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생각들

2011.01.28 06:04

푸네스 조회 수:961

1. 

소피스트 관련한 일화들 중에 이런 것이 있지요. 고대 그리스 소피스트는 웅변술을 부자 청년들에게 가르쳐주고 흔히 후불로 돈을 받았어요. 한 녀석이 자기 선생에게 돈을 내기를 거부했지요. 그러자 선생은 학생을 고소했구요. 둘의 논리는 이거였어요.


학생: 나는 재판에서 이기던 지던 돈을 낼 필요가 없다. 재판에서 이긴다면 법의 이름으로 당신에게 돈을 주지 않아도 된다고 허락을 받은거니 당연히 돈을 주지 않을 것이다. 내가 재판에서 진다고 해도 나는 돈을 낼 필요가 없다. 내가 재판에서 진다면 당신에게서 배운 웅변술과 수사학이 아무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선생: 너는 재판에서 이기던 지던 나한테 돈을 내야 한다. 재판에서 이긴다면 나한테 배운 웅변술과 수사학을 가지고 재판에서 이긴 것이기 때문에 내 가르침이 효과가 있었다는 말이다. 재판에서 진다면 당연히 법정에서 나에게 돈을 지불하라고 명령한 것이므로 너는 돈을 지불해야 한다.


이런 상황을 보고 딜레마라고 하지요. 대부분의 도덕적 판단에 근거한 대립은 이렇게 딜레마에 가까운 경우가 많아요. 우리는 흔히 세상에 진리가 있고 그 진리가 밝혀만 진다면 결국 정의가 승리할 것이라고 믿지요.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만만하지 않아요. 법적 판단은 더욱 더 그렇지요. 우리의 민주적 정치제도와 법제도는 모든 사람에게 스스로 해명할 기회를 주고 자신을 변호할 기회를 주지요. 그리고 그것이 현대 대부분의 자유민주주의 국가의 가장 핵심적인 내용이에요. 어떤 사람이 그 어떠한 범죄를 저질렀더라도 누군가가 그것을 완벽하게 증명하지 못한다면 범죄로 인정하지 못하지요. 그 범죄가 우리가 볼 때 명백하게 옳지 않은 것이라고 하더라도 어쩔 수 없어요. 


여기도 오래 전에 몇번 이야기 한 것 같지만 CSI와 Law and Order의 차이 같은거지요. CSI에서는 증거만 다 찾아내면 범인을 잡지만 Law and Order는 보통 증거를 찾고 범인을 잡으면 그때부터 이야기가 시작되지요. 아주 명백한 범죄라도 법정에서 범죄로 구성하지 못한다면 눈앞에서 놓쳐버리지요. 그리고 어떤 경우 그것은 그 범죄를 저지를 사람의 인권, 혹은 그 사건과 관련은 없지만 민주주의의 기본 원칙을 지키는 것과 매우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기때문에 그렇게 눈앞에서 범죄자를 놓칠 수 밖에 없는 시스템이 잘못되었다고 말하기 어려운 경우가 많지요. 로앤오더는 대부분 그런 법적 딜레마를 다루고 있어요. 거기서 등장하는 수많은 에피소드들이 보여주듯이 무엇이 잘못되었다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단지 그것이 도덕적으로 옳은 것처럼 보이지 않기 때문에 잘못되었고 고쳐져야 한다고 주장했을 때 대부분 그들이 예상하지 못했던 결과가 발생하곤 하지요. 그러한 주장을 하는 사람들이 실제로 명백하게 옳다고 하더라두요.  


2. 

밀은 어떤 행동이 다른 사람의 자유를 제한하지 않는 한 그 어떤 자유도 제한될 수 없다고 했지요. 어찌보면 우리 사회에서 많은 문제들은 밀이 제시한 것과는 다른 이유들로 다른 사람들의 자유를 제한하려고 하는데서 오는 것 같아요. 특히 그러한 자유의 제한의 이유 중에 많은 사람들이 급박하고 감정적으로 반발하게 되는 것 중 하나는 어떤 사람의 발언이나 행위가 자기 맘에 들지 않는다는 이유로 그 자유를 제한하려고 할 때이지요. 사실 우리는 그러한 행위가 얼마나 비자유적인지 잘 알고 있어요. 독재자들이 하는 것이 바로 그런 것이니까요. 그들은 보통 자기가 좋아하고 맘에 드는 도덕을 스스로 정한 다음 그것에 어긋나는 모든 발언과 행동들을 제한하고 통제하려고 하지요. 우리는 종종 독재자의 그러한 행동이 독재자가 올바른 도덕에 기대고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간주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러한 생각은 그리고 대부분 맞기도 하지요. 하지만 우리는 그 반대에 대해서는 잘 생각해보지 않아요. 그렇다면 완전히 진실과 진리와 도덕에 부합하는 그러한 가치를 지닌 독재자가 있다고 생각해 볼 때, 그 독재자가 그 완벽한 진실과 진리와 도덕에 부합하지 않는 사회에서의 발언과 행위를 제한하고 통제하는 것은 과연 옳은가? 혹은 완전한 진리와 진실과 도덕에 부합하는 다수가 있다고 할 때 그들이 그러한 이유로 옳지 않은 행위를 제한하고 통제하는 것은 옳은가? 여전히 그렇다고 생각하시는 분도 있겠지요. 예를 들어 인종차별, 살인, 강간과 같은 것들을 생각해본다면 당연히 그런 발언과 행위를 하는 것들에 대해 제한하고 통제해야 한다고 생각할 수 있겠지요. 하지만 효도는 어떤가요. 효도를 하는 것이 도덕적으로 옳겠지만 다른 사람에게 강제할 수 있나요? 금연은? 다이어트는? 운동은? 공부는? 이렇게 하다보면 그러한 옳은 진리와 진실과 도덕의 범위를 어디까지 인정해야 하는가의 문제가 남지요. 


