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 야그] 죽어야 사는 여자

2012.01.12 20:30

LH 조회 수:3629


역사적인 인물이 되기 위해서 가장 중요한 조건 중 하나는, 살아서 훌륭한 일을 해야하는 건 맞긴 한데, 그 이상으로... 잘 죽어야 하는 게 아닐까 합니다.
잘 죽는다는 게 어떤 거냐는 질문이 돌아올 법도 한데,  대충 중요한 조건을 몇 개 들어보면 이런 게 있겠네요.

 

1. 되도록 젊은 나이로 떠날 것.
2. 멋지고 뽀대나게(?) 갈 것.
3. 그 사람이 죽은 뒤 세상 만사 시궁창이 될 것.

 

우선 1번, 오래오래 살아서 벽에 뭐 칠하면서 망가지는 것 보다는 한창 나이에 아깝게 세상을 뜨는 것이 낫습니다.
그리고 이건 나이만의 문제는 아닙니다. 좀더 냉철하게 말하면 미처 망가질 시간이 없이 가는 겁니다.
인간 사는 게 오르막도 있고 내리막도 있으며, 처음 좋았던 게 나쁜 것이 되기도 합니다. 하지만 일찍 죽으면, 막 꿈을 펼치려는 순간 저 세상으로 가면 아쉬움이 남되 망가지진 않습니다.

 

2번, 앞의 조건과도 연결이 됩니다. 괜히 드라마의 주인공들이 백혈병으로 가는 게 아닙니다. 치매나 치질같은 병은 결격 사유입니다. 사실 오랜 병을 앓다보면 사람이 까칠해지고 초췌해지는 법입니다만, 드라마에서 그건 생략되고 이 세상 모든 죄를 끌어안고 희생하는 성인이 되어버립니다. 또 오래 앓지 않기 위한 심장마비등의 급성 질환도 있지요.
적어도 여자들과 술 마시다가 죽거나 복상사 같은 것 보다는 훨씬 낫습니다.

특별한 상황으로, 암살이나 전사를 하는 게 있습니다.
이순신 장군도 참 잘 죽은 사람입니다. 왜군과 싸우는 마지막 전투에서 전사했잖아요. 만약 살아남았다 봐요, 살아서 공신으로 책정이야 되겠지만 질투심의 화신인 선조가 어찌 가만히 놔뒀겠어요. 그 분이 돌아가신 것이야 비극이지만, 결과만 놓고 보면 참 다행이다 싶어집니다.

 

3번으로는... 그가 죽은 뒤 모든 이들이 "그 사람이 살아있었더라면 이 꼴은 안 났을 텐데'라고 말하는 상황이 펼쳐집니다. 이를테면 은하영웅전설의 키르히아이스라던가. 또 손문이 있겠지요.
한 평생 중국의 독립을 위해 노력했던 그는 중국 통일을 목전에 두고 급작스럽게 세상을 떠납니다. 그가 죽은 뒤 중국은 자유당과 공산당으로 쪼개져서 박터지게 싸웠지요.
뭐 여기에 더해 제갈공명도 이쪽 카테고리에 들어간다고 봅니다. 과연 촉나라가 통일을 할 수 있겠냐 어떻겠냐는 나중 문제로 치더라도요.

좀 넓게 잡으면 김구 선생도 비슷한 케이스라고 봅니다. 만약 그 때 서거하지 않으셨더라면야, 최소한 이승만을 견제하거나 그... 꼬라지까지 되었을까요?
물론 나쁜 길로 빠졌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어찌 알겠습니까.

 

그래도 가장 유명하게 잘 죽은 사람이라면 역시 에비타가 甲일겁니다.
저야 아르헨티나 역사에는 일천해서 영화 및 개설서로만 접했기에 자신있게 말할 수는 없습니다만. 처음 가난하게 태어나, 고급창녀가 되었다가 정치가 후안 페론의 두 번째 아내가 되어 아르헨티나의 국모로 떠오르게 된, 그리고 지금까지도 추앙을 받고 있는(그리고 그만큼이나 논란을 일으키고 있는) 여성이지요.

 

지인 분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녀는 성녀이자 창녀였고, 부통령을 꿈꾸며 암살할 사람들의 리스트를 작성하는 권력욕 넘치는 여인이자, 가난한 사람들의 사정에 눈물 흘리며 도움의 손을 아끼지 않은 사람이었습니다. 참 모순 되지만, 어차피 사람이란 그런 존재이겠죠.

