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8.22 16:09
이 전에 제가 오래된 친구와의 관계에 권태를 느꼈다고 쓴 적이 있는데, 그 친구를 다른 친구 포함해서 만났습니다. 또 다른 친구는 거의 10년만에 만나는지라 동창회하는 기분으로 반갑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더군요. 그런데 조금 묘한 긴장감을 느꼈습니다. 오래된 친구를 A라고 하고, 10년만에 만난 친구를 B라고 하면 B와의 대화는 전혀 어색하지 않았는데 A와의 대화는 조금 껄끄럽고 제가 마음에 힘을 줘서 리액션을 해야하더군요. 그 때부터 제가 A에 대한 우정 비스무레한 감정이 꽤나 많이 식었다는 걸 느꼈습니다. 같이 있는 것 자체가 불편하고 안맞는다는 걸 계속 실감하게 된달까요.
사람 마음이 참 신기한게, A도 저에 대한 불만같은 게 쌓였었나봅니다. 밥을 먹고 까페로 이동해서는 저를 향해서 이런 저런 이야기들을 털어놓더군요. 평상시에 저한테 그런 말을 거의 안하는 친구인데 꽤나 직설적으로 말해서 놀랐습니다. 자기계발서 읽은 거 가지고 뭐라고 해서 무슨 책을 읽었다는 이야기를 못하겠다, 진짜 안맞는다, 이런 말을 했는데 제가 말한 맥락들이 조금 편집되어서 저도 항의를 했습니다. 취미가 뭐냐고 물어봤을 때 독서가 취미다, 라고 한 다음에 자기계발서를 읽는다고 하면 거기에 순순히 납득할 사람이 몇이나 되겠냐... 저는 이 친구가 여가시간에 뭘 하면서 노는지 전혀 모릅니다. 아는 시간이 꽤 오래되었는데도요. 그래서 취미가 뭐냐고 물어봤던 것이고 독서를 말한 다음 자기계발서를 말하길래 조금 타박하긴 했습니다. 자기계발서 말고 다른 책을 차라리 읽으라고요. 원론적으로 말하면 타인의 취향에 뭐하러 꼰대질을 하냐고 하실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그것조차도 제가 이 친구에게 가진 답답함이 쌓였다가 좀 터져나온 것이기도 합니다.
자신과 다른 부분, 자기와 안맞는 부분은 그냥 패스하고 같이 좋은 시간을 보내면 될 것 같습니다만 인간관계가 그렇게 깔끔하게 떨어지지 않지요. 저 자신의 기준이라거나 세간의 일반적인 기준 같은 것이 있고 그 친구와 함께 지낸 시간이 오래되었다고 해서 제가 그 무엇도 평가하지 않은 채 '다름'으로 흘려보내는 건 불가능한 일입니다. 저는 문화적 감흥을 제 취미생활에서 크게 할애하고 있고 그 부분을 교류할 수 있는지를 인간관계의 제일 큰 재미로 생각하는 쪽입니다. 그런데 이 친구는, 그 부분에서 저에게 어떤 것도 주지 않습니다. 극장에는 당연히 안가고 읽은 책을 물어보면 자기계발서를 이야기하고 심지어 애니메이션이나 만화 같은 것도 요즘 유행한다거나 제가 재미있어하는 걸 안봅니다. 그러니 이야기할 것이 없습니다. 운동도 안하고 다른 뭘 하는 것도 없습니다.
아마 다정한 분들은 제가 좋아하는 걸 그 친구와 같이 즐겨보라고 하시겠지만... 이미 다 해봤습니다. 이 친구가 굳이 극장에 안다니는 걸 알기에 저는 이 친구가 그래도 좋아할만한, 안지루해할만한 영화를 골라서 같이 보러가고 그랬죠. 가장 최근에 본 영화는 [슬램덩크]였습니다. 팔구십년대에 학창시절을 보낸 사람이라면 어느 정도는 흥미를 느낄만한 영화라고 생각했으니까요. 보고나서 그 친구는 딱 한마디 했습니다. 재미있네. 이 일화를 듣던 다른 친구도 놀라더라구요. 그거 엄청 재미있던데? 그러니까 제가 느끼는 감흥을 같이 느끼면 좋겠다고 해서 제가 맛집도 찾고, 영화도 찾고, 어딜 가보자고도 하고.... 그러나 모든 반응이 다 무감흥으로 끝납니다. 물론 재미있다거나 맛있다고는 하죠. 그런데 한두마디로 끝나니 저도 이런 일방적인 노력을 하는 게 허무해집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오래된 연인 사이의 다툼같기도 하네요 ㅎ
그렇다면 그 동안 뭘 했느냐. 돌이켜보니 만나면 이 친구는 늘 자신의 괴로운 이야기만 했던 것 같습니다. 이 친구는 남들보다 조금 운이 없긴 합니다. 들어간 기업이 하필 블랙기업인 경우도 있었고, 사회생활도 아주 유도리 있게 하는 편이 아니라 손해를 더 보기도 하죠. 가족들의 사정도 썩 좋지가 않구요. 그러니 만나면 이 친구의 고된 일상 이야기가 주를 이룹니다. 상사가 날 갈궜다, 회사가 이러는 게 말이 되느냐, 동료가 나에게 싸가지없는 것 같다, 가족 중 누가 속을 썩인다.... 이러니 제가 할 이야기도 정해져있습니다. 그 친구를 걱정하거나 위로하거나. 그 친구의 쥐구멍에 확신없이 볕들날을 멋대로 끌어와서 던져줍니다. 이런 대화가 반복된 게 거의 오륙년은 된 것 같은데, 그 동안 제가 이 친구에게 받은 게 뭔지를 생각해보게 됩니다. 감사를 받고, 저는 고마운 사람이 되죠. 그런데 둘의 시간이 즐겁거나 기뻤느냐, 하면 그건 아닌 것 같습니다. 다음의 만남이 기대가 되지 않는 그런 관계였던 거죠.
