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4.03.20 03:23
다들 말씀하시는 기능적으로 촘촘히 잘 짜여진 각본이나 서정적인 연출, 섬세한 연기 외에도 '밀회'에 제가 열광하는 지점은 바로 디테일이예요.
사실 채널을 돌라다가 우연히 본 한 장면이 이 드라마에 완전 꽂히게 된 계기가 되었습니다.
서영우(김혜은 분)가 자기 마음에 안든다고 김희애 남편에게 양주를 뿌리고 (여기까지는 평범) 티슈를 한장 쓱 뽑아 던지는 장면이었죠.
이 디테일에서 저는 느꼈드랬죠. '헐 ㅋ 이 드라마 본방사수요 ㅋ'
양주를 뿌리는 것으로 자유분방 제 멋대로인 싸가지 부유층 자제 +
티슈를 한장 쓱 뽑아 던지는 것으로 잘 교육받고 자랐으며 (김용건이 분한 아버지같은 철저한 비지니스맨 캐릭터 밑에서 자란 딸이라고 생각하고 보면 더 그럴싸한 행동) 남자를 다룰 줄 아는 여성이 확 느낌으로 다가오는 씬이었어요.
한편 맥락을 알고보니 김희애 남편이 이 관계에서 얼마나 을의 위치에 있으며 평생 호구잡혀 살아왔는지도 짐작이가더군요.
그렇게 1화부터 정주행(?)하니 정말 충격적이더군요.
초반부에 김희애가 깜빡잊고 스커트를 입고 오지 않은 씬은 정말 최고입니다.(일단 펜슬스커트에 대한 제 페티쉬를 자극^^;)
안에 이너스커트를 입는 고전적이고 단정한 오피스 레이디임을 보여주면서도 겉옷을 깜빡 잊고 올정도로 어딘가 맹탕인 구석이 있는 귀여운 사람임을 보여주죠.
특히 그 대목에서 김희애 캐릭터의 반응은 호탕하면서 센스있게 느껴지고
후에 비서가 사온 스커트를 입다가 문이 열리자 화들짝 놀라는 장면에서는 여성스럽고 사랑스러운 느낌이 들죠.
2화를 보면 김희애가 유아인에게 몇가지를 묻다가 '그래도 어떻게 집에(...)피아노가 있었네'라는 대사를 하면서 중간에 약간 뜸을 들입니다.
현실에서 우리가 저런 말을 할때 뱉으면서 혹시 이것이 실례가 되는 말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문뜩 들어 뜸을 들이는 것처럼요.
이를 통해 캐릭터가 신중하고 배려심이 있는 성품을 갖고 있다는걸 짧은 순간에 보여주는 듯 합니다.
2화 마지막 즈음에서 김희애가 유아인의 집에 방문했을 때 하는 대사들도 끝내줍니다.
'이선재 뭐가 이렇게 아프니? 발바닥이 막 타는 것 같다' '안괜찮은데 너무 웃겨'라니요!
상대가 기분나쁘지 않도록 애교스럽게 말하면서도 정확히 자신의 상태를 전달하죠. 과연 괴팍한 사모님들을 상대해온 관록이 돋보이는 화술입니다.
이 캐릭터가 사람을 대하는 법은 항상 이런 영리한 방식입니다. 아무리 곤란한 상황에도 막연한 짜증을 낸다거나 속내를 숨기며 괜찮다고 손사래를 치는 법이 없어요.
한국의 영화, 드라마에서 이렇게 똑똑하게 처신하고 이해가 가는 캐릭터는 최근 본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런 디테일들로 쌓아올려진 김희애의 캐릭터는 정말 아름다워요. 그러니 (거의 초현실적인) 그녀가 마흔살이라도 20대든 30대든 반할 것같다는 설득력이 충분하죠.
2화에서 유아인이 기분이 한껏 좋아져 엄마와 여자친구를 안아주며 사랑한다고 이야기하는 씬도 너무 마음에 들어요.
그저그런 트렌디 드라마였다면 유아인, 그러니까 남자 주인공은 절대 현재의 허울뿐인 여자친구에게 사랑한다고 하지 않았을 겁니다.
남자주인공은 여자주인공만을 (제일) 사랑하고 다른 과거나 미래는 허락되지 않으니까요.
거기다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데 어쩌다 엮인 여자친구라면? 대부분 계속 거부하고 절대 정을 붙이는 시늉조차 하지 않아요.
