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8.05.18 13:42
개인 SNS에서 옮긴 글이라 반말입니다. 양해 부탁드립니다.
버닝을 보기 전 친구들에게 이 영화가 내 인생을 바꿀 거라고 말했다. 영화 한 편에 그렇게 많은 것을 기대하는 내가 미친 년이라고. 그러나 진심이었다. 나는 그렇게 믿었다. 버닝을 보고 나면 내 인생이 바뀔 거야.
나는 친구가 버닝을 보면서 혹은 보고 난 후에 내가 한 말을 기억해주기 바랬다. 그런 식으로 버닝과 연결되고 싶었다.
기저효과라는 말을 얼마 전 배웠다. 그 말에 따르면 나는 버닝을 보고 난 후 실망해야한다. 실제로 친구들도 너무 기대하지 말라는 이야기를 했다. 나는 일부러 고집을 부렸다. 아니야. 진짜 바뀐다니까, 인생이. 말이 씨가 되길 바랬다.
오늘 아침 버닝을 보고 왔다. 내 인생이 바뀌었다.
이창동과 하루키는 내가 생각할 수 있는 범위에서 가장 멀리 떨어진 두 존재다. 이창동은 무겁고 하루키는 가볍다. 이창동은 현실적이고 하루키는 비현실적이다. 이창동은 신화적이고 하루키는 비신화적이다. 이창동은... 이런 식으로 끝없이 이어나갈 수 있다.
헛간을 태우다도 몹시 가벼운 이야기다. 기둥 하나 없이 골조와 벽, 지붕만으로 지어진 집이다. 뺄 수 있는 걸 최대한 빼서 정말 꼭 있어야 하는 것 말고는 아무 것도 존재하지 않는 이야기다. 이창동도 이 이야기의 미덕이 무엇인지 잘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캐스팅에서 그런 ‘빼기’의 미학이 가장 도드라진다. 스티븐 연과 전종서는 연기를 못한다. 워킹데드를 안 봐서 모르겠지만 원래 연기를 못하는 사람인지, 한국어가 낯설어서 그런 건지 아무튼 연기를 못한다.
그러나 스티븐 연은 1세계의 권태 그 자체이며, ‘밴’이라는 인물에게 그것 이외에는 아무 것도 더할 필요가 없다. 잘생김도 호소력도 필요가 없다. 연기를 할 필요가 없다. ‘밴’은 1세계의 권태이고 스티븐 연은 그냥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그렇게 보인다. 곡성의 일본인 배우와 마찬가지다.
전종서도 비슷한데 극중 해미는 하찮은 여자다. 전종서도 하찮은 여자다. 하찮은 얼굴에 하찮은 연기를 한다. 어디에도 있으며 누구도 주목하지 않아 사라져도 모를 그런 하찮음이다. 전종서는 그저 해미 그 자체다. 자의식이 있는 배우로써는 아주 힘든 연기였을 것이다. 연기 연출을 한 이창동이나 실제 연기를 한 전종서나 대단하다.
유아인이 연기한 종수는 이 영화에서 유일하게 피와 땀을 흘리는 살아있는 인물이다. 대상화되지 않고 자기 자신으로 사는 사람이다. 질투를 하고 사랑을 한다. 오욕칠정을 느끼는 인간이다. 하나의 관념으로만 존재하는 밴과는 다르다. 유아인은 현존하는 배우 중에 가장 이것을 잘한다. 종수는 정말로 살아있는 듯 보인다. 1세계 밖에서 육신을 짐처럼 이끌고 질질질 살아가고 있는 게 스크린 밖으로 전달이 된다.
