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17 20:00
- 2006년에 나왔어요. 1시간 59분이라는 아슬아슬 런닝 타임이구요. 스포일러가 만발합니다.
(델토로 리즈 시절의 시작!)
- 또 스페인 내전... 입니다만 이번엔 그게 끝난 직후에요. 우리 소년들은 어딘가에서 잘 살고 있을지.
암튼 우리의 주인공은 오필리아. 새 아빠의 소환으로 스페인 정부군의 주둔지로 임신한 엄마와 함께 가서 살게 됩니다만. 딱 봐도 새 아빠는 그냥 아들로 대를 잇겠다는 목적 하나로 사랑 따위 필요 없는!! 재혼을 한 사이코패스 양아치라서 오필리아는 고사하고 엄마에게도 애정이 없네요. 사고라도 쳤다간 바로 목을 비틀어 버릴 태세인데요. 일단은 괜찮습니다. 오필리아는 가는 길에 우연히 만나게 된 요정(이라 적고 안 예쁜 거대 곤충이라 부릅시다)의 인도로 무슨 환타지 월드의 메인 퀘스트 같은 걸 부여 받았고 당분간은 그것만 하며 놀아도 재밌을 것 같거든요.
가뜩이나 저항군 토벌이라는 살벌한 일이 벌어지는 현장에서, 우리의 오필리아는 미쳐 버린 걸까요. 아님 정말로 환타지 월드의 공주님인 걸까요. 정답은 뻔해 보이지만 암튼 일단 지켜 봅시다.
(아니 왜 맨날 시작이 이런 식이냐구요;;;)
근데 만들어진 연도도 엄청 차이나고 배경부터 이탈리아로 확 달라지는, 게다가 원작까지 따로 있는 '피노키오'에 비해 나머지 두 영화는 많이 비슷합니다. 누군지 모를 남자의 나레이션을 깔면서 무슨 영문인지 죽어가는 듯한 어린이의 모습을 보여주며 시작하구요. 장면이 바뀌면 별로 안 믿음직해 보이는 보호자와 함께 해맑게 새로 정착할 곳을 향하는 어린이의 모습이 나오죠. 역사적 배경도 같구요. 심지어 둘 다 '카르멘'이 중요 인물로 나오고 곁에는 믿음직한 의사쌤까지!! ㅋㅋ
(빡센 상황에서 이상한 동화책만 잔뜩 읽다가 정신이 나간 것인지. 진짜로 지하 세계의 공주님인 것인지.)
- 하지만 결정적인 차이는 '악마의 등뼈'에는 전혀 안 나오던 여자애가 주인공이라는 거. 이 아이와 엄마의 관계가 중요하게 나온다는 거. 그리고 이번엔 아예 본격적으로 환타지 세계를 현실 세계와 거의 같은 비중으로 다룬다는 거. 뭐 그렇습니다. 심지어 색감도 다르죠. 전작은 뭔가 누렇고 불그스름한 톤으로 더운 느낌이 주를 이뤘다면 이번엔 대체로 푸른 계열로 차갑고 냉정한 톤이 중심을 이룹니다.
"비슷한 이야기를 다시 하고 있지만 재탕이란 소리는 절대 듣지 않을 것이야!!!" 라는 기예르모 델토로의 목소리가 들리는 기분인데요. 그게 의도대로 잘 먹혀요. 그냥 비슷한 배경을 활용했고 비슷한 주제를 전하고 있지만 이야기 자체는 전혀 다르니까요. 환타지가 듬뿍 들어가니 심지어 장르도 달라 보이구요. 또 남자애들이 우루루 나오는 거랑 여자애 하나가 나오는 거랑은 뭔가 그 자체로도 느낌이 다르죠. 훨씬 절박하고 훨씬 더 위험한 느낌입니다. 결정적으로 우리가 요즘 '델토로 취향'이라고 부르는 그 미술, 시각 디자인들이 꽃을 피우는 것도 바로 이 영화구요. 뭐 바로 전작인 '헬보이'에서도 맘껏 보여주긴 했지만 100% 본인 오리지널인 이 영화에서 더 확실하게 보여줬다고 생각하구요. '악마의 등뼈'엔 그런 게 상대적으로 별로 없어요.
