈 시간입니다. 저는 급하게 오빠 손을 잡고 물어보죠. 오빠 저랑 결혼할래요? 우리 그렇게 함께 살래요? 오빠가 답을 하죠. 물어봐주어서 고마워 그런데 너도 알지, 우리는 그렇게 사랑하지 않아. 그래도 괜찮아.
사람이 기억나니 그 사람을 잊고 지내던 날들은 없었던 것 같습니다. 사실 몇달, 어쩌면 몇년은 아무 생각 없었을 텐데도요. 기억의 시간에 와 있으니 그는 마치 항상 이 시간에 있었던 거 같습니다.
갑자기 깨닫습니다. 내가 그를 마지막 보았을 때 그는 아마 25살 이었겠구나. 나는 이제 50세의 중년인데 25살의 그를 아직도 오빠라고 기억하는 구나.
아침에 일어나서 보니 울로프의 발이 침대밖에 나와있습니다. 그 발을 쓰다듬으면서 오빠도 살았더라면 누군가의 어깨에 자신의 어깨를 대고, 발을 쓰다듬으며 살고 있다면, 그렇게 믿고 내가 갈 수 있었다면 이란 생각이 스쳐지나갑니다.
에프터선이 상여중이군요. 가서 봐야겠습니다.
2023.02.17 21:54
2023.02.18 05:33
감정이 마구 새어나와요. 그럴 때가 있어요
2023.02.17 21:59
정말 아련한 추억이네요. 슬램덩크가 들어간 제목을 보고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내용이라 더 훅!하고 오는 게 있습니다. 공유해주셔서 감사해요.
2023.02.18 05:34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2023.02.17 23:02
2023.02.18 05:36
송태섭의 스토리는 무언가요? 그도 그렇고, 저보다 젊은 나이에 떠나신 아빠도 그렇고.. 그들을 기억하면 저도 영원히 어립니다.
2023.02.18 12:35
슬램덩크 극장판을 보신 줄 알았습니다. 짤막하게 설명 덧붙이면 슬램덩크 극장판에는 어린 시절 세상을 떠난 형과의 추억을 회상하는 송태섭의 스토리가 산왕전 경기 스토리에 추가가 되었습니다. 사우르스님이 말씀하신 '세상을 떠난 이들의 나이에 살아서 어느새 도달한' 그 이야기가 정확히 나옵니다.
슬램덩크에 대한 여러 추억을 접하게 되네요. 좋은 주말 되시길!
2023.02.18 17:32
아,,
아버지보다 나이가 더 많아졌을 때, 그때를 돌아보면서 아 아빠도 엄마도 사실은 어렸구나 란 생각과 그때의 엄마가 참 가엽다, 참 대단하다 그런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왜 지금 효도하지 못하는 가?는 또 다른 이야기)
까뮈의 최초의 인간이란 소설에도 그런 장면이 나오죠. 아버지의 무덤에서 갑자기 아 아버지는 청년이었구나 라는 걸 깨닫는.
2023.02.19 08:18
까뮈의 최초의 인간... 나중에 읽어보겠습니다!
2023.02.18 02:57
'아련하다'라는 표현이 이렇게 적절할 수가 없네요. 뭐라 덧붙이기도 조심스럽고... 글 잘 읽었습니다.
2023.02.18 05:37
기억할때 가끔은 저는 우리를 바라봅니다. 물론 가능하지 않은 일이지요. 그런데 마치 제 삼자가 되어 그때의 우리를 보고 있다고 생각할 때가 있어요. 그도, 그의 어머니도 저한테 이렇게 그가 중요한 사람이었다는 걸 알았을까요? 단 한 순간이라도. 아마 이래서 제가 제 친구들한테 사랑한다는 말을 자주 하는 거 같아요. 살아 있을 때 많이 해두자
번호 | 제목 | 글쓴이 | 날짜 | 조회 수 |
---|---|---|---|---|
공지 |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 DJUNA | 2023.04.01 | 33471 |
공지 |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 엔시블 | 2019.12.31 | 52696 |
공지 |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 DJUNA | 2013.01.31 | 363093 |
122644 | 아일랜드(TVN)를 보았어요. (& 비트세대?) [2] | 노리 | 2023.03.15 | 439 |
122643 | [넷플릭스바낭] 구름 끼고 바람 부는 수요일엔 '레드 로즈'를. [10] | 로이배티 | 2023.03.15 | 486 |
122642 | 테트리스에 대해 [4] | catgotmy | 2023.03.15 | 339 |
122641 | 소울메이트 [2] | DJUNA | 2023.03.15 | 726 |
122640 | 에피소드 #28 [4] | Lunagazer | 2023.03.15 | 92 |
122639 | 프레임드 #369 [6] | Lunagazer | 2023.03.15 | 118 |
122638 | 오늘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마지막으로 상영되는 자크 타티의 위대한 걸작 <플레이타임> 초강추! ^^ [8] | crumley | 2023.03.15 | 471 |
122637 | 펜데믹이 사실상 종결되었습니다. [3] | soboo | 2023.03.15 | 1190 |
122636 | 물이 너무 차다, 우리 봄에 죽자 [5] | Kaffesaurus | 2023.03.15 | 1077 |
122635 | 네이버 블로그 [1] | DJUNA | 2023.03.15 | 641 |
122634 | 3월 15일 [3] | DJUNA | 2023.03.15 | 466 |
122633 | 서부 전선 이상 없다 [2] | DJUNA | 2023.03.15 | 624 |
122632 | 여기는 감옥입니다 감옥! [15] | Lunagazer | 2023.03.14 | 910 |
122631 | 프레임드 #368 [2] | Lunagazer | 2023.03.14 | 118 |
122630 | 라즈베리 상은 블론드가 받았네요 [2] | 쥬디 | 2023.03.14 | 468 |
122629 | 닌자거북이 (1990) | catgotmy | 2023.03.14 | 168 |
122628 | 키보드 이야기한 김에 마우스 잡담도... | 돌도끼 | 2023.03.14 | 211 |
122627 | 그냥 키보드 잡담 [4] | 돌도끼 | 2023.03.14 | 298 |
122626 | 룸 이스라엘 버전 | 돌도끼 | 2023.03.14 | 172 |
122625 | 왜 자꾸 남의 이름을 베낄까 [1] | 예상수 | 2023.03.14 | 41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