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발령과 비사격

2023.06.01 11:48

Sonny 조회 수:663

어제 재난 문자 오발령 사태를 보니 제 군대 시절이 생각나더군요. 다른 육군도 5분대기조라고 비슷한 훈련이 있던 걸로 아는데, 제가 있던 포병에서는 "비사격"이라는 훈련이 있었습니다. 실사격은 아니고 비사격이라고 해서 실제 전쟁 상황인것처럼 훈련을 하는거죠. 이게 중의적 의미를 가지고 있는데 하나는 정식 훈련에서 포를 안끌고 나가서 좌표를 맞추고 실제로 사격하는 것처럼 그 과정을 훈련하는 걸 비사격이라고 하고, 다른 하나는 부대 내에서 돌발상황을 설정해놓고 초동대응을 주어진 시간 안에 재빨리 하는 것입니다. 훈련 중의 비사격이야 실사격보다 나으니 (포를 쏘면 정말 시끄럽습니다. 그런데 너무 지겨워서 이상하게 잠이 옵니다....) 딱히 별 감정이 없는데 부대 내에서 비사격을 하는 건 진짜 짜증나는 일과였습니다. 이제 일과가 거의 끝나고 내무실에서 발 뻗고 그냥 쉬면 되는데, 갑자기 전쟁인 것처럼 후다닥 준비를 해서 나가야하니까요. 상황실 옆에 설치된 종을 땡땡땡 때리면 정해진 몇분 안에 각 인원들이 총기와 탄알띠를 챙겨입고 정해진 자리에 딱 위치해있어야 합니다. 그리고 저는 상황실 근무를 했었기에 일병 때까지는 종종 제가 저 종을 때려대곤 했습니다.


간부들이 비사격 훈련을 지시하면 그 때 제가 정해진 시간에 맞춰서 종을 때립니다. 이게 대략 오후 5시 30분에서 6시 사이에 이뤄지는데, 이 때가 딱 이제 쉬어볼까 하는 시간대라서 사람을 정말 환장하게 만듭니다. 6시까지는 마음 놓고 쉴 수가 없는거죠. 제가 이 종을 울리는 역할이라는 걸 아니까 어떤 선임들은 종종 저 시간대가 다가오면 오늘 비사격이 있는지 저에게 물어보곤 했습니다. 저는 결정권한이 없으니까 모르겠다고밖에 못하죠. 이게 순전히 간부들 변덕으로 돌아가는 거여서 별 다른 실효성을 못느꼈습니다. 그 당시 얼굴이 넙대대하고 희멀건한 군수장교는 이상할 정도로 에프엠을 챙겼는데, 이 인간은 꼭 비사격을 지시하곤 했습니다. 그럼 저는 또 종을 때리고... 사람들은 후다닥 총과 탄알집과 전투모를 착용하고 자리로 뛰어가고... 몇분간 대기... 그야말로 쌩코메디가 따로 없습니다. 종을 울리는 제 입장에서도 이걸 대체 왜 하는지 모르겠더군요. 훈련의 취지야 알겠지만 고된 일과 끝에 쉬려는 병사들을 이렇게 괴롭힐만한 의미가 있느냐고 한다면 아니요. 그냥 이걸 시키는 간부 뺨을 걷어올리고 싶기만 합니다. 쉴려고 체육복을 이미 입었는데 그 위에 탄알집 매고 군모 쓰고 있는 꼬라지들도 어처구니가 없고요. 나중에는 그 종소리가 너무 싫어졌습니다. 


긴장을 풀지 못한다는 것, 온전한 휴식을 취하지 못한다는 건 적지 않은 스트레스를 줍니다. 이 비사격이 나중에는 거의 없어져서 분기 행사처럼 되었는데, 초임간부들이었던 사람들도 어느 정도 적응하면서 병사들의 복지에 신경을 쓰고 이 비사격 자체가 나중에는 좀 잊혀져버렸습니다. 별 쓸데가 없으니까요. 제가 상황실 근무를 안하고 일찍 내무실로 내려가있을 때 비사격 종이 울리면 저도 후다닥 뛰어갔어야했는데, 제 옆에 있던 다른 병장이 저한테 나즈막히 말하곤 했죠. '이거 한다고 해서 과연 우리가 부대에 침입한 남파부대를 막을 수 있을까?ㅋ' 예전에 다른 부대의 특전사랑 합동훈련을 한 적이 있는데, 그 쪽은 침입군 역할이고 저희 부대원들은 수비군 역할이었답니다. 대대장실을 지켰어야했는데 특전사 쪽의 말도 안되게 빠른 병사 한명이 정말로 다 죽여버리고 대대장실을 너무 빠른 시간에 뚫어버려서 다들 벙쪘다고... 


어제 오발령 문자를 받고나서 간만에 비사격 생각이 났습니다. 오전 6시 40분에 신경질적인 알람으로 잠을 깨니 짜증이 솟구치더군요. 어떤 분들은 북괴가 미사일을 쐈는데 당연히 대피훈련을 해야하는 거 아니냐고 떠들지만, 북한이 유엔에도 이미 보고를 했고 남한쪽에서도 진작부터 알고 있었던 위성발사 계획을 가지고 이런 재난 문자를 보낼 거면 그냥 전국민 예비군 훈련이나 시키는 게 논리적으로 맞지 않나 생각을 했습니다. 어차피 이따위 짓거리를 해도 또 아무일도 없다는 듯이 출근하고, 일하고, 직장에서 월급갉아먹기 딴짓을 하는 건 뻔하구요. 미필 출신이 군통수권을 갖고 있어서 이런 건가 싶으니 짜증이 배로 났습니다. 아, 물론 전국민은 깨워놓고 정작 대통령인 윤씨는 NSC에 참석도 안했다죠? 문자는 보내놓고 또 오발령이라고 찍 갈기고 아무 일도 없던 것처럼... (심지어 그 문자를 또 재난 문자로 보내는 센스라니, 오세훈이 귓방망이를 그냥...) 만약 제가 실수로 비사격 종을 때려놓고 아이고~ 실수로 종을 울려부렀네요~~ 하면 부대원들이 저를 과연 어떻게 봤었을려나요? 어떤 고참들은 우리는 최전방에 있었으니 실수로 비사격 종을 울렸어도 불만을 가지면 안된다고 했었을려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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