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23 13:12
베리 앨런은 '플래시'라는 메타휴먼으로 살아가고 있지만 그에게는 큰 고민이 있다. 그의 아버지는 베리 앨런의 어머니를 살해했다는 혐의로 감옥에 잡혀있고 그의 무죄를 증명할만한 증거는 변변치않다. 세상을 구하는 것도 시급하지만 베리는 자신의 아버지가 무죄라는 걸 꼭 입증해야한다. 그는 과거에 가족이 함께 살던 집 앞에서 슬픔에 빠져 '플래시'로서 달리다가 과거로 갈 수 있다는 기묘한 현상에 맞닥트린다. 그는 살해당한 어머니와 무고를 뒤집어쓴 아버지를 구하기 위해 이 시간여행의 가능성을 이용하기로 마음먹는다.
영화의 내용만 따지면 [플래시]의 설정은 이미 관습적으로 되풀이되어왔던 것들이다. 시간여행과 평행세계는 이제 히어로장르에서 아예 빼놓을 수 없는 무엇이 되었다. 이것은 드라마판이나 과거에 개봉했던 동일 시리즈의 다른 배우를 평행세계의 일원으로 포섭하기 위한 비즈니스 전략으로도 유효하기 때문이다. 팀 버튼 감독판의 배트맨이 등장하는 것도, 전혀 다른 새로운 슈퍼걸이 등장하는 것도 크게 새로울 것은 없다. 즉 설정의 참신함만으로 이 영화를 평가한다면 [플래시]는 크게 와닿을 게 없을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이 영화는 여타 히어로물들에 비해 특별한 지점이 있다. 베리 앨런이 스피드 포스를 이용해 시간 여행을 처음으로 시도할 때, 영화는 시간여행을 말끔한 무엇으로 묘사하지 않는다. 이 영화의 시간여행은 일그러지는 시공간 속에서 자신의 형체조차도 유지할 수 없는, 기괴하고 징그러운 무엇이다. 어떤 면에서는 20세기의 공포영화를 떠올릴법한 이 연출을 보면서 나는 간만에 bizzarre 한 느낌을 받았다. 이후 베리 앨런이 원래의 시간대로 되돌아가려고 할 때 괴물같은 존재가 베리를 습격해서 다른 시간선으로 밀쳐낸다. 베리 앨런의 시간여행은 알 수 없는 무엇이며 뭔가 튀어나올지도 모르는 괴상한 세계, 즉 악몽의 세계가 된다.
이 영화는 시간여행이라는 판타지를 공포로 다루고 있다. 판타지는 인간의 이해 바깥에 있는, 불가해의 세계다. 처음에는 어둠이, 기독교 시대에는 신의 반대편에 있는 악마가, 혹은 자아 안에 있는 또다른 인격이, 그 다음에는 인간의 의식 아래에 숨겨있는 무의식의 세계가 판타지로 발달되어왔다. 판타지는 단순한 공상이 아니라 인간이 이해할 수 없는 무엇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어둠 속을 지나갈 때 인간은 빛이 차단된 시야로만 인식하는 게 아니라 공포를 느낀다. 불가해의 영역으로 들어갈 때 인간은 반드시 공포를 느낀다. 만일 영화가 판타지를 다룰 때 이 공포를 집어넣지 않는다면 판타지는 판타지로 작동하지 않게 된다. 단순히 자신이 모르거나 '신기한' 세상일 뿐 무언가를 깊이 알 필요가 없는 호기심과 낭만만 있는 세계가 과연 무슨 신비를 전달할 수 있을까.
하나의 영화를 말하면서 다른 영화와 굳이 비교를 하고 싶지 않으나 [플래시]의 시간여행은 마블의 [어벤져스: 엔드게임]과 확연히 대조된다. [어벤져스: 엔드게임]은 시간여행을 어떻게 다루는가. 깔끔해보이는 슈트를 입고 이런 저런 실험 끝에 우스꽝스러운 실패를 경험한 뒤 모두가 힘을 합쳐서 성공해내는 과정으로 그려진다. 어벤져스에게 시간여행은 어려울지언정 세계를 통제하는 또 다른 수단에 불과하다. 이 때 시간여행은 별로 신비로운 게 아니다. 과거의 인물들과 재회하는 기적은 일으킬 수 있으나 그 모든 것이 인간이 주무를 수 있는 과정이며 모두가 바라는 상상이기 때문이다. [플래시]의 시간여행은 어벤져스의 시간여행과는 꽤나 다르다. 그 표현방식부터 주인공이 시간여행을 활용하는 방식까지, 그것은 예측과 통제가 통하지 않는 무엇이다. 그 안에서 플래시는 무엇을 경험하는가. 자기가 알 수 없는 것들을 계속 마주한다. 그것은 단지 이세계에 적응하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힘과 인지로 해결할 수 없는 이상한 세계로의 여행이다.
