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01-174938.jpg



을지로 입구의 퀴퍼 행사장을 찾기 전에 서울도서관에 책을 갖다주러 들렀습니다. 바로 옆 서울광장을 웬 개신교단체가 쓰고 있어서 기분이 안좋더군요. 저렇게 휑하게 사람들이 멍때리고 있을거면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바글바글 즐겁게 놀 퀴퍼는 대체 왜 못쓰게 하는지... 바로 옆에서는 퀴어들도 없는데 방파제 어쩌고 하면서 동성애 반대 공연을 하는 개신교분들이 있어서 더 마음이 안좋았습니다. 반대를 위한 반대는 얼마나 맥빠지고 재미없어보이던지요.


을지로입구역을 가니까 개신교 혐오세력들이 안내판처럼 또 자리잡고 뭘 하고 있더군요. 할머니들은 무슨 이상한 한복에 부채춤을 추고 있고 젊은 사람들은 빨강 티에 군복바지를 입고 해병대 조교처럼 행색을 갖춰놨는데, 대체 뭘 하자는 건지 알 수가 없었습니다. 머리통 있으면 본인들 꼬라지가 어떤지는 아냐고 좀 묻고 싶었는데 그런 정신머리가 없으니까 이런 해괴한 꼴을 하고 있었겠죠. 매년 퀴퍼 때마다 보는데 진짜 괴상하고 좀 정신나간 사람들 같습니다. 그 세력을 뚫고 나가서 어렵사리 퀴퍼 행사장에 도착...무대가 도로 변두리에 설치되어있는 것 같아서 다시 한번 기분이 안좋아졌습니다.  


퀴퍼를 가는 이야기를 하면 신나고 들뜨는 도입부를 적어야할텐데 그렇지 못한 이유는... 이번에는 조금 착잡한 마음으로 갔기 때문입니다. 언어의 무력함과 공허함을 좀 느꼈습니다. 키배 백날 해봐야 뭐할 것이며, 혐오를 저지르는 사람들을 온라인에서 비웃어봐야 그게 사회 변화에 무슨 도움이 있을까 그런 생각도 들었거든요. 어차피 알 거 다 아는 사람들끼리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혐오세력을 비웃는 게 그냥 도덕적 우월감을 서로 전시하는 것 같기도 했습니다. 저는 이제 아무 것도 안하면서도 비웃음을 통해 자기가 뭐라도 되는 것처럼 착각하는 사람들이 좀 싫어졌습니다. 그래서 아무 것도 하지 않느니, 뭐라도 하자는 심정으로 갔습니다. 알량하게 떠들어놓은 언어의 빚을 갚는다는 마음으로요.



20230701-175125.jpg


날은 뜨겁고 행진을 기다리는 게 좀 지겨웠지만 막상 행진이 시작되자 정말 재미있었습니다. 계속 기다리기만 하다가는 어영부영 못갈 것 같아서 황급히 어떤 트럭을 쫓아갔는데 알고 보니 그게 레즈 히어로즈라는 트럭이더군요. 구름 타고 내려온 선녀라는 컨셉이 정말 확실했습니다. 행렬이 너무 길어 뒤쪽에서는 음악이 아예 안들리는 바람에 계속해서 앞쪽으로 이동하며 마침내 사람들과 흥겹게 노래를 부르고 행진을 했습니다. 레즈 히어로즈 분들은 지치지도 않는지 두시간 가까이 쉬지 않고 춤을 추시더군요. 모르는 노래가 많이 나올 거라고 각오하고 갔지만 웬걸, 최소한 10여년전 노래들이 나와서 아주 편안하게 들으며 갔습니다. 약속이 있는 관계로 마지막에는 종로에서 이탈했는데 그 때 나왔던 노래가 핑클의 영원한 사랑이라니 ㅎㅎㅎ 쥬얼리의 슈퍼스타가 나올 때는 "젊은이"들이 이 노래를 알까 싶어서 괜히 걱정도 되더군요. 서인영의 털기 춤을 과연 다들 알 것인지...


