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셔널 갤러리 전 다녀왔습니다

2023.06.19 16:07

Sonny 조회 수:342

방학이 시작되면 학생들 포함한 가족 단위의 관람객 습격이 시작된다고 해서 부리나케 보고 왔습니다. 얼리버드로 티켓을 구매해서 이 날짜로 예약을 해둔 게 참 다행이더군요. 이전에 이집트 전시회를 가려고 했다가 가족 단위의 관람객이 너무너무 많아서 아예 관람을 포기한 적이 있거든요. 번호표를 받아서 차례대로 들어가는데도 처음에는 사람이 굉장히 많다고 느꼈습니다. 


이 날 전시회는 제게 독특한 감흥을 줬습니다. 어떤 그림이 단순히 좋다 안좋다의 느낌이 아니라, 제가 어떤 그림을 좋아하는지 저 나름의 시대적 기준을 찾았습니다. 고전적 그림들을 보면서는 별 감흥을 못느끼다가 슬슬 19세기에 가까워질 때쯤 그 때 나온 그림들을 즐겁게 볼 수 있었습니다. 아마 제 안에는 인상파의 작품들이 회화의 아름다움을 판별하는 가장 기본적인 기준으로 자리잡고 있던 것 같습니다. 사실 현대 사람들이 미술이라고 하면 가장 많이 접하고 또 미디어나 다른 곳에서 많이 노출이 되는 게 인상파의 작품이니 저라고 그 영향에서 자유로울 순 없겠지요. 그래서 인상파의 무엇이 고전에는 없길래 제가 그 아름다움을 못느끼는지, 혹은 그런 부분을 어떻게 봐야할지 전시회에서 계속 생각을 해보게 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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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파엘로가 그린 [성 모자와 세례 요한] 이란 작품입니다. 라파엘로 특유의 온화한 표정들을 실물로 보니 재미있더군요. 이런 종류의 그림을 보면서 이상하게도 강박을 느꼈습니다. 삼각형 구도 안에서 안정 혹은 균형을 꾀하려는 그림 자체의 정교함이라고나 할까요. 그래서 그림이 수학적 기호처럼 느껴졌습니다. 인물들의 사연이 아니라 인물과 사물들이 채워지면서 완성된 구도 자체가 완벽주의적인 인상을 주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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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반니 바티스타 모로니의 [여인]이라는 작품입니다. 부담스러운 정도를 넘어서서 그 존재감에 숨이 막히는 것 같은 느낌을 그림에서 처음으로 받았습니다. 색감도 색감이거니와 어느 한 구석도 비어보이는 느낌 없이 그림의 모델이 되는 사람의 존재감을 이렇게 강렬히 담아낼 수 있다는 게 신기하더군요. 한마디로 엄청나게 자기과시적인 그림이었습니다. 물론 그것만으로 이 그림의 예술적 가치를 평가할 수는 없습니다. 왜냐하면 자기과시가 이 초상화의 가장 근본적인 목적이었을 테니까요. 아마 의뢰인은 이 결과물을 좋아했을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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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마스 로렌스의 [찰스 윌리엄 랜튼]은 이번 전시회에서 제가 제일 크게 반했던 작품입니다. 전시회에 입장하기 전에 이 그림을 배경으로 전시회 타이틀이 크게 걸려있었는데, 어디서 많이 본 그림이다 싶어 검색해보니 제가 제 개인 블로그에 이미 포스팅을 한 그림이더군요. 그 때 작은 화면으로 보고도 되게 예쁘다고 생각했던 작품인데 실물로 직접 보니 모니터로 보는 것과는 비교할 수 없었습니다. 아이는 너무나 잘생겼고 그림 전체에는 우아한 분위기가 맴돕니다. 특히나 이 전시회에서 앞에 걸려있던 초상화들이 대단히 권위적이고 보는 사람을 주눅들게 하는 느낌이 있었다면 이 그림은 아도니스처럼 아름다움을 뽐내는 느낌이 있어서 좋았다고 할까요. 이 그림의 모델인 소년은 결핵으로 일찍 죽었다고 하니 안타깝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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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전시회에는 윌리엄 터너의 그림도 와있어서 놀랐습니다. 파일의 크기가 작아서 원본의 그 신비로움을 다 전달하지 못하는 게 아쉽군요. [헤로와 레안드로스의 이별]이라는 작품인데, 그 설화를 제가 잘 몰라서 내용을 온전히 이해하지는 못했습니다. 다만 터너 특유의 신비하면서도 화려한 대기의 표현이 이 그림의 신화적 느낌을 만들어내는 게 참 절묘했습니다. 세상이 뭔가 심상치않게 돌아가면서도 어떤 비밀이 대기 안에서 감춰져있는 느낌이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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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상파 섹션에서 고흐나 고갱 등 슈퍼스타들의 그림을 볼 수 있어서 좋았습니다. 그렇지만 장 바티스트 카미유 코로가 그린 [기울어진 나무]이 유난히 기억에 남았습니다. 그저 풍경화이지만 나뭇잎의 방향이나 금방이라도 쓰러질 것 같은 나무의 각도가 보는 사람을 긴장시키고 위태롭게 만들고 있었으니까요. 풍경화에도 이렇게 정념이 담길 수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이 전시회에서 제가 가장 마음이 동했던 작품입니다. 눈에 비치는 정경을 어떻게 표현하느냐에 따라서 사람의 감정이 이렇게까지 투영될 수 있다는 게 신기했습니다.


이번 전시회는 유명 작가들의 그림들이 많이 걸려있어서 좋았습니다. 시대적으로 그림들의 변천사를 볼 수 있는 것도 좋았습니다. 르네상스 시대의 그림들은 뭔가 귀족적이고 지배계급의 입김이 너무 녹아있어서 보는 내내 자유롭지 못한 기분으로 감상을 했습니다. 보면 볼 수록 이런 외부조건들은 좀 떨치고 볼 수 있겠죠. 초상화가 점점 입체적으로 표현되는 것도 신기했습니다. 요즘 타나토스를 다룬 현대 미술(데미안 허스트 같은...)에 관심이 쏠려있는데 그런 기분으로 신성한 고전과 인상파를 보니 또 다른 감상을 얻을 수 있어서 좋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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