이런 측면에서 [플래시]는 시간여행이라는 소재를 훨씬 더 흥미롭게 다룬다. 모든 것이 정해져있고 통제가능한 세계가 아니라, 예측이 어렵고 한명의 인간이 통제할 수 없는 세계를 내세우며 일반적인 히어물과는 다른 경로로 나아간다. 일찍이 [배트맨 대 슈퍼맨]에서부터 DCEU는 선과 악의 구분이 모호하고 모든 인물에게 불길한 앞날이 드리운 세계관을 질문했다. 슈퍼맨은 아주 강한 존재이고, 그 존재가 힘을 써서 적을 쓰러트리면 정말 끝인 것일까. [배트맨 대 슈퍼맨]은 슈퍼맨의 존재와 그 힘의 여파를 물었다. 비록 동명이인의 어머니를 뒀다는 이유로 모든 갈등을 퉁치고 넘어가려는데서 영화의 설득력이 크게 부숴지긴 했으나 DCEU는 초인이란 존재 자체를 질문해왔다. (그 반대편에 있는 악인을 탐구하고자 했던 [수어사이드 스쿼드]가 우정놀이로 변질된 것이 안타까울 뿐이다) 힘은 선한 것인가. 의도와 힘은 항상 같은 방향을 바라보는가. [플래시]에서도 같은 질문이 이어진다. 초인이란 어떤 힘을 우연히 가지고 있는 존재일 뿐이며 그 힘이란 소유자에게도 여전히 수수께끼이다.
[플래시]는 그 힘을 끝까지 수수께끼로 남겨놓는다. 영화 안에서 베리 앨런은 힘을 쓸 수는 있으되 그 힘을 완전히 다룰 수는 없으며 자칫하면 힘이 소유자를 잡아먹는다. 인간의 오만hubris를 큰 죄악으로 두고 시지프스의 형벌처럼 덧없는 노력과 무한의 실패를 경험하게 한다는 점에서 영화는 그리스신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렇기에 [플래시]의 결론은 딱 하나뿐이다. 인간의 한계를 깨닫고 운명 앞에서 겸허해지는 것이다. 그 결과 영화는 헐리우드가 절대조건으로 내세우던 가족을 포기한다. 그리고 히어로다움도 포기한다. 이 영화에서 베리 앨런이 다다르는 결론은 자신의 무능이다. 어떤 사건 앞에서 자신은 해결사일 수 없으며 무력한 인간인채로 남을 수 밖에 없다.
나름 파격적인 이 설정을 영화가 봉합하는 방식에는 조금 의문이 든다. 어떤 세계의 운명은 이미 정해져있다고 다른 두 주인공의 죽음을 그렇게 받아들일 수 밖에 없었을까. 타인과의 이별 또한 숙명이라는 교훈을 배우기 위해서라면 베리 앨런이 평행 세계에 가지는 책임감은 너무 붕떠있다. 배트맨이 왜 굳이 이 세계를 구하려하냐고 물어봤을 때 베리 앨런은 분명히 어머니가 살아있는 세계라고 그 이유를 말했다. 즉 그는 어떻게든 이 세계를 구해내야한다. 그러나 배트맨과 슈퍼걸의 패배를 그는 너무 빠르게 납득한다. 이별을 수긍하기 위해서 한 세계의 절멸도 기꺼이 받아들인다는 것은 오히려 평행세계 특유의 분리된 감각이 아닐까. 어차피 내 세계는 아니라는, 나는 나의 세계로 돌아가면 된다는 그 감각을 동원해야 베리 앨런의 깨달음에 동참할 수 있게 된다. 영화는 베리 앨런의 배움을 위해 기꺼이 한 세계를 희생시킨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평행세계의 새로운 영웅들은 덧없이 소모되고 만다. 배트맨과 슈퍼걸은 예정된 패배만을 경험하고 퇴장한다.
