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20 13:34
The Banshees of Inisherin, 2022
스포일러가 될까요. 세부 내용은 없고 감상 위주지만 감상 자체가 스포일러일 수도 있습니다.
아일랜드라고 하지만 가상의 공간입니다.
저는 보면서 상하수 처리는 어떻게 하고 사나 생각했는데 그런 생각은 불필요한 듯. 지금으로부터 백 년전인 1923년이라고 딱 시간대가 명시되나 생활비 조달(특히 콜름은 뭐해서 먹고 사나 모르겠어요) 비롯하여 상하수 처리나 가재도구에서 사극의 구체적인 사실성(더러움 기타 등등)을 기대해선 안 되는 거 같습니다.
아일랜드의 저 시기 풍광과 펍 문화, 시골의 폐쇄성 등은 그대로지만 역사적 고증에 신경을 쓴 거 같진 않습니다.
강 건너처럼 가깝게 자리잡은 바다 너머의 본토에서 내전을 치루는 것이 빤히 보입니다. 이 이야기에서 내전은 아마도 파우릭과 콜름 두 사람의 다툼과 연결된 무엇이 있겠지만 저는 아일랜드 역사에 무지하고 이 영화를 그쪽의 상징으로 감상하고 싶진...감상하지 않으려고 결정했습니다(?)
중심 인물들이 다 결혼하지 않았어요. 다른 가족이 이 이야기에는 필요없으니까요. 그런데 다 큰 남매가 아니 컸다라기 보다 콜린 파렐을 보면 늙어가는 남매라고 해야할 판인데 좁은 침실에 침대를 나란히 놓고, 잠자리만 보면 마치 유년의 남매같이 생활합니다. 파우릭이 어디가 모자란 사람이라면 몰라도(그러면 돌봐야 하니까요) 이건 좀 이상했습니다.
이 영화의 이니셰린이란 작은 섬은 일종의 상징적 장소, 관념적 사고 실험을 위한 장소라는 생각이 듭니다.
외딴 섬이자 산간 벽지이지만 인간 관계로만 보면 있을 건 다 갖추었습니다. 구성원이 얼마 안 되는 곳은 이런 게 훨씬 두드러지잖습니까. 소박함(순진함, 무지함)과 추악함과 비겁함과 경박함. 이런 것들이 굳은살이 된 지루함!
콜름은 이런 것이 싫다고 하는데, 하지만 이런 것이 싫어 죽을 지경이면 어떤 인물의 선택대로 정말 죽는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어요. 인간의 조건으로 태어난 다음엔 살아가려면 어쩔 수 없지 않을까요. 자신의 내부에도 이런 것이 골고루 있지 않습니까. 어느 정도 참을 수 있는가의 문제이긴 한데 콜름의 경우엔 하루아침에 견딜 수 없이, 죽을만큼 싫어졌나 봅니다. 그 대상이 특정인에게 집중되니 너무 폭력적이 됩니다. 파우릭은 단순히 한 친구와 더 이상 교제하지 않게 된 것이 아니고 존재를 부정당하는 것이 됩니다.
콜름처럼 몸담고 있는 현실에서 비틀고 나가려면 어떤 식이든 뜯겨나가는 부분의 고통은 따르지만, 이 문제를 해결하자면 폭력의 사용 이외엔 방법이 없는 것인지. 인간이 어떻게 폭력에 의지하게 되는지 생각하게 합니다.
좀 다른 얘기인데, 절교 해 보시거나 당해 보셨나요? 그냥 서서히 소원해진 것이 아니고 직간접으로 '절교'가 언급이 되는 상황을 겪어 보셨는지요. 청소년기에 저는 비슷한 경험이 있습니다. 이런 생각도 해 봤습니다. 저 정도는 아니지만 우정이든 사랑이든 인간이 남과 갖는 깊은 관계에서 알게 모르게 나의 이익을 따져 보고 경계를 만든다는 거요. 나보다 지성이나 유복함에서 오는 경험이 호기심과 매력을 유발하지 못하고 그런 면들이 나보다 못하다는 것을 안 이후에 내 시간을 투자할 이유가 있는지 의식이든 무의식이든 계산하게 된다는 거요. 깊은 관계만 그런 것도 아니고 생판 얼굴도 실제 인격도 모르는 게시판에서조차 우리는 누구와 더 말을 나누고 싶어지는가 그런 것이 있지 않습니까.
모든 것은 '어느 정도인가'의 문제가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는 이런 불편부당함을 다 안고 감수하고 살고 있습니다. 이것이 대놓고 당연하다는 말은 당연히 아니지만요.
기억이 생생할 때 몇 자 써 보려고 시작했는데 두서가 없고 너무 설익은 생각들뿐이라 나중에 다시 볼 일이 있으면 다시 생각해 보고 싶네요.