(기괴하고 불쾌한데 보다보면 예쁜가? 라고 생각하게 되는 델토로 특유의 스타일이 꽃을 피웁니다.)
- 주인공부터 해서 전작에 비해 여성 캐릭터들의 비중과 역할이 엄청 커진 것도 달라진 부분 중 하나인데요. 이 양반이 나중에 아예 '셰이프 오브 워터' 같은 영화까지 만들어버리긴 하지만 '악마의 등뼈'에선 거의 남자 캐릭터들이 중요하고 극적인 역할들을 담당했다는 걸 생각하면 좀 재밌구요. 또 '판의 미로'에서 아주 믿음직스럽고 멋지게 나오는 메르세데스의 모습을 보며 '전작 카르멘과 콘치타에 대한 속죄냐 ㅋㅋㅋ' 라고 생각하며 즐겁게 봤습니다. 따지고 보면 이 '판의 미로'에선 정말 중요하고 멋진 역할은 거의 다 여자들이 하잖아요. 그나마 의사쌤이 계시긴 하지만 이 양반은 사실 결말은 간지 나도 시작이 좀 그렇죠.
(인생에 보탬이 안 되는, 오히려 오필리아에게 돌봐줘야 한다는 부담을 주는 엄마 캐릭터도 있지만)
(위풍당당, 내 인생은 내가 구한다!!! 라는 메르세데스처럼 멋진 캐릭터가 나오구요.)
- 그리고 뭣보다 델토로 스타일의 기괴한 미술. 이건 정말 이 영화로 끝장을 본 것 같아요. 최근작 '피노키오'가 전체 관람가 받느라 포기한 그로테스크한 디자인이 맘껏 튀어나와서 참 보기 싫은데 예쁜, 말 그대로 기괴한 매력을 한껏 뽐내줘서 좋았습니다. 특히나 그 전설의 레전드인 '눈 없는 놈'은 다시 봐도 걸작. 그리고 메르세데스 어택!!! 으로 입이 찢긴 군인 아저씨 얼굴 상태도 진짜. ㅋㅋㅋㅋ 아니 뭐 대충 넘어가도 될 걸 뭐 그리 열심히 보여주나 싶었죠. 역시 이 양반도 변태는 변태인 모양.
(봐도봐도 참 기발하고 참 걸작이다 싶은 이 분)
(굳이 이렇게까지 보여줄 필요가 있었나 싶었지만... ㅋㅋㅋㅋ)
- 그렇게 다 좋은데... 이제사 다시 보니 참 신경 쓰이는 게 결말이네요. 그러니까 이렇게도 볼 수 있고 저렇게도 볼 수 있는 열린 결말이라는 건 잘 알겠습니다.
처음부터 쭉 오필리아가 이미 망상에 빠져 있는 아이일 수도, 진짜 지하 세계 공주님일 수도 있도록 전개되도록 떡밥을 양쪽으로 잘 깔아 둔 이야기이기도 하구요. 심지어 결말 직전에 가면 현실이라면 아예 불가능할 상황 하나(마법 분필로 방탈출!)를 넣어둬서 오히려 환타지가 진실이라는 쪽에 살짝 무게를 얹어두는 이야기라는 것도 알겠는데요.
근데... 이야기 흐름상 이 영화 결말은 그냥 정신승리 엔딩 아닌가요?
전쟁의 참상 아주 찐하게 보여주고, 그런 전쟁으로 희생되어간 아이들의 대표로 오필리아 이야기 길게 들려준 후에 마지막의 환타지 전개는 그렇게 죽어간 아이들 위령제 같은 식으로 덧붙인 거... 라는 식으로 보는 게 가장 자연스런 해석이 되도록 만들어진 영화 같아서요.