강동원 설리가 밴과 해미 역으로 거론된 걸로 안다. 만약 그 캐스팅이 성사되었다면 한국 관객은 조금 더 들었을 지 모르나 지금과 아주 다른 형태의 영화가 되었을 것이다. 강동원과 설리라는 인간이 가진 생생하고도 압도적인 존재감으로 인해 밴과 해미에게 다른 레이어가 생기고 입체적이 되고 풍부해져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종수의 생생함을 위협했을 것이다. 전체적으로 균형이 무너졌을 것이다. 지금처럼 단순하고 간단한 영화가 되지 않았을 것이다. 시적이지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 버닝은 시적이다. Poetic하다. 나는 시를 잘 모른다. 그러나 이 영화를 보는 내내 시적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시는 날씬한 문학이다. 불필요한 건 쉼표 하나도 허용하지 않는다. 버닝이 가진 간결함은 시적인 인상을 준다.
수많은 은유들.. 정답을 알려주지 않는 깊이. 허무, 권태와 같은 관념을 연기하는 배우들.
하루키는 버닝을 보았을까? 보았다면 그는 감동했으리라. 자신이 시작한 이야기가 옆 나라의 또다른 소설가 출신 감독에 의해 영화화되어 다른 지점으로 나아가는 것에 놀라고 기뻤을 것이다.
(이하 스포일러)
원작과 가장 다른 점은 밴의 캐릭터다. 허무한 여자들이 존재하는 것을 금지(ban)하는 밴은 전혀 그 실체를 알 수 없는 미스터리한 인물이다. 소설은 끝까지 밴이 왜 이런 행동을 하는지 그의 욕망을 보여주지 않는다. 그저 헛간이 태워지길 스스로 바란다고 진술할 뿐이다. 영화에서도 이 대사는 활용된다. 나는 판단 같은 걸 하지 않아요. 비가 오면 다 쓸어가 버리죠. ‘비가 판단을 하나요?’ 그냥 내리는 거에요. 1세계의 모든 가치와 자원을 향유하는 이 캐릭터는 끝없이 권태롭다. ‘난 재밌으면 뭐든지 해요.’ 삶이 너무나 권태롭기 때문에 뭐라도 해야 한다. 그중 밴이 택한 것은 허무한 존재들을 태워버리는 거다. 자신의 페이스대로 두 달에 한번씩 여자들을 태운다. 가족도 친구도 돈도 없는 있으나 마나 한 여자들을 태운다. 그 때 그는 심장 저 밑에서 베이스의 울림을 듣는다. 그러나 이조차도 지루해지는 순간이 온다. 밴은 원한다. 나와 같이 베이스의 울림을 들을 수 있는 사람. 영화가 종반으로 치달을 때 나는 원작에 없는 결론부를 (원작에서는 커피숍에서 우연히 밴을 만나고 헛간을 태웠다는 이야기를 듣고 끝이다.) 대체 이창동이 어떻게 처리했을지 궁금해서 몸살이 날 지경이었다. 나는 밴과 종수가 함께 여자들을 태우는 장면을 상상했다. 그러나 이창동은 거기서 더 나아간다. 종수가 밴을 밴해 버리는 것이다. 밴은 ‘종수씨는 너무 진지해. 즐기며 살아요. 베이스를 느껴봐요.’라고 말한다. 나를 죽이란 말이야. 지루하단 말이야.
밴은 악인가? 나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종수는 밴에게 애원한다. 해미를 죽이지 말아달라고. ‘씨팔 난 해미를 사랑한다고’ 하지만 그 말은 밴에게 전달되지 않는다. 밴은 관념일 뿐이며 밴에게 해미도 허무의 다른 얼굴 중 하나일 뿐 인간으로 기능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래서 뭐 어쩌라고?가 되는 것이다.
해미는 종수에게만 보이는 고양이, 귤, 우물이다. 종수가 아니라면 존재했다는 사실조차 아무도 모르는 존재다. 판토마임과 아프리카 여행, 고양이와 우물에 대한 모든 에피소드가 이 우화를 위해 존재한다. 사람은 타인의 진정한 애정을 통해서만 실제로 존재할 수 있다. 사랑이 없다면 당신은 아무 것도 아니다. 그러나 해미는 관념을 선택한다. 실제로 존재하지도 않는 1세계의 권태를 택한다. 그 부유함과 온갖 혜택들에 속아 밴을 택한다. 해미는 정말 노을처럼 사라지고 싶었을까? 밴은 해미(와 그밖의 여자들)를 도와준 것일까? 해미는 죽어 마땅한 존재였을까? 종수는 이게 아니라고 증명하기 위해 필사적이다. 누구도 그런 식으로 사라질 이유는 없다. 특히 내가 사랑한 해미는 더 더욱 더. 비록 남산타워에 반사된 햇빛처럼 하루 한번 운이 좋아야 볼 수 있는 사랑이지만. 종수는 해미를 사랑한다. 몸과 마음으로 그녀를 원한다. 그래서 우물은 존재해야 한다. 우물 안을 들여다보면 해미가 있을 거야. 나를 기다리고 있어.