배우들 연기가 넘 좋아요. 특히 콜린 파렐은 본 중 최고였어요. 케리 콘돈, 브랜든 글리슨, 배리 캐오간 모두 좋습니다. 또 보고 싶네요.
콜린 파렐의 인상적인 눈썹이 이 영화에서 특히 활약을 잘 하고 있습니다.
아래 사진들을 통찰없는 글 대신 마구 올려 보아요. 파우릭과 그의 세계를 이루고 있는 주요인물들입니다.
2023.03.20 15:02
2023.03.20 16:32
한 방에서, 바로 옆에 나란히 놓인 침대에서 자는 건 넘 이상했어요. 무슨 의미가 있는 것인지, 저 지역엔 과거에 그런 생활이 자연스러웠는지 알 수가 없네요.
두 사람에게 대화의 여지가 없어서 결국 떠나는 선택을 한 거 같아요. 이 사건이 아니라도 떠나는 게 맞는데 콜름이 결심을 도와 줬네요.
2023.03.20 17:04
파드릭이라는 대충 보면 크게 해가 될 일도 안하고 'nice'한 사람이 얼마나 친구를 지치게 할 수 있는지는 보다보면 이해가 되더라구요. 하지만 콜름도 그걸 혼자 속으로만 삼키다가 어느날 갑자기 바로 절교하는 식으로 대응하면 제대로 될 리가 없죠. 억지로 떼어놓겠다고 자기한테 말걸면 ~~하겠다는 것도 그렇고 똥고집에 커뮤니케이션에 문제가 많은 사람 같았어요. 아일랜드 내전과의 비유는 솔직히 저도 정확히는 알 수 없지만 이렇게 그동안 곪아왔던 문제가 어느 시점에 터져서 점점 절대 화해가 불가능한 수준까지 가는 두 주인공의 관계에 빗대는 것이 아닐까 생각을 해봤어요.
주인공 둘 보다는 시오반과 도미닉 캐릭터에게 마음이 많이 가더군요. 각자 다른 방식으로 이 섬 안에서도 더욱 고립되고 외로운 인물들로 보여서요. 다 큰 남매가 같은 방에서 자는 건 저는 별로 이상하게 생각을 못했는데 thoma님 글을 보니 사실은 이상한 게 맞네요. 어린시절부터 이 섬과 집에서 쭉 벗어날 수 없는 처지를 더 강화해주는 것 같기도 해요. 파드릭처럼 그냥 그런 생활이 만족스러운 사람도 있겠지만요.
2023.03.20 20:04
파우릭과 콜름 경우는 일상에 머문 평범 지루한 사람과 예술가가 되려는 사람으로 표현되는데 도미닉까지 포함하면 다됐고 그냥 계산적인 인간의 관계 맺기를 보여 주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도미닉은 남매에게도 제대로 된 인간 대접을 받지 못했고 집이 지옥인 상황. 말씀대로 중심 인물 둘의 떠들썩한 갈등과 소동에 가려 있는 가장 소외된 인물이었네요. 보기와 달리 파우릭 보다 나은 사람이었을지도 모르겠어요.
2023.03.20 20:25
상식적으로 콜름은 그냥 떠나면 됐습니다. 그럴 조건도 됐을 거예요. 그러지 못했던 건 역시 사람이 뒤틀렸기 때문이겠지요.
2023.03.20 20:41
그...그러면 영화가 되겠습니까;;
2023.03.20 22:10
2023.03.21 09:31
콜린 파렐이 다정하게 굴면 극단적인 행동을 하고 후반부에 난폭해질수록 흐뭇해하는 느낌이 있어요. 지루함이 가셨나 봅니다.
2023.03.20 22:52
영화는 안 봐서 할 말이 없지만, 콜린 패럴은 헐리웃에서 액션 스타 도전에 성공하지 못한 배우 치고는 그래도 알차게 커리어 이어가는 것 같아서 보고 있으면 괜히 흐뭇합니다. 참 잘 생겼는데 묘하게 이 감독님 영화에 나와서 저런 표정 짓고 있는 게 또 되게 잘 어울리고 그래요. ㅋㅋㅋ
2023.03.21 09:33
저도 점점 좋아지는 배우 중 한 명입니다. 눈썹을 팔자로 만들어 울상을 짓는 것도 보기 좋고요.ㅎ
다 큰 남매가 한방에서 생활하는 건 정말 이상하긴 했습니다. 부모님이 일찍 돌아가신 다음에 남매의 삶이 유년기 그대로 멈춰 있다는 인상이었고요. 그나마 머리가 깨인 누이(실제 배우나이로 보았을 때는 여동생이어야 하지만 행동하는 걸 보면 누나 같기도 합니다)가 이 답답한 남자들에게 좀 더 쓴소리를 해 주기를 바랬는데, 다시 생각해보니 똑똑한 누이가 현명한 선택을 하는 바람에 이 아사리판을 피했던 거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