이 친구에게 제가 느끼는 감정은 오래된 고시생 연인을 보는 직장인의 그것입니다. 왜 그런 글이 생각납니다. 자기도 이제 주말에는 조금 더 비싸고 좋은 레스토랑에 가서 분위기 내면서 맛있는 걸 먹고 싶은데, 애인 형편에 맞춰서 계속 '콩불'만 가는 건 더 이상 못해먹겠다고. 이렇게 쓰면 그 친구는 가난하고 저는 어느 정도 형편이 나은 것 같지만 딱히 그렇지도 않습니다. 다만 그 친구를 만나면 어떤 특별한 순간도 기대할 수 없습니다. 너랑 만날 때마다 늘 맛집도 내가 찾고, 뭘 먹을지 물어보면 너는 아무거나라고 대답하는데 그건 어떻게 생각하느냐고 제가 좀 질타를 했더니 그건 미안하답니다.
그런데 그가 그 뒤에 한 이야기가 충격이었습니다. 자긴 원래 남자들 만날 때는 아무데나 간다고, 그냥 김밥천국 간다고요. (그렇다고 이성을 만나기는 하냐면 그런 것도 아닙니다. 이 친구는 인간관계가 정말 협소해요) 30살이 넘었는데 두세달에 한번씩 보는 친구랑 김밥천국을 간다는 게 좀 이해가 가질 않았습니다. 고오급 레스토랑에 가자는 게 아니라, 누굴 만나든 정말 바쁠 때 한끼 때우는 그런 식당보다는 조금 더 구색을 갖춘 곳을 가려고 하는 게 일반적이지 않나요. 저는 이 친구에게 악의없이 홀대를 받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제가 끌어올리지 않으면 그는 자신의 부박한 삶으로 저를 끌고 들어갑니다. 제가 혼자 밥먹을 때 신물나게 경험하는 그 '별볼일없음'의 세계를 망설임없이 공유하려는 그에게서 좀 답답한 느낌이 들었죠. 아무리 편한 사이이고 오래된 친구여도 저는 이왕에 만나는 거 그래도 조금 더 나은 식당에 같이 가고 싶습니다. 아무데나 가는 게 아니라요.
그러니까 이 친구랑 만나면 안좋은 이야기를 하고 위로까지 나눌 수는 있는데 평소보다 더 즐겁거나 기쁜 순간을 추구하지는 못합니다. 저희 둘이 만나서 뭔가 재미있는 경험을 하지도 못하고, 각자 인생에서 작게나마 재미나고 특별했던 순간을 나누지도 못합니다. 저는 그 친구의 "그냥"으로 끌려들어갑니다. 제가 신경을 안쓰면 그냥 아무데나 가서, 아무거나 먹고 끝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이 친구와의 만남이 감정적으로 '가난하다'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어떤 즐거움도 갱신되지 않고 오로지 고된 삶에 대한 토로만이 이어집니다. 딱히 미워하거나 싫어하지 않지만, 더 이상 보고싶지 않다는 이런 감각이 처음이라서 참 당혹스럽습니다. 지겹다는 느낌이 너무 강해서 그 어떤 호기심이나 기대감도 생기지가 않아요.
아마 이 친구와는 이렇게 관계가 정립될지도 모르겠습니다. 일년에 한두번 안부는 묻고 식사를 할 지는 몰라도, 적극적으로 같이 시간을 보낼 것 같지는 않습니다. 한편으로는 참 무섭습니다. 딱히 악행을 저지르지 않아도 그저 그런 시간이 쌓이는 것만으로도 관계가 실패해버리니까요. 타인에게 어느 정도는 자극과 감흥을 주지 않으면 관계는 순식간에 생명력을 잃어버립니다. 그래서 무섭습니다. 저는 제 주변사람들 누구에게라도 이런 감각을 주고 싶지도 받고 싶지도 않습니다. 이 질리는 느낌, 지독한 실망감이 이번 한번이 마지막이었으면 좋겠습니다.