보일이를 안아들고, 엄마가 우물의 존재를 증명했을 때 해미도 실재하게 된다. 그래 해미는 있었어. 지금 없는 건 밴 때문이야. 종수는 마침내 밴을 밴할 근거를 얻게 된다. 밴은 원하는 바를 얻는다. 밴은 죽어가며 종수를 따뜻하게 안아준다. 두 개의 심장이 포개진다. 베이스의 울림을 느껴봐요.
정말 부끄럽지만 나도 버닝과 비슷한 소재의 시나리오를 쓰고 있다. 그러나 그 둘의 차이는 아들이 손으로 빚은 찰흙 덩어리와 미켈란젤로의 다비드상 만큼이나 크다. 부럽다는 생각이 들지 않을 정도로 까마득히 먼 차이다. 나는 그 사실을 받아들인다. 그리고 어쨌든 쓸 것이다. 달리 뭘 할 수 있겠는가.
2018.05.18 14:50
2018.05.19 18:42
그러네요. NHK 주도로 기획했다고 나오네요. 하루키가 이에 대해 뭔가 이야기를 들려주었으면 하지만... 욕심이겠죠.
2018.05.18 21:39
(영화에 대한 제 감상과 별개로)
아름다운 글입니다.
전 아무 것도 느낄 수 없었고
(밀양 때처럼 별 거 아닌 도시 길을 잡아내는 느낌은 너무나 좋았지만요.)
제 마음에 새로움의 강타 하나 없는 이 작품에, 칸에서 열광하는 평자들이 어디에 꽂힌 걸까 어리둥절해 하며, 내가 잘못 본 걸까 하고 있어요. 원작예습 안하는 게 나았을까 싶기도 하고.
전종서는 등장할 때마다 반갑고 기다려질 정도로 감독의 대단한 발굴이었어요. 스티븐 연이 연기 제일 좋았고요. 둘의 fresh함이란. 유아인은 아쉬웠어요.
2018.05.19 18:44
감사합니다. 전종서씨가 해질녘 춤을 추며 그대로 노을이 되어버리는 장면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무슨 유리가면 마야도 아니고 인간이 물성을 초월할 수도 있구나, 라는 걸 느끼니 경이로웠습니다. 홍경표 감독님은 짜증 좀 났겠지만... 한 달 들여서 찍으니 이 CG 세상에서 이런 울림을 주는 구나, 생각했습니다.
2018.05.21 01:15
유리가면 마얔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여전히 이 영화를 볼 생각은 없지만, 쓰신 글에 애정이 느껴져서 참 좋습니다. 배우 전종서는 그냥 존재감만으로도 무대폭풍급의 매력이 있나 보죠? 그게 제게 현재 유일하게 버닝을 볼까, 하는 지점입니다..
2018.05.19 12:33
2018.05.19 18:44
스포일러를 읽고 가셔서 어쩌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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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가 영화를 봤는가에 대한 질문과 관련되어 이 영화 자체가 이창동 개인의 프로젝트(쓰고보니 표현이 이상하네요 어차피 대형 영화인데 유명 감독이라도 개인이 할 수 있는 수준은 아니죠 암튼 이창동이 먼저 계획한) 가 아니고 일본에서 쿨재팬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하루키의 소설을 영화화할 사람을 찾았고 그 과정에서 이창동이 결정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그러니 아마 하루키도 영화를 이미 봤거나 앞으로 보게 되지 않을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