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새 극장이 망해간다고 하지만 그래도 보고 싶은 영화는 계속 개봉하고 있습니다. 특히나 재개봉을 해버리면 미처 못봤던 영화를 볼 절호의 기회이기에 옳다구나 하면서 반가운 마음으로 극장을 가게 되죠. 최근에 톰 크루즈의 팔구십년대 작품들도 재개봉을 했고 [순응자]같은 작품이나 [샤이닝]같은 작품들도 재개봉을 하는 추세이구요. 아마 개봉할 영화들이 더 줄어들면 이런 흐름은 더 거세질 것 같습니다. 아마 온 극장이 씨네마테크처럼 기획전을 주구장창 틀어댈지도 모르죠. 


그런데 이런 작품들을 다 챙겨볼 수 없습니다. 아니, 고전 명작들은 제쳐놓고서라도 그냥 개봉하는 영화들만 봐도 다 못보고 넘어가기 일쑤에요. 가장 간단한 기준으로 비교적 마음이 한가로운 주말 이틀에 각각 영화를 한 편씩 본다고 합시다. 저는 하루에 볼 수 있는 영화의 최대 갯수가 한 편이고 그 작품이 괜찮으면 그 여운을 오래 씹는 편이라 영화를 볼 때의 텀이 길었으면 좋겠거든요. 그렇게 보면 일주일에 영화를 두 편 보는 건데 이렇게 하면 너무 서운하니까 평일에 살짝 무리를 해서 영화를 한 두편 정도 본다고 칩시다. 그러면 영화가 오후 일곱시 쯤에 시작하니까 (퇴근하고 호다닥 가도 일곱시가 그나마 제일 빠른 상영시작시간입니다) 평균 상영시간 두시간으로 잡고 아홉시에 상영 종료를 하겠죠. 그러면 집에 가면 열시입니다. 평일에 자발적으로 이틀 정도 야근을 하는 기분인데, 이러면 정말 녹초가 됩니다. 집에 오면 간신히 샤워를 하고 자발적 녹다운.


제 체감상 저렇게 무리를 해도 괜찮은 영화를 다 못봅니다. 왜냐하면 이건 훌륭한 영화다! 라고 확신이 드는 작품 갯수만 한달에 8개는 가볍게 넘어가니까요. 깅가밍가한 작품도 있을테고 자기 취향이 아닌 작품들도 있을테죠. 그리고 씨네필들은 원래 남이 어떤 영화를 봤냐고 물어볼 때 안봤다고 하는 걸 수치스러워하는 사람들이지 않습니까? ㅋ 그러니까 어지간한 영화면 다 챙겨보겠죠. 별점 두개에서 두개반 나오는 그런 영화들도요. 이 행위를 과연 극장을 다니면서 할 수 있는 건지 그 물리적 여건에 대해 궁금증이 듭니다. 과연 한달 새에 개봉하는 영화들을 다 챙겨보기나 할 수는 있는 것인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씨네필들은 당연히 비평적으로 영화를 접근하겠죠. 그러면 영화를 보고 후기도 정성껏 쓸 거란 말입니다. 제가 블로그에서 이웃을 걸어놓은 씨네필들은 예사롭지 않은 글들을 씁니다. 그런 글들이 과연 한두시간 안에 뚝딱 나올 수 있는 것인가... 고민도 오래하고 탈고도 여러번 한 흔적이 보이거든요. 이것까지 합치면 극장에 영화를 보러 왕복하는 시간 두시간 + 영화를 보는 두시간 + 영화 보고 글을 쓰는 두시간 도합 여섯시간이 소요됩니다. 여기다가 씨네필들은 단순한 리뷰어가 아니니까 그런 비평적 글쓰기를 위해서 영화 이론도 엄청나게 읽겠죠. 그러면 그런 글들은 또 언제 시간을 쪼개서 본다는 것인지? 저는 필로만 읽는데도 그걸 다 읽을 시간과 힘이 없어서 사놓고 쌓아놓기만 하거든요. 지금도 [헤어질 결심] 비평모음집을 사놨는데 아직 비닐도 못뜯었습니다...


그런 씨네필들은 영화를 보는 눈과 기본적인 글실력을 다 다져놓은 상태인걸까요. 뇌에 영화근육이라는 게 이미 자리잡힌 것처럼...? 헬스 한 3년차 하면 3대 500은 칠 수 있게 된다는 듯이? 청소년 시절부터 영화에 대한 애정과 감각을 혼자 훈련해왔고 대학교에서 영화 전공쪽 수업을 들으면서 4~5년간 전문적인 훈련을 거친 뒤에는 영화를 보면서 빠른 시간 안에 그 영화에 대한 결론을 얻고 글로 정리할 수 있게 되는 것일까요. 저는 그런 과정을 겪은 적이 없어서 씨네필들이 극장에 가서 영화를 보고 글을 쓰는 그 일련의 물리적 과정이 좀 신기합니다. 어쩜 그렇게 꼬박꼬박 극장을 다니고 후기를 가지런하게 남기는지... 특히 남들이 아름답다고 하는 영화에 대해 거침없이 비판적 시선을 제기할 수 있는 자신의 그 미적 확신이 때로 부러울 때가 있습니다. 영화를 많이 보는데도 그 영화들에 대해 자신만의 결론을 깔끔하게 얻어내는 것도 신기합니다.


여기에 어떤 영화가 너무 좋은 경우 두세번 보는 때도 있겠죠? 이러면 그에 들어가는 물리적 시간과 수고는 배로 들어갑니다. 이동진 평론가처럼 한번 본 영화는 두번 안보는 경우도 많겠지만... 여기에 각종 영화제까지 덧붙여진다면? 저는 하루에 한편이 최대 영화관람횟수라 다른 도시에 가서 하루에 영화를 두세편 보는 분들의 감상력(?)이 신기할 때가 있습니다. 좋은 영화를 보면 보는 대로 정리할 것이 많을테고 안좋은 영화를 보면 보는대로 쓸데없이 영화위장만 차버려서 다른 영화를 볼 때 좀 거북할 수도 있을 것 같은데요. 어찌됐든 영화를 그렇게 직접 가서 많이 볼 수 있다는 게 단순히 체력의 문제만은 아닌 것 같습니다. 그 깊이와 넓이에서 어떤 식으로든 작은 미학적 성취를 쌓아나가는 분들을 보면 대단하다고 느낍니다.


무엇보다 대단한 건, 한편의 영화를 결국 놓아준다는 것 같습니다. 저는 정리가 안되면 영화가 머릿속에서 유령처럼 계속 맴돌고 있습니다. 그렇게 희뿌연 영화들이 정리된 영화들보다 훨씬 더 많은데, 어떤 식으로든 영화와의 대화를 끝내고 다음 영화를 만나러 가는 씨네필들은 대단한 것 같습니다. 이렇게 쓰다보니 씨네필이라는 건 지적 탐구심이나 감상력(?)보다도 어떤 식으로든 매듭을 짓고 마는 그 결단력에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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