자유의 핵심은 그 행위나 발언의 내용이 옳고 그르고에 있지 않아요. 밀이 얘기했듯이 자유의 제한은 어떤 행위나 발언의 내용에 근거하면 안되고 오직 그것이 다른 자유를 제한하느냐에 기반해서만 행해지는 것이 자유를 지키는 입장에서는 가장 확실한 것이지요. 밀의 자유의 원칙으로 우리가 우려하는 사회에서 생기는 인종차별, 살인, 강간 등은 다루어질 수 있지요. 거기서 제외되는 것은 가치의 문제, 취향의 문제, 도덕의 문제, 종교의 문제, 철학의 문제이겠구요. 


사회의 구성원들이 그러한 생각을 공유하고 있을 때 서로의 자유를 지켜주는 대화가 시작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대화의 시작이 도덕적으로 옳고 그른 것, 맞고 틀린 것으로 시작할 때 종종 핀트가 어긋나는 경우도 그렇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구요.  


3.

도덕 상대주의자는 아니에요. 하지만 내 믿음을 갖고 있으면서도 그리고 나의 확실한 가치관은 흔들리지 않으면서 상대주의자처럼 행동하는 것이 내가 믿는 도덕을 관철시키는데 그리고 다른 사람들을 설득시키는데 더욱 효과적일거라고 믿는 것 뿐이에요. 


4. 

여기서 오래 놀던 분들이 하나씩 떠나셨다니 정말 안타까워요. 제가 잘 모르는 사이 떠나신 분들도 몇 분 계신걸 이번 사태를 통해 알게 되었어요. 그분들이 다시 돌아오셨으면 좋겠고 그분들이 노는 모습을 지켜봤으면 좋겠어요. 그렇지만 또 한편으로는 이러한 사태를 거치면서 옳고 정의로운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로 전선이 그어지는 그러한 상황이 조금은 걱정되어요. 그런 선은 한 번 그어지면 좀처럼 지워지기 힘든 선이니까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8730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7277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7452
108164 외할머니를 만나고 왔어요. [4] 말린해삼 2011.01.28 1909
108163 구제역 때문에 정말 걱정이에요... 근데 바낭; [3] august 2011.01.28 1192
108162 달빛요정역전만루홈런 추모공연장 20110127 [6] 아침엔 인간 2011.01.28 2144
108161 달빛요정 만루홈런님 추모공연 다녀왔어요 [6] 빠빠라기 2011.01.28 1639
108160 [유튜브 순례] 명불허전 인도영화. [2] nishi 2011.01.28 1314
108159 일상잡담..쓰면 악플러가 달려오나요? 그럼 나도 써야지. [16] 쇠부엉이 2011.01.28 2327
108158 [질문] 아이 '엠' 러브 에서 큰 아들 (스포 있습니다) [4] bogota 2011.01.28 1696
108157 [질문] 혹시 싸인 8회에 박신양의 친구인 검시관으로 나오는 레이코(?)는 누구인가요? [3] 보살 2011.01.28 1727
108156 커트 보네거트, 100권 읽기 프로젝트 진행 상황 2, 권교정님 <셜록> (꺅!) [6] being 2011.01.28 2241
» 잡생각들 푸네스 2011.01.28 961
108154 아침부터 저는 무서웠어요. [1] 달빛처럼 2011.01.28 1629
108153 [바낭] 설에 볼만한 가족영화가 그닥... [2] 가라 2011.01.28 1483
108152 초밥 맛있는 곳? 질문입니다 [13] 3pmbakery 2011.01.28 2595
108151 축구 한일전 응원에 사용됐다는 김연아 악마 가면은 국내에서 제작한 것이라네요 [6] amenic 2011.01.28 2744
108150 단편 영화(애니메이션도 좋아요) 추천 부탁드려요 [2] 라면포퐈 2011.01.28 1079
108149 미드 추천해주세요~ [16] happy 2011.01.28 2569
108148 몽땅 내사랑 간단한 감상 [5] simplemind 2011.01.28 1935
108147 커트 보네거트 작품 중 가장 마음에 드는 것은? [19] 자두맛사탕 2011.01.28 2708
108146 8비트 Thriller! [3] calmaria 2011.01.28 1054
108145 어제밤에 있던 일 [2] Apfel 2011.01.28 1177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