게다가 그녀는 위의 3개 조건을 모두 만족시키는, 참 잘 죽은 사람이었습니다. 그녀는 33살의 젊은나이로 자궁암에 걸려 세상을 떠나게 됩니다. 국민들은 대단히 슬퍼했고, 남편 페론은 죽은 아내를 방부처리해서 대통령궁에 모셔놓고 영적인 지도자이자 우상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더 끔찍한 일은 그 다음에 벌어지지요. 독재정치의 끝에 페론이 쿠데타로 쫓겨나자 군부는 에비타의 신화를 두려워해서 시신을 이탈리아로 보내버립니다. 그런 와중 관리가 잘 못 된 시체는 손상되었고... 이후 페론이 돌아오고, 그의 세 번째 아내이자 대통령의 자리를 물려받은 이사벨 페론까지 에비타의 시신을 손질해서(!) 대통령궁에 갖다 놓고 정치를 하지요. 끔찍한 일이지만, 아무튼 그렇게 살아서 만큼이나 죽어서까지 방황했던 에비타는 마침내 가족묘지에 안장되게 됩니다.

 

이렇게 보면 에비타도 결코 잘 죽은 사람은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살았을 때 보단 나았을 겁니다. 만약 에비타가 암에 걸리지 않았다면 어떻게 되었을까요? 운 좋게 부통령이 되었을 수도 있겠지만, 결국 독재정치이고, 사람들은 차츰 에비타에게 질려갔겠고, 또 그녀 자신도 늙어갔겠지요.
결국 쿠데타의 발발은 정해진 거고, 종국엔 나라에서 쫓겨났던 남 베트남의 바베큐 여사 마담 누라던가 필리핀의 이멜다 짝이 났을 가능성이 훨씬 많겠죠. 더 심하다면 차우세스쿠의 부인 엘레나 처럼 되던가.

 

그렇다고 다행한 일은 아닙니다. 죽음은 완전한 면죄부가 될 수 없어요. 에비타가 여전히 좋게 이야기 되고 남편보다는 욕도 덜 먹고 있긴 하지만, 그렇다고 그녀의 모든 행동이 올바른 것은 아니었거든요.
더군다나 그녀를 성녀로 만들어놓은 자선활동은 나라를 망친 포퓰리즘의 근원으로 거론이 되기도 하죠. 허나 그보다는 - 불쌍한 사람 하나 둘 도와주어 개인적인 만족을 맛보고 정치적으로 선전 하되, 정작 모든 잘못이 야기되는 사회의 잘못은 그대로 둔 미봉책이었다는 데 주목을 하고 싶네요. 가난하되 높으신 분들께 선택받은 몇 명에게 자선을 베푼 것으로 전체를 퉁치는 일은 결코 옳은 일이라 할 수 없습니다. 특히나 나라의 지도자라면 말이죠.
결국 쓰디쓴 현실에다 아주 얇은 설탕을 입혀 삼켜버리는 - 그런 사탕발림이었습니다.

 

사실 이렇게까지 말할 수 있는 것도 제가 한국인, 곧 외부인이기 때문일거여요. 아르헨티나 사람들로서는 다른 판단을 내릴 수도 있을 겁니다. 애초에 누군가를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은 감정의 문제이니, 그걸 공감하지 못하는 타인이 뭐라 해도 귓방망이에나 제대로 들어가겠습니까. 그래도 죽은 사람에게 산 사람의 짐을 지우는 것이야 말로 얼마나 어리석은 일인지요. 죽은 사람의 유지를 잇는다거나, 못 다 이룬 꿈을 이룬다거나, 그런 말은 나쁘지 않지만 산 것은 산 것이요 죽은 것은 죽은 것이니. 이제 이 땅 위를 배회하는 망령들에게 편안한 휴식을 주고 살아있는 사람들이 미래를 만들어가야 하는 때가 되었다는 생각이 듭니다.

 

모두 좋은 하루 되세요.


p.s :
한글과 pdf 문제 때문에 3시간을 잡아먹느라 글에 시간을 들이지 못해 좀 아쉽습니다. 나중에 수정 좀 하고 싶네요. 진짜 아쉬우니 이런 말을 남깁니다.

어쨌든 에비타의 여러 행보는 이후 많은 영부인들에게 벤치마킹 되었습니다. 에비타가 만든게 페론 재단이었던가 그랬죠? 우리나라에도 육영재단이나 정수장학회라든지가 있긴 했습니다.
그런 의미에서 육영수 여사가 미이라가 안 된게 정말 다행이다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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