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광부화가들]을 보고 왔습니다

2022.12.28 13:50

Sonny 조회 수:3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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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제목때문에 크게 내키지는 않았던 작품입니다. "광부"라는 단어 자체가 어딘지 어두침침한 느낌을 주니까요. 어떤 문화적 충격을 주기보다는 계급투쟁으로만 이야기가 번질 것 같은 느낌도 주고요. 그런데 문소리씨가 출연 배우 중 한명이더라구요? [공공의 적]에서 강철중을 감싸주는 못된(?) 상사로 나오시던 강신일씨도 나오구요. 일단 배우를 믿고 보기로 했습니다. 그리고 그 선택은... 아주 훌륭한 선택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시작부터 왁자지껄하게 '광부'란 단어가 주는 음울함을 다 날려버립니다. 광부 노조 교육사무실에서 광부들은 이런 저런 문화수업을 들어오다가 이번에는 그림에 대해 배워보기로 하고 화가 '강사' 선생님을 모시게 됩니다. 라파엘로나 미켈란젤로 등 르네상스의 그림으로 수업을 시작한 라이언 강사는 그림과 거의 접할 길이 없던 광부들이 수업에 난색을 표하자 파격적인 제안을 합니다. 광부들로 하여금 직접 그림을 그려보게 하자는 것이었죠. 이렇게만 써놓으면 불쌍한 무지랭이들에게 예술의 맛을 알려주자는 시혜적 시선으로 읽힐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 과정은 굉장히 소란스럽고 웃깁니다. 과장 조금 보태서 무한도전의 크루들이 화가에 도전하는 에피소드 같아요. 그림의 의미가 뭐냐, 예술이 뭐냐, 의미가 없다는 게 뭐냐, 그림을 읽는 사람이 의미를 찾는다는 게 뭐냐, 여러명의 광부들이 저마다의 캐릭터를 가지고 질문 폭격을 해대는데 그 장면은 마치 박명수와 정준하가 게스트에게 막 따지는 광경과 비슷했습니다. 제 머릿속에 막 해골자막이 뜨더군요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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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재룡씨의 조지와 김중기씨의 해리가 아주 인상적이었습니다. 조지는 박명수처럼 계속 안된다면서 화를 내고, 해리는 계속 맑시즘을 들먹이면서 아는 척을 하는 도중에도 하하처럼 깐족이는데 티키타카가 따발총 수준으로 쏟아지더군요. 한번 보니까 다른 캐스트들은 어떻게 연기할지 또 궁금하더라구요. 이 극의 제일 주인공에 가까운 올리버 캐릭터를 강신일씨가 연기하는 걸 봤는데 박원상씨의 올리버는 어떨지 궁금해집니다. 


걱정하는 것만큼 지루하거나 무겁지 않다는 걸 확인하자마자 이 작품은 제게 또 다른 눈요기를 제공하더군요. 광부들이 멋적어하면서도 처음으로 그린 그림을 공개할 시간이 딱 됩니다. 그러자 무대 뒤쪽에 그림이 스크린으로 뜨더군요. 연출도 좀 재미있거니와, 그림 자체도 좀 느낌이 있었습니다. 이게 미술 수업을 한번도 안 받아본 사람이 진짜로 그린 그림인가...? 싶을 정도로 굉장히 아티스틱한 느낌? 객석에서도 첫 그림이 뜨니까 오오... 하면서 다들 감탄하시더라구요. 이런 걸 말해도 될 지는 모르겠습니다. 저는 진짜 하나도 정보가 없이 갔기 때문에 눈알 띠용으로 놀랐거든요 ㅋ 맨 처음에 올리버의 그림이 뜨고, 그 다음에는 해리의 그림이 뜹니다. 보는데 이야... 다들 제법인데?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ㅋㅋ이 연극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연극이라는 게 또 한번 놀랄 점입니다 ㅋ (그림은 연극 가서 실제로 보시라고 첨부를 안하겠습니다ㅋ)


그리고 이어지는 그림에 대한 해석도 캐릭터들마다 치열하게 펼쳐집니다. 원근법이 없네, 머리가 너무 작네, 무엇을 표현했는데 그게 사실은 그냥 그리다보니 공간이 없던 거였네... 이 대화가 또 흥미로운게 각자 보고 싶은 대로 그림을 봅니다. 이를테면 해리는 허구헌날 자기가 떠드는 맑시즘에 따라서 노동자의 계급이 어쩌구를 늘 그림 해석에 접목시키면서 그림을 평가합니다. 올리버는 최대한 그림을 있는 그대로 보는 캐릭터고, 조지는 정치적인 걸 그림에 섞지 않으려고 애를 씁니다. 이 중에서도 특히 재미있는 건 지미입니다. 지미만이 유일하게 추상화를 그립니다. 전통적인 회화기법을 다 파괴했는데, 문외한의 눈에도 상당히 흥미로운 그림들을 그리죠. 그림의 충격은 지미가 그린 그림들이 제일 강했던 느낌이었습니다. 보자마자 오오~? 하는 반응을 일으켰으니까요.


광부들은 하나둘씩 그림을 그리고 또 서로 해석을 치열하게 하면서 그림에 점점 재미를 붙여갑니다. 그러다가 미스 서덜랜드가 등장하면서 광부들 사이에 좀 미묘한 공기가 흐릅니다. 왜냐하면 자기들끼리 서로 그리고 감상하던 그림을, 이제 본격적으로 그림을 다루는 외부인이 평가를 하기 시작했으니까요. 서덜랜드는 지미의 그림을 돈을 주고 삽니다. 자기들의 그림이 여태 돈 주고 팔만한 작품이라고 생각했던 적이 없던 광부들은 패닉을 일으키죠. 이걸 팔아야 되나? 팔아도 되나? 이 그림은 진짜 나의 것인가? 혹은 우리 광부 노조 모두의 것인가? 그리고 그 값이 자신들의 하루 일당에 맞먹는다는 것에 또 한번 충격을 받습니다. 자신들의 그림이 노동에 필적하는 생산수단이라는 걸 알면서 노동에 대한 생각도 재고하게 되죠. 이후, 올리버는 갈림길에 들어서면서 엄청난 고뇌에 빠집니다.


더 쓰면 전부 다 이야기해버리는 셈이라 이만 줄이겠습니다. 분명한 건, 이 연극이 그림을 통해서 예술이란 무엇인지 질문을 던지는 동시에 노동자란 무엇이며 노동자의 정체성이란 무엇인가에 대해서도 꽤나 유쾌하고 즐겁게 물어본다는 것입니다. 던지는 질문들은 묵직하지만 그걸 풀어내가는 과정이 우당탕탕 요란법석입니다. 저는 보면서 한번도 딴생각을 품질 못했어요. 작품이 조금이라도 쉬어간다 싶으면 바로바로 대화가 쏟아지면서 그 인물이나 질문에 대해 몰입하지 않을 수 없었으니까요. 이 연극에 관심이 있으신 분들이라면 꼭 챙겨서 보시길 바랍니다. 무엇보다도 재미가 있습니다! (할인도 엄청하더라구요! 다들 꼭 혜택 챙겨가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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