후에 시청자들기 보기에 '나쁜놈'이 될만한 요소를 제거하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 드라마에서 유아인은 이성적으로 별로 좋아하지도 않는 여자친구에게 사랑한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평범한 스무살 남자애이기 때문이죠. 아마 스무살 무렵 별로 좋아하지는 않지만 어쩌다 생긴 여자친구에게 그냥 저냥 사랑한다고 하는 남자애들은 많을겁니다. 이게 현실적인거죠.
사실 그 나이때 사랑의 열병을 알기에는 우리 대부분은 너무도 가혹한 입시의 굴레에 놓여있었지 않습니까?(유아인 캐릭터의 경우에는 생계)
게다가 두 사람은 오랜시간동안 친구였습니다. 사랑이 뭔지는 몰라도 인간적으로 너무 좋아하는 사람에게 기분이 좋아 의미없이 사랑한다는 말을 할수도 있는 것은 당연합니다.
이 부분에서 유아인 캐릭터의 나이대와 천진함이 드러나더군요.
김용건이 맡은 재벌 회장님 캐릭터도 좋습니다. 그 정도의 부를 쌓아올린 중년의 남성은 절대 순진하지 않죠. 품위를 유지하면서도 어딘가 음흉하고 뒤로는 계산적인 면이 있어야합니다.
대놓고 음모를 꾸미다 발각되거나 '뭬야!'하고 소리만 버럭버럭 지르다 뒷목잡고 쓰러지는-_- 회장님들만 보다 한결 현실적인 회장님 캐릭터를 보니 반갑기 그지없습니다.
(심지어 최근작 별그대에서 자식의 악행에 참회의 눈물 흘리고 전 재산을 사회에 환원하는-_- 재벌회장이란 기이한 판타지를 보고나니 더더욱)
앞으로 클래식 마피아나 음대 입시 카르텔을 풀어가며 나올 예정인 악당역의 캐릭터들도 기대가 됩니다.
이것저것 제가 더 조잘대기에는 너무 많은 디테일이 숨어있는 드라마입니다. 간만에 정말 '웰메이드'라 불릴만한 한국 드라마가 나온것같아요.
듀게 여러분이 가장 좋았던 이 드라마의 디테일은 무엇인가요? 궁금하네요^^
2014.03.20 04:15
2014.03.20 04:50
우와 되게 면박주는 댓글이네요 간만에 재미있는 드라마를 만나 신나서 길게 늘어놓은 윗 글이 무안해지는 순간^^;
아미고님께서 기능이 좋아 삼성 갤럭시 노트 사셔서 잘 쓰시고 계신것처럼 삼성계열 종편도 좋은 컨텐트를 내놓으면 본방사수, 웰메이드 소리 들을 수 있는것 아닐까요?
2014.03.20 06:28
2014.03.20 07:57
종편 개국 할때부터 좋아하는 드라마 글 올리면 저도 저런 댓글 많이 받아봐서 기분 잘 알죠.
저는 앞으로도 월화에 JTBC 밀회 본방 사수 하려고요. 동시간대 지상파에서 시청률 1위 찍고 있는 대륙 수출용 강간왕 미화극 보다는 이쪽이 천만배는 훌륭한 드라마라고 자신합니다.
2014.03.20 08:27
와! 해석이 너무 좋아요. 마치 드라마를 다 본 기분입니다
2014.03.20 08:28
jtbc가 '우리는 종편이 아니라 비지상파라고 불러달라능~' 하고 조선, 동아 TV와는 물론 모회사인 중앙일보와도 거리를 두려고 노력하고 있는데, 솔직히 잘 안먹히죠. 저도 손석희 사장이 진행하는 뉴스9만 보고 가끔 월화 드라마 보다가 밀회는 본방으로 봤네요.
보면서도 찜찜한건 사실이고, 얘들이 언제 본색을 드러낼까 신경쓰이기도 하는데 그래도 뉴스9과 밀회만 따지면 KBS나 MBC 보단 낫습니다.
손석희 사장이 밀려날때가 jtbc가 본색을 드러내려는 신호라고 보고있어요. jtbc 보도국의 중앙일보 출신 간부들이 손사장 싫어한다는 얘기도 있던데...
2014.03.20 08:56
이글에 좋아요 있으면 눌러드리고 싶네요 ㅎ
김희애 캐릭터 좋아요. 저렇게 피곤하게 살고 싶은 건 아니지만 저렇게 처신할 수 있으면 좋겠다 싶네요.