플래시 일행과 조드가 대적하는 클라이맥스에서 베리 앨런은 이 사건의 관찰자에 머무른다. '행동하는 자'가 아닌 '바라보는 자'의 위치에서 베리 앨런은 다른 베리의 수많은 실패를 맛보고 그의 괴인화를 목격하며 세계로부터 동떨어진다. 그가 할 수 있는 것은 '행동하는 자'를 만류하는 것 뿐이며 세계에는 직접 개입할 수 없다. 이 과정에서 영화는 수많은 평행세계를 등장시키며 베리 앨런을 절대적인 관찰자의 위치에 둔다. 그 결과 베리 앨런은 도덕적으로 "겸허함"이라는 교훈을 얻으나 '이 세계의, 누군가를 구해야한다'는 그의 소시민적인 책임감은 거시적인 운명론에 집어삼켜진다. 그래서 영화가 플래시란 히어로와 다른 초인들에게 전하는 교훈은 무엇일까. 다른 건 다 해도 되지만 시간만은 건드려서는 안된다는, 3차원의 존재로서의 한계만을 가리키는 것일까. 혹은 죽은 자를 되살릴 수는 없다는 부활금지의 원칙일까. 이 부분에서 영화는 초인으로서의 한계와 능력에 대해 다소 모호한 입장을 견지한다. 슈퍼걸과 배트맨의 세계는 어떻게 되었으며 그 세계의 운명을 어떻게 받아들여야하는지 영화는 두 베리 앨런의 싸움으로 뭉개버린다.
결론적으로 [플래시]는 신비에 대한 질문은 잘 던졌으나 그에 대해 만족할만한 답까지는 끌어내지 못하는 작품이다. 어쩌면 이 시간의 마술을 제대로 다루는 것 자체가 상업영화로서는 거의 불가능한 과제일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베리 앨런이라는 한 인간이 가진 이별의 고통을 마침내 납득하게 된다는 점에서, 드라마로서는 꽤나 괜찮은 작품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 영화의 주연배우인 에즈라 밀러가 그 아름다움을 스스로 다 날려버렸지만 말이다. 초인, 힘, 세계에 대한 이 질문을 계속 던져나갈 때 DCEU의 활로가 뚫릴 것 같다는 기대를 해보게 되지만, 그것은 리부트되는 다른 평행세계에서 확인해봐야 할 일이다.
@ 에즈라 밀러가 망친 이 영화의 흥행 결과가 이 영화의 주제의식을 상기시킨다. 과거의 자신이 저지른 과오는 다른 세계에서도 기어이 원인 혹은 결과로서 자신을 쫓아오고 그것을 감당해내야한다는 것이다.
2023.06.23 15:31
2023.06.23 17:42
두 베리 앨런의 대화가 특히 말씀하신 부분을 상기시키더군요. 너는 왜 이렇게 한심하고 경솔하니, 정신 좀 차려라 이런 타박하는 대사를 하는데 누가 들어도 현실의 에즈라 밀러가 떠오르게 됩니다. 저는 그게 제작진의 의도라고 생각했습니다.
말씀하신 시간여행을 그렇게까지 자세하게 보진 못했는데, 그럼에도 충분히 압도당했습니다. 이게 대체 뭐지? 라는 생각이 들게 되더군요. 간만에 비쥬얼에 압도되었습니다. 좀 괴기스러운 느낌이 있죠... 내가 어떤 순간을 바깥에서 목도하는데 그걸 건드릴 수도 있지만 그러면 모든 게 헝클어질 것 같은 그런 기분이 들었습니다. 마블의 [앤트맨]이후로 오랜만에 불가해의 이세계를 탐험하는 기분이었습니다.
이 영화의 결말은 원래 내정되어있던 대로 갔어야 한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그래야 그 두 사람의 재등장을 보며 그들의 멸망한 세계를 잊을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사실 해결된 게 아무 것도 없다는 지적에도 동의하는게, 본인이 문제를 일으켜놓고 수습만 했지 아무것도 나아진 게 없죠. 심지어 아버지를 구한 것도 그게 원래 세계의 아버지가 아니니...
2023.06.23 19:07
에즈라 밀러 관련 모든 구설수는 촬영이 다 끝나고 터졌습니다. 그래서 배우교체를 고려도 해볼 수가 없었죠. 제작진이 의도적으로 에즈라 밀러를 메타적으로 까는 대사를 넣었을리는 ㅠㅠ
2023.06.23 20:41
2023.06.23 17:05
시간여행이 어떻게 구현되어야한다고 생각하는지에 대해 이렇게 심도있게 다루시다니 정말 이번에도 어디 매체에 기고해볼만한 글인 것 같습니다. ㅎㅎ
아무래도 호러물 출신 감독이라서 그런지 공포스러움 그런 분위기도 괜찮았지만 저는 그 시간여행 도중 나오는 CG 인간 캐릭터들의 불쾌한 골짜기 때문에 다른 차원의 공포를 느끼기도 했어요. 감독이 의도된 거라고 설명을 하던데 그래도 혹평이 많이 나오는 걸 보면 결국 관객들에게 제대로 설득력있게 시각적 요소로 보여주지 못했다고 봐야할 것 같습니다. 마지막에 나오는 원조 슈퍼맨, 슈퍼걸, 니콜라스 케이지 슈퍼맨 카메오도 이게 뭔 의미가 있나 이런 생각도 들었었죠.
