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00년의 기다림' 잡담

2023.07.17 19:48

thoma 조회 수:459

405309e86dc2249a73044ecb26849ea6c0767497

우리 나라에선 '이야기를 좋아하면 가난하게 산다'는 말이 있잖아요. 현실 감각이 없어진다고 생각해서일까요. 저는 박완서의 소설에서도 이 대목을 읽었던 게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박완서였을 주인공이 어린이였을 때 너무 어른들에게 이야기를 해 달라고 조르거나 이야기책을 밝히자 그의 할머니가 한 말이었나 그랬습니다. 박완서는 이후에 오래 현실 세계를 꾸려나가다 중년 이후 이야기꾼으로서의 길을 걷는데 경제적으로는 중산층 생활을 하셔서 전쟁전후를 제외하면 가난하게 사시지는 않은 것 같아요. 인간사 큰 굴곡이 있어 마음의 고통은 많이 겪으셨지만요.


'3000년의 기다림'에선 위의 문장을 요렇게 고쳐야 되겠습니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시청각적 이미지는 생략하고 그냥 드문드문 이상한(인상적인) 장면들 이야기를 두서없이 하려고 합니다. 내용도 다 포함되어 있고요. 


알리테아는 어렸을 때부터 혼자 있는 것이 편했으며 그런 아이에게 흔하게 볼 수 있는 귀결로 책을 좋아했고, 공상의 친구도 있었습니다. 이 보이지 않는 친구에 대해 글로 기록하곤 했는데 이상하게도 글로 적을수록 그 존재는 점차 의심스럽고 유치하게 느껴졌고 결국 그렇게 의심받던 친구는 어린 알리테아의 인생에서 사라집니다. 병에서 나온 지니를 만나 통성명을 하고 이야기를 나누게 된 초반에 다짜고짜 '고백'할 것이 있다면서 어린 시절 현실의 결핍이 만들었던 그 보이지 않는 친구 얘기를 꺼냅니다. 이것이 왜 '고백'이 되어야 할까. 주의가 갔습니다. 마치 새로운 사랑을 시작하기 전에 상대에게 이전에 했던 사랑의 실패의 경험을 얘기하는 것 같았습니다. 맞는 것 같습니다. 이 영화는 다시 잘 사랑해 보고자 하는 사람의 이야기였고 그 사랑의 대상이 '이야기'였던 것입니다. 


지니가 사랑 때문에 자발적으로 병에 들어갔다가 상대의 망각 때문에 또다시 갇힌 이야기를 합니다. 그것을 듣던 알리테아는 당신을 사랑하게 되었다, 당신도 나를 사랑해 달라,는 소원을 말합니다. 이 장면도 영화의 내용 전개상으로는 상당히 뜬금없이 느껴졌습니다. 알리테아와 지니 사이에 사랑이 생길 수 있는 사연도, 사건도 없으니까요. 그냥 호텔방에서 둘 다 목욕 가운을 걸치고 3000년에 걸친 지니의 이야기를 들을 뿐이었거든요. 지니의 이야기를 통해 계속해서 갖고 있던 내면의 요구(갈망)를 분명히 깨닫는 거라는 생각이 듭니다. 좋은 이야기, 아름답고 가치 있는 이야기가 주는 감동과 그것에 대한 사랑을 다시금 확인하는 것 같습니다. 또한 상대의 망각으로 지니가 오랜 세월 병에 갇히게 된다는 것이 알리테아의 폐부를 찔렀을까요.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은 이야기도 그 사람을 좋아하지 않을까 생각해 봅니다. 주변을 보면 생각보다 이야기를 좋아하는 사람이 흔치 않은 것 같아요. 내가 이야기를 사랑한다면 나는 이야기의 사랑을 받는 사람이라는 생각을 해 봐도 되지 않을까 싶습니다.


사람이 연인이 밤을 보낸 다음 아침 장면도 무척 이상합니다. 지니의 모습은 안 보이고(마치 목욕탕의 수증기에 가려서 그런 양) 행복해 하는 알리테아 혼자 허공을 보며 같이 런던에 가자 어쩌구 말합니다. 집으로 와서 지니와 지내며 알리테아는 일상 일을 하러 나갑니다. 학교에서 일처리도 하고 카페에서 혼자 식사도 하고 전철을 타고 돌아오고...등등. 그런데 이 장면들이 느리고 적적해 보입니다. 집에 연인이 기다리고 있다기엔 어울리지 않는, 언제나 지속되어 온 이전과 같은 일상의 모습으로 보입니다. 그러나 집에 오면 지니가 식탁 의자에 앉아 있어요. 이 부분을 보자니 영화의 정 중간에 나왔었던, 아무도 그 존재를 모르고 모두의 망각 속에서 병에 갇혀 있던 외로움을 이야기 한 후에 '우린 누군가에게 진짜일 때만 존재합니다' 라고 한 지니의 대사가 떠오릅니다. 


온갖 전파 공해로 인해 가끔씩 만나기로 하고 만남의 그 순간순간을 만끽하며, 죽기 전에는 함께 하겠다고 한 지니에게 알리테아는 충분해 합니다. 알리테아는 어릴 때와 달리 지니라는 존재를 의심하지 않고 사랑하고 또 사랑받고 있다고 믿는 모양입니다. 마지막 장면의 둘은 무척 만족스러워 보입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4096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3371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3762
124116 오스카를 부부가 모두 받은 경우는? [10] scherzo 2010.07.14 2777
124115 신촌, 조선의 육개장 칼국수 [9] 01410 2010.07.14 4692
124114 오늘 무릎 팍 도사에 김갑수 나옵니다. [13] DJUNA 2010.07.14 4394
124113 '대부' 아버지와 함께 봤어요. [1] 산호초2010 2010.07.14 2103
124112 퇴근길 봉변 당하는 글? - 젊은 남성의 경우 [7] soboo 2010.07.15 3892
124111 그 멘트는 왜 안바뀌는 걸까요 [3] 메피스토 2010.07.15 2413
124110 개념없는 기자들 참 많네요. [8] 푸른새벽 2010.07.15 3783
124109 부산 1박2일 여행; 가볼만한 곳 알려주세요. [6] 풀빛 2010.07.15 3668
124108 인셉션 아이맥스로 예약했어요. + 디카프리오 잡담 [7] Laundromat 2010.07.15 3324
124107 이쯤에서 돌아보는 노라조의 히트작 슈퍼맨 그리고 연극 뮤직비디오 밀크 2010.07.15 2107
124106 정지선 위반하는 차들 [8] 장외인간 2010.07.15 2690
124105 패러디 영화라면 이 영화를 빼놓을 수 없죠 [5] 밀크 2010.07.15 2670
124104 기사 펌. 제천, 채석장에서 나온 석면 먼지로 뒤덮여, 4대강에도 쓰인다고..ㅜㅜ [2] 검은머리 2010.07.15 2525
124103 Inception: the Cobol Job [1] 날다람쥐 2010.07.15 2562
124102 부산 검찰, 짝퉁운동화 적발 [2] 푸네스 2010.07.15 2801
124101 초등학생에게 적당한 수도권 관광지 질문입니다. [7] sent & rara 2010.07.15 2070
124100 엔터 더 보이드(가스파 노에) 오프닝 크레딧 삽입곡 [1] lynchout 2010.07.15 2808
124099 Roger Ebert on "Inception" [1] 조성용 2010.07.15 2860
124098 [bap] 대학로의 두극장이 하나로 태어났네요(한팩&) [1] bap 2010.07.15 2185
124097 자취생은 H형책상이 싫어요! ㅜㅠ [5] 29일 2010.07.15 7870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