암튼 오랜만에 다시 보니 '악마의 등뼈'나 '피노키오'랑은 쨉도 안 되는 암울한 영화였네요 이거. 마무리가 정말 너무 끔찍했습니다. 제게는요. ㅠㅜ
(근데 대체 저 무의미한 의자 위엔 어떻게 올라가는 겁니까. 왜 저렇게 올라가 앉아야 하는 겁니까. ㅋㅋㅋ)
- 대충 결론 내자면 이렇습니다.
델토로 영화들 중 아직도 이 영화가 최고작 소리를 듣는 건 충분히 납득할 수 있었습니다.
이야기와 메시지와 형식이 서로 딱 맞아 떨어지면서 거기에 그리고 감독 고유의 개성까지 만발해서 미래의 고전 소리 들을만한 작품으로 완성이 됐어요.
그렇긴 한데... 제겐 요 결말이 너무 버겁네요. ㅋㅋㅋ 해피엔딩이라고 정신승리를 하며 잊고 싶지만 제 판단으론 전혀 그렇게 보이지가 않아서요.
그래서 아마 이제 다시는 안 볼 것 같습니다. 차라리 '악마의 등뼈'라면 몇 번이라도 더 볼 수 있을 것 같은데, 이 영화는 무리에요.
어쩌면 그래서 더 잘 만든 영화일 수도 있겠지만요. 그 처참함을 보여주는 게 목적이지 않았겠습니까.
+ 직장이 요즘 독감으로 난립니다. 30명 중에 15명이 결석하고 6명이 조퇴하는 기록을 세운 학급도 있구요. ㅋㅋ
저도 어제부터 슬슬 기침이 나오더니만 간밤엔 열이 폭폭.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설레는 맘으로 병원에 가서 코를 후볐지만 안타깝게도 독감은 아니고 그냥 독한 감기인 걸로... orz 뭐 연말이라 할 일이 많아서 출근 하는 게 낫긴 한데, 그럴 거면 내일까진 좀 다 나았으면 좋겠네요.
이 글도 사실 전에 미리 거의 다 적어 놓은 글이라 간신히 올려요. 암튼... 다들 건강하시고, 독감이든 감기든 잘 피해가시길!!
2022.12.18 01:51
2022.12.18 18:59
네 뭐 떡밥 분석으로 따지고 들면 해피엔딩 이론도 충분히 가능한데, 그냥 이야기 구조를 놓고 보면 그냥 정신승리 엔딩(...)이라고 밖에 해석이 안 되더라구요. 암울하기도 하죠. ㅠㅜ
'크로노스'나 '악마의 등뼈'도 소재랑 스타일이 잘 어울리게 만들어진 영화들이었기 때문에 말씀대로 파워 제한(?)을 걸고 만든 영화는 아니었지만. 본격적으로 본인 취향 환타지를 영화 처음부터 끝까지 발라서 만들어낸 건 요게 시작 아니었나 싶어요. (다시 한 번, '헬보이'는 원작이 있으니 ㅋㅋ) 전 그 퍼시픽 림 조차도 재밌게 봤었죠. 델토로의 다른 방향으로의 덕심이 제대로 폭발한 영화였다고 생각합니다. 거대 로봇! 대괴수!! ㅋㅋㅋ
저도 배우님 검색 해봤었죠. 구글에 이미지 검색을 했더니 어른 된 모습만 한참 나오고 '판의 미로' 시절 짤은 한참 뒤에야 나오는 걸 보고 안심했습니다. 이후로도 잘 살고 있었구나... 하구요. ㅋㅋ
2022.12.18 11:27
2022.12.18 19:01
네 사실 되게 주제를 강렬하게 전달하는 방식이었다고 생각해요. 마치 '쉰들러의 리스트'의 그 빨간 꼬마처럼 아주 훌륭하긴 한데 정서적으로 부담이... ㅋㅋㅋㅋ 지붕킥 결말은 참 황당했는데. 웃기는 게 시간 좀 지나고 나서 생각해보면 납득이 가더라구요. 여전히 제 취향은 아니지만요. 하하.
2022.12.18 20:02
지붕킥 결말하니 카페베네가 자동으로 떠오르네요. 단 한 방으로 어마어마한 광고효과를 얻었었죠 ㅋㅋㅋ 그런데 커피맛에 대한 평가가 너무 최악이라 금새 잊혀져버렸나 그랬죠?
