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6.21 11:00
건강 문제로 술을 끊는다고 하니, 술 때문에 건강 문제가 있었던
것 같이 들리네요.
하지만 제가 술을 끊은 이유는 알코홀과 카페인 같은 자극제들이 수면에 영향을 미치는데 그 결과 심각한 두통이 생겨서 그럽니다.
젊고 건강하던 시절에는 술이나 커피를 한 두잔 마신다고 잠을 설치지 않는 것은 물론이고, 회사 회식 같은 자리에서는 술 권하는 사회 분위기상 과음씩이나 했던 적도 있는데요. 저랑 알코홀은 원래 그리 돈독한 사이는 아닙니다.
막상 술을 끊으려고 보니 아쉬운 것은 술의 맛이나 술김에 사람들과 어울리는 즐거운 분위기가 아니라 뭔가 인생에 낭만이 사라진 것 같은 아쉬움입니다.
어려서부터 소설을 좋아했던 저는 성인이 되어 술을 마실 수 있기 전에 술에 대한 묘사들을 많이 읽었는데요. 어린이에게 책들에 등장하는 술은 흥미진진하고 신기한 무엇이었어요. 이전에 게시판에서 <보물섬>에 나온 럼주 묘사를 읽고 뭔지 궁금했다는 이야기가 있었는데요. 제가 어렸을 때도 있던 맥주나 포도주, 막걸리, 소주 말고 양주나 칵테일들-럼주, 위스키, 보드카, 마티니, 진토닉, 맨하튼, 토디, 민트 줄렙 같은 이름은 다 책에서 먼저 보았거든요.
<보물섬> 해적들이 들이키는 럼주나 도프토예프스키 등장인물들 손에서 떨어지지 않는 보드카, 터프한 남자주인공이 탐정사무소를 운영하면서 서랍에 숨겨두고 마시는 위스키 같은 글을 읽으며 얼마나 궁금했는지 몰라요.
그러나 문학과 현실은 다른 법, 실제로 술을 마실 수 있는 나이가 되어 입에 댄 맥주는 보리 맛 음료일 뿐이고, 포도주는 정말 무슨 맛인지 정말 모르겠고, 소주는….무슨 화학 약품을 물에 타서 먹는 것처럼 끔찍한 맛이었습니다.
보드카는 소주와 비슷한 이상한 맛이고 위스키는… 역시 무슨 맛인지 모르겠어요.
하지만 술에 대한 예찬이 다 거짓말은 아니라서, 가족과 와이너리 여행을 가서 그나마 내 입맛에 맞는 포도주를 찾을 수 있었고요. (저는 백포도주파, 백포도주는 리즐링!)
맥주맛을 모르기는 해도 기네스 흑맥주가 개중 입맛에 맞는 다는 걸 알게 되었습니다.
양주는 너무 독해서 별루지만 칵테일은 재미있고 다양했고요.
그래서 제가 점차 깨닫게 된 것은 달달한 칵테일이 제 취향이라는 거였고요. 특히 사탕수수가 원재료인 럼과 달콤한 커피 리큐르인 칼루아 칵테일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칵테일이라고 하면 바텐더가 만드는 어려운 음료를 생각하기 쉽지만, 콜라에 럼을 타거나 우유에 칼루아를 넣는 수준으로 집에서도 만들어 먹을 수 있었고요.
여러가지 실험을 하면서 아이스크림에 럼을 뿌려먹으면 풍미가 더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예전 패밀리 레스토랑의 아이스크림 디저트에 럼이 들어 있었구나!)
애초에 그렇게 술과 가까운 사이도 아니니 떠나보내는 것이 아쉽지 않을 줄 알았는데 이렇게 인생의 즐거움 중 하나와 이별한다니 아쉽습니다.
아직 현재 진행형인 카페인과 이별(디카페인;;;;)과 달리 알코홀은 이제 영영 안녕이네요.
얼마전 유럽 여행을 갔을 때 메뉴에 무알콜 샴페인이 있기에 이게 대안이 될까 시켜보았는데 맛을 그럴듯한데 마시고 나니 머리가 좀 무겁습니다. 알코홀이 없어도 뭔가 인체에 영향을 끼치는 요소가 있나봐요.
요즘 많이 보이는 무알콜 맥주는 애초에 맥주를 안좋아해서 관심이 없고요.
적포도주는 별로지만 전혜린 수필에서 처음 접했던 글뤼바인을 좋아하는데 겨울이 되면 무알콜 뱅쇼를 시도해봐야 하나 싶네요.
2023.06.21 12:56
2023.06.21 13:09
저도 술과 슬슬 이별하는 중입니다. 그렇게 찐하게(?) 만난 적도 없지만 제가 술을 마시고 별로 즐겁지가 않다는 걸 깨달은 뒤부터는 남들이 술을 권해도 그냥 홀짝이는 정도에요. 소주는 정말 최악입니다. 맥주도 그 보리의 비린 향이 너무 싫습니다. 저도 ally님처럼 칵테일 달다구리한 걸 아주 가끔 마시는 정도인데 최근에는 저것도 좀 덜 찾게 되더라구요. 참으로 좋은 이별 아니겠습니까.
저는 늘 압생트에 관한 판타지가 있었는데 바텐더 계정들이나 술 좋아하는 사람들이 그렇게 환상적인 술은 전혀 아니라고 하더군요. 그래도 언젠가는 한번 먹어보고 싶습니다.
2023.06.21 20:00
술은 사실상 끊은지 한참 됐네요.
대학생 때 친구들과 어울리느라 억지로 열심히 마셔대긴 했는데, 그리고 취업하고도 몇 년간 회식 때문에 빡세게 마셨는데 그게 다 제 의지가 아니었다 보니 이제 남 눈치 때문에 마시지 않아도 될 시국이 되니 미련 없이 그냥 끊어지더라구요. 원래 알콜이 조금만 들어가도 몸에서 엄청난 열을 뿜어대는 체질이라 가아끔 '조금 마셔볼까?' 하다가도 금방 포기하구요. ㅋㅋ
그래도 조금씩 맛을 즐기며 마시는 애주가들 보면 부럽기도 합니다. 그것도 삶의 즐거움이니까요.
2023.06.22 00:55
그정도라면 끊으셔야겠네요. 다른 분들께는 레이먼드 챈들러의 <영원한 이별>에 나오는 칵테일인 '김릿' 추천드리고요
무알콜 와인이라면 핀란드 카스케인 글로기 700ml : H365 (naver.com) 이것도 좋아요.
2023.06.23 13:37
에드몽 당테스가 바다로 던져진 다음 오랜 버티기 끝에 밀수선에 구조되어 처음 입에 댄 음식이 바로 럼주. 목구멍에 흘러들어간 럼주로 의식을 회복합니다. ㅎ 최근에 읽은 부분이라.
저는 소설 속의 술, 하면 러시아 소설의 보드카와 더불어 '개선문'이 항상 떠올라요. 주인공들이 마시던 칼바도스. 개선문 다시 읽고 싶네요.
저도 한 때 가까웠지만 이제는 한여름의 시원한 맥주 정도만 가끔 땡길 뿐이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