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품' 읽고 잡담.

2023.05.06 17:26

thoma 조회 수:224

소설에서 '묘사' 부분 좋아하시는지요. 

일단은 읽고 나서 가지는 생각이긴 한데 저는 필요했다는 동의가 충분히 되지 않으면 묘사를 위한 묘사가 길게 나오는 부분은 재미가 덜한 것 같습니다. 그렇게 느끼는 작품이 대부분 외국 소설인 것을 보면 감을 잡기 어려워서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자연 경관 묘사의 경우에 식물에 무지해서 식물 이름이 나오면서 생김새나 이미지를 상세하게 묘사하면 빨리 끝나기를 바라게 되거든요.

 

이 소설에 묘사가 꽤 길게 자주 나옵니다. 파리 사람들이 걷기를 좋아한다는 말을 들었어요. 걷기 좋은 아름다운 도시라서 그렇겠죠. 여튼 백 오십여년 전의 이 소설 속 인물들도 자주 걷는데요, 중심 인물들이 걷기 시작하면 은근히 걱정이 됩니다. 혼자서 또는 여럿이서 걷기 시작하면 작가는 이들이 걸으며 보는 주변을 상세하게 묘사하거든요. 이들이 누구냐하면 인상주의 화가들 아니겠습니까. 해가 내리쬐거나 구름에 그늘지거나 석양에 물들거나 가로등에 반사되기도 하며 - 빛에 의해 변화하는 파리의 모습을 글로 그리고 있어요. 여러 건축물들과 센강 주변 부두의 노동자와 선박, 멀리 보이는 섬과 다리들과 기차와 마차와 인파들. 묘사가 길게 이어진 부분은 헤아려 보니 8페이지 분량도 있었습니다. 

인상주의 화가들의 작업을 다루고 있는 이 소설에서 화가의 시선으로 본 자연과 파리라는 도시의 세부 묘사가 필요했을 것입니다. 

또한 작가가 문장들로 그림의 효과를 의도했다는 생각도 했습니다.(이 부분은 읽는 중에 생각한 것인데 소설을 다 읽고 뒤의 해설을 보니 비슷한 이야기를 해설자가 하는 걸로 봐서 다들 그렇게 이해하는 듯합니다) 

제 경우에 좋았던 묘사 부분도 있었으나 실물 그림을 보지 않은 채 누군가 그림을 말로 설명하는 것을 들을 때의 파편화된 느낌과 지루한 느낌도 있었습니다. 소설에서 묘사가 사건과 연결되어 있지 않을 때 흔히 그런 느낌을 받아왔듯이요. 이 작품은 '묘사' 자체가 중요한 소설이니 이런 불평은 적절하지 않을 듯하지만 어쨌든 재미의 면에선 앞서 읽은 '집구석들'보다 못했습니다.


이 소설의 주인공인 클로드는 그가 그렸다는 그림 설명을 보면 마네, 개인사를 보면 세잔을 떠올리게 하며 불우한 천재의 전형성을 갖고 있는 인물입니다. 아쉬운 점은 이 인물의 내적 동기같은 것이 충분히 그려지지 않은 점입니다. 변덕스러움이야 누구나 다소 가졌으나 그 이외의 동기들도 필요하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어요. 등장하는 예술가들이 모두 에밀 졸라 특유의 '냉정한 시선으로 해부' 되는데 그것은 인물들의 장점 보다 단점을 부각시킨다는 뜻일까요. 먼저 읽은 '집구석들' 역시 인물들이 거의 한결같이 저속하고 천박함을 휘둘렀는데 그 소설의 인물상은 그 작품의 주제면에서 충분히 설득력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 소설 '작품'에선 클로드와 예술가 친구들이 이렇게 그려질 이유가 있을까, 아쉽게 여기는 마음이 살짝 들 정도로 부정적인 면이 두드러진 느낌입니다. 

단 예외가 클로드의 절친이며 소설 후반에 작가로 성공하는 상도즈입니다. 상도즈는 에밀 졸라 자신입니다. 소설 속에서 상도즈는 총서 시리즈에 대한 포부를 밝힐 뿐만 아니라 졸라의 비망록에 그렇게 쓰여 있다고 하니까요. 상도즈는 무리에서 유일하게 일상과 예술을 조화시킨 인물로 표현되어 있고 성실하고 다정합니다. 클로드를 끝까지 지지하고 곁에 남는 친구입니다. 

세잔이 이 소설을 읽고 어느 정도의 환멸을 느꼈을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어느 정도인지는 몰라도 틀림없이 환멸을 느꼈을 것이라는 생각은 드네요.(졸라여, 그대의 해부의 칼끝은 그대만을 비켜가는구나?)   

 

'집구석들'과 분량은 비슷한데 이번 책은 좀 읽기 힘들었어요. 당시의 대중들도 비슷하지 않았을까 싶습니다. 게다가 요즘 피부과 약을 먹고 있는데 졸리는 부작용이 있다고...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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