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2.31 18:36
[노변의 피크닉]을 읽었습니다. 아르카디 스트루가츠키, 보리스 스트루가츠키 형제가 함께 쓴 작품들 중 대표작에 해당한다고 합니다.
우연히 알게 되어 이분들 작품을 처음 접해 봤네요. 두 사람은 어떤 식으로 작업했을까요. 마르틴 베크 시리즈를 공동으로 쓴 셰발과 발뢰는 장을 번갈아 가며 썼다고 했는데, 그런데도 이야기에서 튀는 부분을 못 느끼겠고 자연스럽게 흐른다는 것이 신통했습니다.
SF 소설 문외한이지만 어렵지 않고 재미있다니 어디 한번...라는 마음으로 읽었는데 예상과 달리 상당히 진지하였습니다.
진지하다는 것은 글이 사실주의적이라는 뜻입니다. 얼렁뚱땅 활극 종류는 아니었습니다. 중간에 물리학자의 어려운 설명도 잠시 나오지만 그런 부분은 길지 않고 문제가 되진 않아요. 외계의 방문이 끼친 영향으로 인해 존재에 대한 진지한 질문들을 더는 뒤로 미룰 수 없게 되는 상황이 되니까 생기는 긴장 같은 것이 있었고, 발생한 일을 이해하지 못하면서도 현실을 살아야 하는 인간들의 조건을 바탕으로 해서 현실적인 문제를 이야기하고 있거든요.
외계에서 어떤 존재들이 왔다가 이상한 흔적들을 잔뜩 남기고 갔다, 인간이여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우리와 차원이 다른 문명을 소유한 우주의 어떤 존재들이 무심하게(하지만 인간에겐 엄청 위험한 흔적을 남겨놓고) 다녀간 뒤 인류는 그 흔적들을 가지고 뭘 해 볼 수 있으며 향후 어떤 대책이 가능할 것인가.
대부분의 인류는 그러거나 말거나 외계의 방문이 파생시킨 돈이 되는 일, 하루치 안락을 위한 돈벌이가 될 일 주변에 몰리고 주인공 레드릭 역시 그런 인물 중 한 명이었고 방문과 깊이 엮인 모든 인물들과 마찬가지로 안 좋은 일을 겪습니다.
외계가 방문한 구역에는 여러 희한한 물건들이 남아 있고 여러 희한한 방법으로 인간 목숨을 위협하는 물질로 가득한데 이 묘사가 아주 생생하고 맵습니다. 외계와의 점잖은 접촉인 드니 빌뢰브 감독의 '컨텍트'는 이 소설에 비하면 낭만적인 느낌마저 들었고, 제가 본 영화 중에서 찾자면 아름답게 순화되어 표현되었긴 하지만 '서던리치:소멸의 땅'이 제한 구역이란 점에서 떠오르더군요.
결국 범죄자가 주인공이라 사실주의적인 범죄 소설의 성격이 느껴지고요, 외계 방문이 실제로 일어났을 때 정부와 과학계가 어떻게 대응하는지, 얼마나 수공업적이며 무력한지를 예상한 바 그대로 보여 줍니다. 1972년 소련에서 이 소설을 출판하는데 어려움이 많았던가 본데 이런 이유도 있었겠죠. 전능한 정부를 존재감 없이 그렸다거나.
흥미롭게 읽었고요, 인간 종으로서 절망감도 품고 있는 소설이었는데 이래저래 작품의 무게감에 걸맞는 소감을 적기엔 지식이 부족해 이만 줄여야겠어요. 2023년 마지막 소설이었네요.
한병철 저작 중 세 번째입니다.
[시간의 향기]입니다. 저녁에 시작해서 두 해에 걸쳐 읽어 보렵니다.ㅎ
저자가 몇 해 전 한국 방문을 해서 독자와 만남 장소에서 불미스런 일이 있었다는 걸 읽었어요. 책의 저자도 그렇고 영화 감독도 그렇고 작품은 작가를 앞선다는 생각을 합니다. 인간은 불안정하고 부실한 정신과 육체의 소유자라 남모르는 약(악)함을 지니고 있다가 불시에 관리자를 벗어나기도 하네요. 관리자와 관리되는 자가 동일인이라도 똑같다고 할 수 없기도 하니까요. 인간의 최선의 형태로 작품이 나오니, 작품은 언제나 창작자 보다 나은 무엇이라고 생각하며, 이 저자 개인에 대해 더 자세히 알 필요는 없을 것 같습니다.
듀게 분들 모두 건강하십시오.
날선 말이나 무딘 말로 알게 모르게 기분 상하게 한 일은 다 뒤로 날려 주시길 바랍니다. 슝슝슝!!!
2023.12.31 22:48
2024.01.01 11:19
노래 다 들었습니다. 새해 첫 노래네요.ㅎ
듣기 전에 댓글만 볼 땐 웃음이 났는데 듣고 나니 마음이 찡합니다. 저 때가 92년이네요. 당시에 강수지 노래를 제대로 듣지 않았던 거 같아요. 지금 들으니 목소리가 가늘면서도 노래를 아주 잘 하네요. 덕분에 즐겁고 뭔가 평온합니다. 감사드려요.
'노변의 피크닉'은 로이배티 님 한 번 읽어 보셔도 좋을 거 같아요. 언제 기회가 되시면요.
