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7.03 12:54
제 기준 크리스마스 영화 클래식 리스트에 오른 '클라우스' 이후로 오랜만에 넷플 오리지널 애니메이션에서 아주 훌륭한 작품이 나왔네요.
중세 판타지와 스타워즈틱한 SF를 짬뽕한듯한 세계를 무대로 억울한 누명을 쓰고 쫓기게 된 기사(리즈 아메드)가 자유자재로 변신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니모나(클로이 모레츠)와 콤비를 이뤄 여러 난관을 헤쳐간다는 내용입니다.
썼듯이 우리가 이미 비슷한 장르물에서 많이 봐왔던 디자인이라던가 그런 요소들을 많이 차용해왔고 독창성으로 승부하는 작품은 아닙니다. 대신 그런 익숙한 것들을 탄탄한 완성도의 애니메이션으로 아름답게 표현하며 쉴새없이 좋은 볼거리를 선사하고 니모나 캐릭터가 좋아하는 펑크락 계열의 삽입곡들과 어우러지는 신나는 스코어, 빵빵한 사운드 등으로 시청각적인 즐거움을 제공한다는 면에서는 거의 흠잡을 곳이 없네요.
출연진의 목소리 연기도 다들 전체적으로 잘 받쳐주는 가운데 사실상 클로이 모레츠의 원우먼쇼에 가까울 정도로 캐릭터에게 배우가 가지고 놀 재료들을 풍성하게 던져줬고 그걸 너무 잘 소화해냈습니다. 이 배우의 활기 넘치는 모습이야 '킥애스' 때부터 익숙합니다만 마치 데드풀의 라이언 레이놀즈를 연상시키는 쉴새없이 떠벌리는 이런 연기마저도 너무 안정적으로 자연스럽게 해내는 모습은 놀라웠네요.
그리고 가장 중요한 부분이라고도 할 수 있겠는데 최근 메인스트림 애니메이션 영화 중에서 LGBTQ+ 테마를 가장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최근 디즈니 or 픽사에서 나름 이걸 다루고 있다고 마케팅 과정에서 입은 털어놓고 실제 작품을 보면 엄청 소심하게 툭 건드리고 마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데 여기서는 일단 리즈 아메드가 연기하는 주인공 캐릭터가 퀴어라고 처음부터 대놓고 나오며 니모나 캐릭터에 관해서도 굉장히 다양한 해석의 여지가 존재합니다.
전체관람가 영화니까 당연히 수위가 높다거나 할만한 건 전혀 없습니다만 아주 살짝 암시하는 것에 그칠 정도인 '버즈 라이트이어'나 '스트레인지 월드'를 애들 좀 보여줬다고 난리를 치는 부모들이 있는 세상이니 이런 주제를 다루는 자체가 금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에게는 권할 수가 없겠네요. 그런 편견 없으시다면 강추입니다.
2023.07.03 14:16
2023.07.03 14:42
이런 흐름이 있었군요. 한 번 보기는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잘 읽었습니다. (이 이야기를 읽고 떠오른 영화는 [배트걸]인데 이 쪽은 아마 어디서도 다시 볼 수 없겠죠? ...) 저는 넷플릭스 오리지널, 이란 말이 넷플릭스에서만 볼 수 있다는 뜻 정도로 알았는데 그런 고려도 필요하군요.
2023.07.03 15:14
네, [배트걸]의 자세한 진상은 워너브라더스 디스커버리의 악명 높은 현 CEO 데이비드 자슬라브와 DC의 수장들을 비롯한 고위 관계자들과 회계사들만이 알겠습니다만, 극장 개봉을 위해 추가 비용을 들여서 수익을 창출하거나 심지어 MAX에 스트리밍으로만 풀어서 구독자 수를 유치하는 것보다도 영화를 아예 묻어 버려 세금 감면 혜택을 받는 편이 경제적으로 더 이득이라는 판단 하에 한 일이라는 추측이 거의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그 경우 나중에라도 영화를 공개했다가는 탈세 행위로 저촉될 수 있나 보더라고요.
그쵸, "넷플릭스 오리지널"은 실제로는 딱 말씀하신 그런 정도의 의미를 갖고 있는데, 저는 그럴 거면 넷플릭스 독점(Exclusive)이 더 정확한 표현이라고 보거든요. 거창하게 "오리지널"이라는 표현을 내세우고 홍보 과정에서도 다른 창작 주체는 싹 모른 척하고 넷플릭스 로고만 띄우니까 마치 이것도 저것도 다 하나부터 열까지 넷플릭스에서 주도해서 완성한 작품이라는 인식이 강해지는 것 같아서 부당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2023.07.03 16:47
아직 제작 관련 정보들을 검색해보기 전에 그냥 리뷰만 보고 감상하고 글을 올렸는데 이런 뒷사정이 있었다니 참 재밌네요.