2022.12.18 21:08
그게 오히려 악명을 날리던 중이었죠. 체인점 확장을 너무 무리하게 해서 사방에 번식하는 바퀴베네... 이런 소리 듣는 와중에 커피 맛은 별로였구요. 근데 요즘 보면 예전 카페베네급으로 스타벅스가 동네방네 확장 중이더군요. 흠...;
2022.12.18 20:53
2022.12.18 21:24
아마 잔혹 동화란 표현 자체는 20세기 말부터 쓰였던 걸로 기억해요. 근데 이 영화가 거기에 너무 잘 어울려서 그냥 트레이드 마크가 되어 버린 느낌... 인데 정확하진 않구요. 맞아요. 이게 참 다시 보고 싶진 않은 영화네요. ㅠㅜ
저도 피노키오 시작 부분에선 좀 시큰둥... 했어요. 반갑습니다. ㅋㅋ 근데 다시 보니깐 시작 부분부터 다 좋더라구요. 결말도 참 찡하구요.
라비린스는 어려서 처음 볼 땐 걍 제니퍼 코넬리 예쁘구나! 하고 봤는데. 그 괴상한 아저씨가 그렇게 훌륭한 분이었다는 건 몇 년 후에야 알았죠. 하하. 당시엔 재밌게 봤는데 지금 다시 보면 또 어떨지 궁금하네요.
2022.12.19 18:07
저는 로이배티님의 감상이나 다른 분들의 감상과는 조금 다른 의견을 가지고 있어요. 오필리아가 현실에서 결국 죽었으니 환상은 결국 정신승리 용도라는 것인데, 저는 이 영화가 오히려 환상과 현실의 우선순위 다툼이 아니라 환상이 현실의 오필리아를 구원해주는 이야기라고 생각했습니다. 현실밖에 없는 세계에서 환상을 찾아내면서 그 환상이 현실과 겹쳐지며 현실의 슬픔만큼 환상의 영광과 기쁨이 공존하게 되는 그런 영화라고 봤어요. [더 폴: 오디어스와 환상의 문]과는 조금 다르게 읽을 수 있는 작품이 아닐까 싶어요.
저도 결말은 아무리 마법 분필 그런 장치들을 깔아놓았어도 결국 가장 최악의 암울한 버전 밖에는 받아들여지지가 않더군요 ㅠㅠ 감독님 필모에서 가장 애정하는 작품이면서도 마음 아파서 재감상을 원하는 만큼(?) 하지 못하는 작품이기도 해요. 정말 판타지가 제대로 현실과 결합해서 행복한 엔딩을 확신하게 되는 건 셰이프 오브 워터까지 너무 오래 기다려야했네요.
전작들에서도 딱히 하고 싶은 걸 제한 받아서 못한다거나 그런 느낌은 못받았지만 제가 감상에도 여기에서부터 정말 본인이 정말 하고 싶은 얘기와 보여주고 싶은 스타일의 결합이 완성되기 시작한 느낌입니다. 판타지 장르물도 나름 이것저것 많이 봐왔다고 생각했지만 상상력을 이렇게까지 펼치면서 저정도 수위로까지 보여줄 수 있구나하고 신세계를 경험한 것 같기도 했었고요. 소위 아트스러운 영화를 만든다는 감독들 중에서 이렇게 잘 만들면서도 덕후티를 팍팍 내면서 조화롭게 녹아든다는 면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퍼시픽 림' 같은 건 저에겐 전혀 안맞았지만 이런 것도 하실 수 있구나! 싶었었죠. 원래 계획대로 호빗 실사영화를 연출하지 못한 것이 참 아쉽습니다.
https://www.instagram.com/ivanabaquero/?hl=ko
주인공을 맡았던 이바나 바케로를 검색해봤더니 나오는 인스타 계정인데 얼굴의 그 느낌은 그대로 남아있는데 많이 성숙한 모습이네요. 벌써 서른을 바라보는 나이라니 세월이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