2023.08.22 17:46
2023.08.22 18:12
2023.08.22 18:59
글을 읽으며 그 친구와 저를 동일시 하게도 되고 Sonny 님과 저를 동일시 하게도 됩니다. 저에게 양쪽 측면이 다 있어서 그런 것도 있겠고, 아마 친구와의 관계에 대해 글을 잘 쓰셔서 그런 것 같습니다. 친구 관계도 시간 속에서 지속하기가 쉽지 않은데 단 둘이 만나는 관계일 때 더욱 그렇게 되기 쉬운 듯합니다. 두 사람만 만난다면 환경이나 처지가 달라지고 관심사가 달라졌을 때 이런 것을 이겨낼 뿌리 같은 것이 없다면 관계가 지속되기는 힘들었던 경험이 있습니다. 그런 뿌리란 게 나 혼자 있다고 생각한들 잘 될 리도 없고요. 저는 그냥 사랑도 변하고 우정도 변하고 시간 속에서 다 변한다는 생각을 합니다. 좋은 쪽의 변화면 바랄 바 없겠지만 실망스런 변화라 해도 실패와는 좀 다르게 생각이 되기도 합니다. 공유한 시간은 기억 속에 남지 않겠습니까.
2023.08.22 20:03
그 친구는 한결같습니다. 그래서 변한다는 이 개념이 저희 사이에 크게 적용될 일은 없을 줄 알았습니다. 아마 변한 건 저일수도 있겠지요. 그 친구는 하던대로 그냥 저를 만나고 푸념을 늘어놓고 있을 뿐이니까요. 저는 이제 타인의 고통을 듣거나 공감하는 일에 점점 엄격해지고 있습니다. 한 때 원없이 "좋은 사람"으로 살아봤기 때문에, 그 행위가 남기는 공허함과 무가치함을 실감해서 그런 걸지도요. 말씀하신대로 공유한 시간이 기억에 남는다면 그걸 위로삼아야할지요. 그 친구에 대한 저의 인식이 바뀌니 과거의 시간들도 다르게 다가오는 것 같아서 좀 무섭습니다. 기억에는 금새 먼지가 내려앉는군요.
2023.08.22 22:13
평생 친구가 있다면 참 좋은 거지만, 환경이 달라진 상황에서 예전처럼 친하게 지내기 힘든 것 또한 자연스러운 일 아닌가 싶습니다. 30-40 또래들 이야기 들어보면 특히 학창시절 친구가 그렇더라고요. 학창시절 친구랑 평생 가는 사람들도 있던데 결국 동창생이란 느슨한 바운더리일 뿐이고 그 안에서도 인생의 시기에 따라 가깝게 지내는 사이가 달라지니까요. 근데 또 요즘 유행하는 '손절친다'는 표현처럼 억지로 딱 끊어내는 것도 전 좀 별로더라고요. 인생은 어차피 길게 가는 건데 중간에 좀 서먹해졌다가도 또 우연한 다른 계기로 예전의 추억이 살아나는 경우도 있는 거라고 생각하거든요. 지금 말씀하신 그 친구와의 인연이 어떻게 풀릴지 지금은 알 수 없지만, 그래도 예전에 가깝게 지낼 때 편안하고 즐거웠다면 그걸로 충분했다고 생각하고 다음 단계로 넘어가야지요 뭐.
2023.08.23 09:08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제 인생의 시기와 그 친구 인생의 시기가 잘 맞지 않는듯 합니다. '손절'은 너무 잔인한 것 같아요. 오랫동안 알고 지냈으니 언젠가 또 관계의 탄력을 회복할수도 있겠지요.
2023.08.23 09:10
제 친구가 생각나네요. 그냥 저냥 만났었는데 하루는.
"잘 지내냐?" 으레 물어보는 안부를 물어봤는데 "응 잘 지내" 하더군요. 한참을 서로 아무 말 없다가 갑자기 그 친구가 고백하듯이 얘기했어요.
"사실 잘 못지내..." 뭐야. 이건 룰 위반이잖아. 갑자기 진짜를 얘기하다니. ㅎㅎ
그 때 제가 느꼈던 건 그 친구가 어떤 사람이다를 떠나서 켜켜이 쌓인 세월의 무게에 대한 연민이었던 것 같아요. 오랜 시간 지겹도록 쌓아올린 지루한 우정에 대한 연민. 토닥토닥 해주지도 않았어요. 그냥 "잘 못지내는구나. 어쩌라고. ㅋㅋ" 이렇게 얘기하고 다른 얘기로 넘어갔죠.
그래도 그냥 저냥 잘 지내고 있습니다.
2023.08.23 09:19
안부를 물었을 때 정말 안좋은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하면 할 말이 없어지는 것 같아요. 열심히 반응을 해도 뭐가 남지 않는달까요. 제가 해줄 위로를 다 해줬으니 그 친구에게는 저도 가봄님처럼 더 건조하게 대할 것 같기도 합니다.
나도 변하고 다른 사람도 변하니까요. 오래 알고 지낸 친구라고 꼭 더 깊고 좋은 관계란 법은 없지요. 어린 시절엔 자아가 정립되어 있지 않고 나이가 들면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게 되죠. 그냥 흘러가게 놔두다 보면 다시 가까워질 수도 있을 거예요. 아니어도 상관 없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