저도 넷플이 제작에는 전혀 관여하지 않은 작품들을 배급권만 사왔는데 그냥 '오리지널'로 표기하는 것은 좀 양심이 없는 것 아닌가 싶습니다. ㅋㅋㅋ
2023.07.03 18:30
2023.07.03 22:04
가뭄에 콩나듯 하지만 이렇게 훌륭한 작품 하나 가끔 걸리는 맛이 넷플 구독하는 재미죠. ㅎㅎ 개인적으로 본문에 언급한 클라우스랑 내 몸이 사라졌다, 미첼 가족 vs 기계?를 제일 재밌게 본 것 같습니다.
2023.07.03 20:41
그림체와 제 취향상 전혀 볼 일이 없는 작품 같은데 이렇게 평을 먼저 접하고 나니 호기심이 생기네요. 클로이 모레츠도 좋구요. ㅋㅋ 찜해뒀다가 언젠가(...) 꼭 보겠어요!
2023.07.03 22:06
2.5D라고 불리는 이 기법이 요즘 애니메이션 영화 대세가 되고있는 분위기라고 하더라구요. 스파이더버스 시리즈도 이런 느낌..
영화는 정말 재밌습니다. 클로이 모레츠의 에너지가 목소리 연기에서 팍팍 느껴지고 눈과 귀도 호강하구요. 아이들이랑 같이 보셔도 좋을 것 같아요.
2023.07.04 09:10
2023.07.04 10:50
투톱 주인공 중 한명이 대놓고 동성애자라는 점에서 이미 다른 주류 애니메이션 영화들을 다 앞서갔고 그 외에 또 다른 주제에 대해서도 굉장히 과감하게 다루고 있습니다.
"최근 메인스트림 애니메이션 영화 중에서 LGBTQ+ 테마를 가장 비중있게 다루고 있는 작품이기도 합니다. 최근 디즈니 or 픽사에서 나름 이걸 다루고 있다고 마케팅 과정에서 입은 털어놓고 실제 작품을 보면 엄청 소심하게 툭 건드리고 마는 정도에 그치고 있는데"
라고 말씀하신 부분이 정곡을 찌르는 게, 애초에 2015년에 20세기폭스의 자회사인 블루 스카이 스튜디오에서 2020년 개봉을 목표로 만들기 시작했던 작품인데, 2019년에 디즈니가 폭스를 인수한 뒤 일정이 밀리기 시작하더니 2021년에 디즈니에서 블루 스카이 스튜디오의 문을 닫아 버리면서 아예 취소했어요. 취소 직전까지 제작은 순조롭게 진행되어 완성을 눈앞에 두고 있었는데도 말이죠. 이후 2022년 초 플로리다주에서 "Don't Say Gay" 법안을 통과시켰을 때 플로리다주에 정치 자금을 대고 있던 디즈니 측에서 반대 성명이 나오지 않자 디즈니 직원들이 파업하는 일이 있었는데, 그때 전 블루 스카이 스튜디오 직원들이 [니모나]가 취소된 것은 디즈니 경영진이 LGBTQ+ 주제, 특히 동성 간의 키스를 탐탁치 않게 여겼기 때문이라고 밝혔더랬습니다.
이렇게 사라질 뻔한 기획을 되살려 좋은 성과를 낸 주체들에게 공을 돌리자는 취지에서 짚어 두자면, 취소 당한 [니모나] 프로젝트를 인수한 것은 제작사 안나푸르나 픽처스이고, DNEG 애니메이션이라는 곳에서 블루 스카이 스튜디오의 작업물을 바탕으로 작품을 완성했습니다. 넷플릭스는 배급사고요. 물론 넷플릭스 자금이 들어가기는 했을 테고, 그 덕분에 완성할 수 있었겠지만, 저는 그래도 작품을 기획하고 제작한 주체가 엄연히 따로 있는데 넷플릭스가 돈을 대고 배급했다는 이유만으로 "넷플릭스 오리지널"이라는 명칭을 가져가는 관행을 좀 못마땅하게 여기는지라 언급해 보았습니다. (보통은 "A Netflix Distribution"이라고 써야 할 곳에 "A Netflix Film"이나 "A Netflix Original"이라고 쓰고 대대적으로 홍보함으로써 공을 전부 가로채는 느낌이 든달까요. 위 예고편에서도 안나푸르나 픽처스 언급은 전혀 없네요.)
참고로 원작은 ND 스티븐슨이라는 만화가가 고등학교 때 창작했던 캐릭터를 대학 재학 중에 되살려서 텀블러에 연재하며 인기를 얻은 끝에 아예 졸업 작품으로도 제출한 동명의 만화로, 한국에도 [니모나]라는 제목으로 이미 2020년에 번역 출간되었습니다. 웹에서 유명세를 얻었던 작품이라서 오다가다 보신 분들이 계실지도 모르겠네요. 단권이니까 애니메이션이 마음에 드셨다면 원작도 한 번 읽어 보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