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정무 감독이 욕을 먹는 이유

2010.06.28 12:21

봐길베르 조회 수:4249

한마디로 정리하자면 욕하는 사람들이 개념이 없거나 욕심이 과하거나 둘 다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나라가 이번에 거둔 성적은 조별라운드 1승1무1패로 16강 진출, 그리고 토너먼트 1패로 8강 좌절입니다. 이 정도면 지금 우리나라의 축구에 대한 투자(단순한 인프라 뿐만 아니라 역사와 문화 등등 사회적인 에너지의 투자 전반을 말합니다)를 고려해 봤을 때 과하면 과했지 모자라지 않는 수준이죠. 저는 이 성적에 '만족' 정도가 아니라 기뻐 미치겠더군요.


선수빨이라는 얘긴 대꾸할 가치도 없습니다. 그럼 퍼거슨도 선수빨이고 무링요도 선수빨이고 펩도 선수빨이겠죠. 먼 데서 찾을 것도 없습니다. 세리에 최고의 선수들 데리고 있는 월드컵 우승의 명장도 조 최하위로 짐 싸고, 세계 축구계를 주도하는 EPL의 나라에서 초빙한 당대의 우승청부사도 16강에서 짤 없이 떨어지는 게 월드컵이란 무대입니다. 


왜? 차범근 해설위원이 잘 지적했죠. '애들 정신이 글러먹었다'. 물론 '운이 없다'고 변명할 수도 있습니다. 하지만 그 멤버 가지고 뉴질랜드에게 선제골 허용하고 헤롱대다가 겨우 PK로 무승부 만들고, 알제리 정도의 팀 상대로 한골도 못 뽑았다면 정신이 글렀다고 밖에 할 수 없는 겁니다. 


축구에서 감독이 하는 제일 중요한 역할이 이 정신 다잡는 겁니다. 이게 시작이고 끝이라고 봐도 과언이 아니거든요. 퍼거슨이 어디 전술 잘 짜서 명장 소리 듣고 있나요? 하프타임에 애들 정신 다잡고, 경기 끝나고 팀 최고스타가 대들면 신발짝으로 두들겨 패서라도 정신 차리게 하는 게 이 영감님의 진짜 실력이죠. A매치 100승(정말 이런 기록이 또 가능할지 의심스러운 기록입니다)에 빛나는 브라질의 전설적인 명장 자갈로도 전술쪽은 별로라는 게 중평입니다. 이 분 장기는 그저 재능 넘치는 만큼 개성도 넘치고 제멋대로인 브라질 스타들 잘 다독여서 한 팀으로 만드는 게 전부라고들 하죠. 물론 그 나라가 '브라질'이라면 이것만으로도 기본 8강입니다.


거기다 '선수빨' 운운할 만큼 우리나라 스쿼드가 경쟁국들에 비해 좋은 것도 아니고요. 야쿠부, 마틴스, 우체, 게카스, 카라구니스 이 정도만 해도 경력으로 봤을 때 우리나라에서 그나마 견줄 수 있는 선수는 박지성 하나 뿐입니다.


우리 선수들 얼마나 열심히 뛰었습니까? 다들 힘들 거라고 봤던 16강을 위해 죽도록 뛰었고, 거의 기대를 접었던 우루과이를 상대로 우세한 경기를 펼쳤어요. 이 사실 하나만 봐도 허정무 감독이 욕 먹을 이유의 반은 사라지는 겁니다.


인맥이니 하는 소리는 한마디로 근거없는 낭설입니다.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말이 안 돼요. 여러분이 허정무 감독이라고 생각해 보세요. 자신의 경력과 명예가 걸린 승부에 잘 하는 선수가 아니라 실력이 좀 떨어져도 자신과 인연이 있는 선수를 내보낼 분 계십니까? 허정무 감독도 똑같은 처지거든요. 감독 외에 축협의 인맥까지 챙긴다는 얘긴 더 한심하죠. 축협과 사이가 안 좋기로 유명했던 차범근도 최소한 선수선발만큼은 축협의 영향력과는 무관하게 자신의 뜻에 따라 했다고 회상하기도 했습니다.


선수선발에 있어 불만이라. 그거야 세계 어딜 가도 있습니다. 하지만 이번에 뽑힌 선수들 중에 납득이 안 가는 선수는 없어요. 주축선수가 아니라 백업의 경우에 좀 아쉬운 선수가 없는 건 아니지만 그걸 가지고 감독을 욕한다면 천하의 히딩크도 욕 먹을 부분이 없진 않습니다.


전술적 변화, 그러니까 선수교체 등을 통한 임기응변에 약하다는 비판도 결과만 보고 꼬투리 잡는 거죠. 이번 대회에서 허정무 감독이 시도한 교체 가운데 납득할 수 없는 수준의 교체는 없었습니다. 제일 많이 비판받는 게 아르헨티나 전의 이동국 기용타이밍과 나이지리아 전의 김남일 투입이죠. 


근데 아르헨티나 전의 경우 우리가 뒤진 상태에서 후반전 시작부터 이동국은 투입을 위해 몸을 풀고 있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반격을 주도하던 흐름에서 순식간에 두 골 먹어버리고 추격의 타이밍을 놓쳐 버려서 이동국의 투입이 우스워져 버린 거죠. 어제 독일-잉글랜드 경기에서도 비슷한 장면 나왔잖습니까. 추격을 위해 대기하고 들어갈 타이밍 기다리던 헤스키, 삽시간에 카운터로 두 골 먹더니 참 어이없는 상황에 들어가게 돼 버렸죠.


나이지리아전에서도 김남일의 투입은 그 자체로는 상식적인 거였습니다. 우리가 앞선 상황이고 그 점수를 유지한다면 16강에 진출할 수 있는 상황이라면 당연히 수비쪽을 강화합니다. 축구팬들 사이에서도 높이 평가받는 김학범 감독의 경기평을 봐도 최선의 선택이었다고 말하고 있을 정도고요.


전남시절의 성적 가지고 비판하는 건 더더욱 말이 안 되는 겁니다. 모기업 포스코가 투자를 줄이는 상황에다 팀 자체적으로도 외국인선수 영입 비리 등으로 프런트와 전임 감독이 갈린 어수선한 처지에다 과거 주축선수들의 노쇠화와 이적으로 리빌딩 해야 되는 게 당시 전남의 입장이었습니다. 그런 상황하에서 중위권 유지했으면 욕 먹을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그 와중에도 FA컵을 차지하면서 녹녹잖은 저력을 과시하기도 했고 말입니다.


저 자신도 허정무 감독에게 불만이 없지는 않습니다. 예선 통과 이후 팀의 재구성이라든가 선수선발 부분에서 짚고 싶은 부분이 있어요. 하지만 그건 그거고 이뤄낸 성과는 성과대로 인정해 줘야 하는 게 합당하다고 생각합니다. 특히 말도 안 되는 이유로(대부분의 이유가 이렇더군요) 욕을 먹고, 인격적 모욕까지 받을 이유는 없는 인물이라고 봅니다. 사상 최초의 원정 16강 달성 하나만으로도 한국축구사의 한 획을 그었다는 평을 받아 마땅하다는 게 제 생각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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