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mage.jpg


데스 게임 장르의 작품을 만들겠다고 하는 것은 [죠스]를 보고 상어영화를 만들겠다고 하는 것과 비슷합니다. 벌써 [도박묵시록 카이지]가 이 분야에서 종결자급으로 할 만한 얘기를 다 해버렸거든요. 게임을 둘러싼 머리싸움, 데스 게임을 마주한 인간군상에 대한 사회학적 고찰, 데스 게임 개최의 현실적 가능성 등등... 어떤 작품을 만들던 [카이지]의 열화 복제로 보이기 십상이죠.


물론 게임을 잘 고안해서 등장인물들이 치열한 두뇌싸움을 하게 만들거나, 데스 게임 자체를 괜찮은 구경거리로 만드는 등의 탈출구는 있습니다. 그런 시도로 좋은 평가를 받은 작품들이 이미 있고요. 하지만 [오징어 게임]은 어떨까요?


[오징어 게임]은 어렸을 때 동네 친구들이랑 하던 놀이를 소재로 데스 게임을 한다는 걸로 차별화를 했습니다. 한데 문제는 그 놀이를 재미있는 데스 게임으로 만드는데 신경을 별로 안 썼다는 것입니다. 총 6개의 게임 중 세가지 게임이 비주얼 적으로 형편없습니다. 나머지 세가지 게임 중 둘은 동네 친구 놀이랑은 거리가 멀고요. 결국 작중에 나오는 동네 친구 놀이이면서 볼만한 구경거리가 되는 게임은 예고편에 나오는 '무궁화꽃이 피었습니다' 하나 뿐입니다. 그렇다고 등장인물들에게 머리싸움을 시키는 것도 아니니 데스 게임을 구경하려던 시청자 입장에서는 맥이 풀리는 부분입니다.


[오징어 게임]의 또다른 문제점은 [카이지]의 영향이 너무 노골적이라는 것입니다. 참가자 군상의 모습과 주최자와 데스 게임 참관자들 설정을 가져왔죠. 일부는 후쿠모토 노부유키의 또다른 작품인 [무뢰전 가이]를 참고한 느낌이 들고요. 이런 분위기 때문에 작품을 보다보면 '아... 이런 것보다는 그냥 [카이지]를 실사 드라마로 만들 것이지'란 생각이 강하게 듭니다. 주인공 성기훈도 이토 카이지보다 정이 덜 가는 인물입니다. 카이지가 에스포와르 호에 오르게 된 이유는 어리숙하게 아르바이트 동료였던 후루하타 타케시의 연대보증을 섰기 때문이죠. 그리고 그는 위기 상황에서 누구보다 명석하게 머리를 굴릴 줄 압니다. 반면에 성기훈은 시장에서 일하는 어머니 통장의 돈을 몰래 인출해서 TV경마장에 가는 수준의 인간입니다. 게임할 때는 조금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주긴 하지만 그 뿐이죠. 


그러나 [오징어 게임]만의 장점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여성 참가자들입니다. 생각해보면 [카이지]는 남자들만 득시글거리는 남탕물이었죠. 반면, [오징어 게임]의 여성 캐릭터들은 남성 캐릭터들의 존재감을 종종 넘어서면서 드라마에 활기를 불러일으킵니다. 특히 전 새벽과 지영의 얘기가 좋았는데, 뻔한 신파스러운 설정임에도 이 드라마 내에서 가장 가슴 찡한 장면이었습니다.


그렇게 기존 작품들의 데자뷰를 느끼게 하는 설정과 스토리 상의 허점이 눈에 띄지만 그래도 데스 게임이라는 설정의 힘이 강해서 보는 내내 지루하지는 않습니다. 앞서 게임 중에 몇 개가 비주얼이 별로라고 했지만, 그래도 데스 게임이 열리는 공간과 동그라미, 네모, 세모가 그려진 진행 요원들의 복장 등은 나름 구경거리고 배우들의 연기도 좋은 편입니다.(일부 가면 쓴 진행 요원 제외) 특히 전 결말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요약하면 설정이나 게임은 어디서 본 것 같고 이런저런 아쉬운 점이 많이 눈에 띄긴 하지만 기대를 접고 보면 적당히 볼만한 킬링 타임 드라마입니다. 작품이 주는 메시지가 뭔지 모르겠다는 불평도 봤는데... 글쎄요, 무슨 교훈을 얻겠다고 데스 게임물을 보는 건 아니잖아요. 안전한 방구석에서 TV안의 사람들이 목숨을 건 게임을 하다 죽고 살고 하는 걸 구경하려고 보는 거지.



ps. 본문에 언급한 [도박묵시록 카이지]는 물론 코믹스와 애니를 가리키는 겁니다. 후지와라 타츠야 주연의 영화를 말하는 게 아니라.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회원 리뷰엔 사진이 필요합니다. [32] DJUNA 2010.06.28 83580
763 [영화] 그린 존 (Green Zone, 2010) : WMD를 향해 질주하는 정치액션스릴러 [15] 조성용 2010.03.27 4700
762 [영화] 너를 보내는 숲 (Mogari no mori, 2007) : 정해진 이야기 규칙이 없는 숲 [1] 조성용 2010.03.28 3581
761 [영화] 위 리브 인 퍼블릭 (We Live in Public, 2009) : 인터넷은 프라이버시를 모른다 [16] 조성용 2010.03.28 3336
760 [영화] 밀레니엄: 여자를 증오한 남자들 (Man Som Hatar Kvinnor, 2009) : 좋은 추리 미스터리와 매력적인 해커 여주인공 [1] 조성용 2010.03.28 6243
759 [영화] 영혼을 빌려드립니다 (Cold Souls, 2009) : 내 속이 이리 쪼잔하다니 [18] 조성용 2010.03.29 5535
758 [영화] 브라더스 (Brothers, 2009) : 전과 다르게 변한 두 형제 [1] 조성용 2010.03.29 5172
757 [영화] 엣지 오브 다크니스 (Edge of Darkness, 2010) : 멜 깁슨은 녹슬지 않았다 [22] 조성용 2010.03.30 6358
756 [책] 고령화 가족 1분에 14타 2010.03.31 4998
755 [영화] 브라더스 (Brødre, 2004) : 다른 스타일의 같은 이야기 [2] 조성용 2010.03.31 4089
754 [영화] 폭풍전야 (2010) : 나중에 그 바닷가를 재방문해봐야 하나? [19] 조성용 2010.04.01 5889
753 [영화] 타이탄 (Clash of the Titans, 2010) : Clash of the CGIs [215] 조성용 2010.04.02 6668
752 [영화] 분노의 대결투 (The Crazies, 1973) : 업그레이드가 필요한 바이러스 [1] 조성용 2010.04.04 3826
751 [영화] 룩 앳 미 (Comme une image, 2004) : “내가 그랬나?” [1] 조성용 2010.04.04 4376
750 [영화] 매란방 (2008) [1] abneural 2010.04.28 4057
749 [영화] 라쇼몽(羅生門, 1950), '인식의 주관성'은 이제 그만 [1] [1] oldies 2010.06.01 10974
748 [영화] 속 돌아온 외다리 [1] 곽재식 2010.06.03 3706
747 [영화] 하녀 (2010) 개소리월월 2010.06.10 4990
746 [영화] '내러티브'에 희생당한 '캐릭터' [포화속으로] [1] [2] taijae 2010.06.11 4398
745 [영화] 실화를 '발견한' 영화 [맨발의 꿈] taijae 2010.06.11 4128
744 [영화] 젊은 영화 [나쁜놈이 더 잘잔다] [2] taijae 2010.06.11 430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