토마스까지 챙겨 주셔서 대신 감사 전하고요, 모쪼록 건강 기원합니다. 우리의 살 길은 뼈 건강!!
2023.12.31 23:57
노변의 피크닉이라는 제목이 역설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내용 소개네요. 듀나 님도 러시아 SF 영화 본 이야기를 가끔 하시는데 잘 쓰여졌다면 좀 궁금하네요. 한병철 이야기는 처음 들어서 찾아보니 무슨 일이 있기는 있었나봅니다. 저는 원체 사람에 대해서는 별 관심 없어서 처음 들었고, 대충 이런 내용들을 봤네요. '아무 생각 없이 사진을 막 찍어댔던 사람, 강연자가 뭔가 행위를 하고 있음에도 불쑥 일어나 항의하듯 질문을 쏟아내 흐름을 방해했던 사람들도 저는 무례했다고 생각한다', '강의를 마치고 파악한 결과 오히려 독자들이 무례해서 정당하게 화를 낸 것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책을 보면 타인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는 것을 상당히 강조하고 있는데 독자들이라면 말을 가로지르는 것이 무례한 행위라는 사실을 알고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던 것 같다(김현주 문학과 지성사 편집장)' 그 자리에 없었기에 발단과 결말이 어떻게 진행되었는지 모르겠지만 무슨 '사건'이 있지 않았나 싶습니다. 분명 '기행'이란걸 한 것은 확실한 것 같지만요 ㅋㅋ. 그리고 그 전에 (아마 2015년?) 강연한 내용들을 보니 뭔가 멀쩡했던 것 같습니다. 한국이 난민들을 그렇게 관심없다는게 너무 놀랍다 이런 이야기를 했었더군요.
저는 지지난주에 [리추얼의 종말]을 샀습니다. 한병철이 말하는 '땅의 질서'라는 것, 반복되고 그 자리에 있음으로 안심을 주는 것, 이란 그 개념에 끌려서 리추얼에도 끌렸어요. 제가 안 읽은 책들만 계속 쏙쏙 읽고 계서서 뭔가 너무 웃깁니다 ㅋㅋ. 어떤 책에서 읽었는지 기억은 안 났는데, 한병철이 자기 집에 올라가서 기거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텅텅 빈 큰 방 하나에 피아노 하나, 의자 하나, 그리고 골동품 주크박스와 침대 하나 밖에 없다던가, 이미 기인이 아닌가 싶던 내용이었습니다.
2024.01.01 11:39
외계 방문자들이 무심하게 놀다 간 것이라고 그런 다음 자기들 소지품과 쓰레기 처리는 안 하고 간 것이라고 본문 중에 추측하는 내용이 나와요.ㅎ
창작자에 실망했을 때 창작물을 어떻게 대할 것인지가 단순한 문제는 아니고 개인마다 기준도 다를 거 같아요. 위에서 저는 그 둘을 분리하는 것처럼 썼으나 창작자와 작품의 일반론일 뿐이고, 우호적으로 봐 줄 여지가 있을 때나 그렇지 저도 분리 못 하고 마음에서 폐기하는 경우도 많아요. 그런데 한병철의 경우는 심각한 건 아니고 상호간의 예의 문제 아니었나 싶더라고요. 그 자리에 없어서 모르지만 한병철의 강한 개성과 한국 독자의 약간의 갑질이 부딪힌 것인가 싶기도 했어요. 어떤 사람은 그때 낸 책과 연관지어 일종의 퍼포먼스로 보기도 하던데, 그런 건 아닌 거 같았고요. 뭐 여튼 큰 문제는 아니지 않나 생각했어요.
한병철의 글을 읽다 보니 동양철학적인 느낌이 살짝 나더군요. 어딘가 소개 글에서도 그런 내용을 읽은 것 같고요. 독일에서의 각광이 이런 요소도 있지 않았을까 섣부른 추측도 하고 있는 중입니다. '리추얼의 종말'을 살까 이 책을 살까 그러다가 이 책을 샀어요.ㅎㅎ.
2024.01.01 11:50
책을 읽는 분들이 존경스러워요..
책 읽기를 포기한 체로 살아가고 있어요.
나이들고 늙어가면서 모니터로 동영상만 보며 지낼 것 같은데, 시력은 점점 나빠지고,,,
2024.01.01 15:04
원래 피곤하면 눈이 아프다가 두통이 오는 체질이고 시력도 안 좋아서 나이들면서 눈에 대한 공포가 있어요. 그래서 덜 한 나이에 조금이라도 읽자는 생각입니다...
2024.01.01 22:04
오 미스테리 서클 생각도 나고 흥미롭네요...
두 번째 책 제목을 보는 순간 반사적으로...
죄송합니다! ㅋㅋㅋ
'노변의 피크닉'은 한때 나름 SF 열심히 읽었던 입장에서 '이걸 아직도 안 읽었다니!'라는 민망함을 느끼게 하는 책입니다만. 매번 떠오를 때마다 살짝 민망해하고 곧 잊어버리다가 이젠 제법 뻔뻔해졌습니다. 뭐 언젠간 읽으면 되지!! ㅋㅋㅋ 그 날이 빨리 오긴 해야 할 텐데 말입니다.
암튼 올해의 마지막 글 감사합니다!
thoma님도 견공님도 모두모두 건강하고 행복한 새해 맞으시길 기원합니다. 진심으로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