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인과 현타, 그리고 그 극복

2020.07.10 15:00

MELM 조회 수:861

정치인들에게는 각자의 대의가 있습니다. 그리고 그 대의를 위해서는 권력이 필요하죠. 이걸 추구하는 과정은 험난한 일 입니다. 뻘에 구르는 일이고, 자신을 대의-권력 기계로 만드는 일 입니다. 스스로를 소모시키는 일이죠.

이 치열한 자기소모의 과정 속에서 현타가 오는 건 자연스러운 일 입니다. 열심일수록 더 현타가 오기 쉽죠. 그만큼 갈등과 부조리에 더 노출될터이고 자기를 더 소모할테니까요.

이 현타가 왔을 때, 대처하는 첫번째 방법은 받아드리고 포기하는 겁니다. 표창원이 그런 케이스죠. 그가 지역구 관리를 포기했다는 건 널리 알려진 얘기죠. 자존감 강한 성격에 지역구 행사마다 돌아다니며 굽신거리는 것, 그럴 때 오는 현타를 못 견딘거죠. 유시민이 직업 정치를 결국 포기한 것도 마찬가지고요.

두번째 방법은 현타가 온 상황에서 의미를 되찾을 공간을 만드는 것이죠. 대표적인 예가 미국 정치(주로 공화당이지만 민주당 역시)에서 가족의 역할입니다. 미국 정치인들에게 가족은 가치의 중심이죠. 그렇게 성별화 된 곳에서 현타를 극복할 의미-자원을 동원하는거죠. 덕분에 가족을 위해 자신의 정치적 커리어를 희생하는 제스처가 미국에서는 탁월한 정치적 전술로 기능하기도 합니다.

또 다른 방법은 유럽식의 공과 사의 분리입니다. 니가 공적으로 역할을 하면 사적으로 뭔 짓을 해서 현타를 극복해도 상관 안 한다는 태도죠. 물론 위법은 아닌 수단으로요. 그래서 정치인들이 사적으로 연애를 하든 바람을 피든 큰 문제거리가 되지 않습니다.

문제는 그런 현타를 극복할 마땅한 수단이 없을 때 입니다. 이럴 때 최악의 경우, 자기연민의 판타지에 빠져들죠. 대의를 위해 희생한 결과 공허해진 나 자신이라는 판타지요. 그리고 그런 나를 체워줄 상대를 찾죠. 그리고 그 상대는 가까이에 있는 을이 됩니다. 대외적으로는 감춰야 할 공허한 나를 보여줄 수 있는 상대여야 하니까요. 그러면서 상대에게 연애-판타지를 만들어 갑니다. 안희정이 교과서적 사례죠. 상대가 을의 포지션이기에 적극적으로 저항하지 못한게 이 판타지 속에서는 소극적 동의로 이해 됩니다. 대의에 헌신하는 나 / 그 과정에서 지친 나를 위로해주는 너 라는 환상이 굴러가는거죠.

한국 정치의 문제라면, 정치인들이 이런 현타를 극복할 마땅한 기제가 마련되어 있지 않다는 것이겠죠. 물론 그렇다고 정치인들이 모두 자기 연민의 판타지에 빠지지는 않습니다. 다 나름의 임시 자구책을 만들겠죠. 그 중에서 최악의 답을 찾은 건 자신의 책임이고요.

개인적으로 노무현은 현타 자체를 재출발의 애너지로 삼았던 인간이 아니었나 싶습니다. 그렇게 점점 더 큰 순환을 그리다가 그것이 불가능해지는 순간이 왔을 때 선택을 한 것이고요.

반면, 문재인은 어쨌거나 그것이 인격이든, 종교든, 부채의식이든 뭐가 되었든 간에 현타를 정확히 인지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정치를 안 하려고 했으니까요), 나름의 방식으로 소화를 하고 있다는 믿음을 불러일으키는데 성공한 것이고요. 그게 정치인 문재인의 최대 무기이기도 하죠.

아, 그리고 저 일반적인 정치인들이 구성하는 임시 자구책은 대부분 가족(마국)-사생활(유럽)의 불풍분한 혼합물이 아닐까 싶어요. 공과 사를 분리하긴 하는데, 여기서 사란 대부분 가족-재생산이죠. 그래서 그토록 위장전입, 부동산, 학력세습이 빈번한 것이고.

더해서 미통당의 경우, 정치인이 얼마나 있을지 자체가 의문이니 애초에 여긴 현타 문제가 없을지도 모르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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