많은 부분을 따온 원작 플래시포인트와 달리 작중 내내 뼈저리게 배운 교훈도 잊고 아빠는 살리겠다고 또 꼬아놓은 엔딩도 뒷맛이 구렸고 여러가지 재미있는 볼거리들은 많았습니다만 아쉬운 부분들만 많이 생각나는 작품이었습니다.
@에 덧붙이신 내용 때문에 제작진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는 메타적 메시지가 담긴 영화가 되네요 ㅋㅋ 이 영화의 흥행이 망하고 있는 것은 에즈라 밀러 이슈도 있고 그동안 DC 유니버스 안팎에서의 각종 문제들이 다 겹친 결과로 보이지만요. 제임스 건과 피터 사프란이 주도해서 새로 리부트하는 DCU 때문에 이걸 봐봤자 무슨 의미가 있나 하고 안가는 팬들도 있는 것 같구요.
2023.06.23 17:44
저도 이 영화를 평행세계 영화로는 그렇게까지 재미있게 보진 못했습니다. 다만 시간여행의 묘사 부분에서 훨씬 더 신선하고 호러스러운 느낌을 받아서 이 영화를 좋게 봤던 것 같아요. 저는 레이디버드님과 달리 그 불쾌한 골짜기를 호러로 즐겼습니다. 오히려 훨씬 더 일그러지게 묘사했으면 어땠을까 싶기도 했어요 ㅎ
2023.06.23 17:52
2023.06.23 18:3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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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는 예고편부터가 현실과 맞닿아 있어서 뭐라 형용할 수 없는 음울한 재미를 느꼈습니다. 예고편에서 에즈라 밀러에게 모든 사람들 '너 때문에!', '너가 모든걸 다 망쳤어!' '너!' 이렇게 다그치는데 자꾸 현실이 겹쳐보이더군요. 예고편 제작자들이 그런 생각을 안 하진 않았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시간여행을 어떻게 표현할 것인가에 시간 여행이 나오는 영화마다 궁금해하는데, 이 영화의 묘사는 탁월했다고 생각합니다. 다만 그 구의 바깥이 보이면서 여러 구들이 날아다니는 광경은 그 신비도를 많이 하락시켜서 아쉬웠습니다. 그렇게 보니까 겹겹이 쌓인 릴 구조가 마치 옆으로 나열한 필름처럼 보이더군요. 특히 달리면서 주변을 둘러싼 모든 과거들이 다가오다가 발 아래에서 검은 가루가 되서 어디론가 사라져버리는데, 자신이 경험했던 과거들을 갈아버리는 그 상황에서 다시 과거로 달린다는게 정말 괴기스럽더군요. 말 그대로 현재를 비존재로 만들어버리는 과정인데. 재미있게 봐서 감독이 누구인가 찾아봤더니 호러 영화를 몇 편 찍었더군요. 호러 감독들은 이런 표현법을 가지는가, 못 보는 장르인데 아쉽다는 생각을 했네요.
들으셨겠지만 이 영화의 결말은 몇 가지가 있었고, 리부트 때문에 그런 결말로 결정되었던 것 같습니다. 초반부에 플래쉬가 인간(소시민)적인 고민을 하는데 그 주위 능력자들은 다들 멘탈도 초인인 사람이라 굉장히 외로워 보이더군요. 그나마 베트맨과 대화하지만 그도 만만치 않고요. 과거의 자기 자신과도 말이 잘 안 통하는걸 보며, 사실상 해결된건 전혀 없는 결말이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캔을 맨 윗 칸으로 옮겨서 어머니는 못 구하지만 현재의 아버지는 구한다는 건 교훈을 전면 부정하는 것 같기도 하고요. (현재 시점보다 미래 시점을 고치는건 상관 없다는 듯이.)
앞뒤가 잘 안 맞단 말을 했지만, 최근 본 블록버스터 영화 중 시간 가는지 모르고 본 영화였습니다. 원없이 뛰기도 했고, 실험체 옷을 입고 비밀기지에서 나와서 실험자들을 후드려패는 로망도 실현됐고, 너무 튀거나 필요 없다 싶은 장면도 거의 없었고, 농담들도 그럭저럭 유효했어요. 심지어 저는 조드와의 싸움 이후 좀 더 크고 거대한 싸움이 한 번 더 있는지 알고 긴장하다가, 법정 앞에서 그렇게 끝나서 잠깐 황망했습니다. 시간 감각이 잘못 된 상태였으니까요. 이 감독의 다음 블록버스터 작품을 기다리게 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