행진을 하면서 기독교 혐오세력들의 훼방을 그대로 전유했던 순간이 인상깊었습니다. 보통 행진을 하면서 기독교 혐오세력이 뭐라고 하든 와아아아 하고 함성을 내뱉으면서 그 소리를 덮어버리려고 하는데 올해에는 좀 달랐습니다. 혐오세력이 하는 말을 그대로 따라하면서 그 언어를 즐겼습니다. 예수천국~ 이라고 하면 예수천국~ 불신지옥~ 이라고 하면 불신지옥~ 동성애는 죄악이다~ 그러면 동성애는 죄악이다~ 모두가 그 말을 따라하면서 다들 웃고 신을 내는데 웃음이 터지더군요. 언어에 대한 언어의 싸움이 아니라, 그 언어를 그대로 따라하면서 아예 언어 자체를 무력하게 만들어버리는 현상이 신기했습니다. 이전까지는 당신들이 그렇게 말해도 나는 꿋꿋하게 나아갈 것이다! 이런 결연함이 있었다면 이제는 정말 초연하게 무슨 말을 하든 그걸 가지고 노는 달관의 경지가 느껴졌습니다. 개인적으로 정의의 언어에 좀 회의를 가지고 퀴퍼에 나갔다가 이렇게 혐오의 언어가 힘을 잃는 걸 보는 게 신기하단 생각도 했습니다. 언어 자체를 현장의 존재 자체가 완전히 이겨버리는 느낌도 들었습니다. 


동시에 오랜만에 '구경꾼' 이상의 자리에 설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뭔가를 보거나 듣는 건 결국 소비자로서, 일방적인 수용과 반응밖에 하지 못하는데 주체적으로 액션을 취하고 다른 사람들의 반응을 이끌어낼 수 있어서 보람을 느꼈습니다. 역시 세상은 "싸이버 세계"의 키배나 말장난이 아니라 결국 밖에서 몸을 움직여서 변화를 일으킬 수 있지 않나 하는 전통적인 생각도 좀 하게 되었구요.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지만 수백명이 그렇게 함께 움직이며 같이 뭔가를 즐길 수 있었던 것도 좋았습니다. 비록 가기 전까지는 이런 저런 먹구름이 머릿속에 끼어있었지만 막상 현장에서 몸을 움직이니 예상보다 더 재미있는 일들이 많더군요. 내년에도 또 갈 생각입니다. 듀게의 다른 분들도 많이 가셨길 바랍니다. 


@ 내년에는 꼭 서울광장을 탈환했으면 좋겠습니다!! 


@ 서울퀴어퍼레이드 후원 링크입니다. 못가셔서 아쉬웠던 분들은 소액후원으로라도 그 마음을 달래주시길! https://www.sqcf.org/home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2637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1630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1991
123931 [넷플릭스바낭] 제목 한 번 심플하네요. '9' 잡담입니다. [4] 로이배티 2023.08.06 425
123930 한때 취미 [3] catgotmy 2023.08.05 296
123929 프레임드 #512 [4] Lunagazer 2023.08.05 113
123928 미임파 10회 차 사소한 거 [9] daviddain 2023.08.05 333
123927 (디즈니플러스 바낭)은하계의 수호자3가 디즈니플러스에 올라왔군요. [2] 왜냐하면 2023.08.05 281
123926 2010년대 명작 일드 중 한편, '그래도, 살아간다' 1화 감상 시작(스포일러 약간) [1] 상수 2023.08.05 311
123925 Mark Margolis 1939-2023 R.I.P. [5] 조성용 2023.08.05 179
123924 [티빙바낭] 그 시절 양키님들의 유머 감각, '웨인즈 월드' 잡담 [4] 로이배티 2023.08.05 373
123923 [넷플릭스] 오오쿠, 우워.....재미집니다. [4] S.S.S. 2023.08.04 730
123922 요새 일어나는 무차별 살인사건 catgotmy 2023.08.04 383
123921 이런저런 일상잡담 메피스토 2023.08.04 207
123920 대체 왜 하필 최악찜통 매립지 위에서 잼버리를 하는지에 대한 설명 [14] 일희일비 2023.08.04 1132
123919 프레임드 #511 [6] Lunagazer 2023.08.04 104
123918 칼부림하는 사람들 [7] Sonny 2023.08.04 940
123917 미션 임파서블 7 그레이스/드디어 10회차 [4] daviddain 2023.08.04 325
123916 국뽕에 모용감을 주는 사건들이 연이어 터지고 있어요. [5] 왜냐하면 2023.08.04 742
123915 묻지마 범죄 예고와 갈수록 흉흉해지는 세상 [7] 상수 2023.08.04 668
123914 세계 영화 100 역시 대부 1편 재밌네요 가끔영화 2023.08.04 193
123913 [아마존프라임바낭] '멋진 징조들' 시즌 2를 좀 봐주시지 않겠습니까 [4] 로이배티 2023.08.03 620
123912 남남 안재욱 안보다보니 완전 아저씨네요 가끔영화 2023.08.03 332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