유아인 연기 정말 잘하네요? 진짜 긴장하고 진짜 들뜬 것처럼 보여요.
아 왜 난 천재도 20대도 아닌 주제에 얘한테 감정이입해서 봤지.
그리고 이건 정말 쓸데없는 잡소리인데, 요즘은 화장을 저렇게 하나요...;;
다들 너무 물광이셔서 뭐랄까 지성피부 화장했는데 저녁돼서 파운데이션이 기름먹어서 들뜬... 뭐 아시죠 그런 걸로 보입...
2014.03.20 13:55
아, 저는 오혜원 실장에게 감정이입해 봤는데...여기서 나이가 드러나는 건가요..
2014.03.20 10:33
혹시 이글읽고 밀회 시작하실분은 여기로. 1회만 무료로 올라와있네요. http://www.youtube.com/watch?v=U5p_ht4YBrA
연기자들 물광메이크업 너무 과해요. 너도나도 집에서 콜드크림 한통붓고 나온듯. 좀 적당히하지 싶습니다.
2014.03.20 15:18
저도 겨울연가 이후로 처음 보는 드라마라 약간 아쉬움도 있지만 이상하게 유아인 김희애 둘다에게 감정이입하고
보는데 제가 드라마 보면서 살짝 살짝 느낀 부분을 이렇게 글로서 표현해 주시니 감사할 따름이네요^^
2014.03.20 17:59
대부분 공감합니다.^^
제가 좋았던 디테일은요.
1. 예전 글에 설명했지만 김희애랑 유아인 같이 피아노 치면서 표정 변화
2. 유아인이 연주하는 피아노곡을 김희애가 뒤에 쇼파에 앉아서 듣고 있는데 눈을 감더니 갑자기 울컥하면서 눈물 흘리는 장면 (정말로 김희애가 진짜 울었음)
왜 눈물이 그렇게 흘렀을까? 제대로 레슨 한 번 안 배워본 가난한 한 아이가 피아노 치고싶어서 몰래 들어왔다가 우연히 들었는데 그 실력이 너무 뛰어나서? 등등. 그 이유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면서, 암튼 너~무 연기가 아름다웠음.
3. 김희애가 집에서 나가는 길에 가정부가 컵에 샐러리랑 당근 썰어서 하나 집으라고 서빙하는 장면.
샐러리와 당근인 것도 디테일하고 그런 센스도 디테일하고, 그리고 김희애가 1초 고민하더니 샐러리를 톡 집어서 한 입 먹고 가정부한테
쳐다보면서 빵긋 한 번 웃어주면서 외출하는 장면! 다른 드라마 같았으면 쿨하고 도도한 척 가정부 쳐다보지도 않고 나가게 연출했을 것 같은데,
그런 아기자기하고 아름다운 마음씨가 좋았음
4. 김희애가 남편이랑 유아인 집에 갔더니 유아인 허름한 집에 살고 있고 유아인이 '머리 조심..'라고 애드립처럼 말하면서, 그만큼 누추한 집을 표현한 대사나.
5. 김희애가 유아인 집에서 갑자기 쥐 잡으라고 깔아놓은 끈끈이에 발이 붙어 버린 장면.
뭔가 유아인에게서 떨어질 수 없는 강력한 뭔가가 있다라는 걸 암시하는 듯 굉장히 섬세했음. 그리고 코믹한 요소도 됐음
6. 김희애가 롱 스커트를 입는 걸 깜박하고 안에 입는 짧은 스커트를 입고 있다가, 아차 하더니 롱 스커트를 위에 덧입는 장면.
롱 스커트 속에 내재되어 숨겨져 있는 어떤 살짝 성적인 요소를 암시하는 것 같아서 섬세했음
7. 말씀하신 양주 얼굴에 뿌리고 티슈 톡 뽑아서 던져주는 장면
8. 김혜은이 버릇없이 나오니까 심혜진이 바로 '이 썅년이' 하고 머리 낚아채고 좌변기에 얼굴 담구는 장면 ㅋㅋ
9. 김혜은이 김희애한테 다짜고짜 물건 대놓고 던지고 김희애 완전 긴장해서 슉슉 피하는 장면
10. 김희애랑 직원 2명이서 식사하는 장면에서, 김희애가 유아인에 대한 얘기를 깜박 잊고 있다가, '아! 맞다 걔! 정말 잘 해'라고 말하는 장면.
정말 깜박 잊고 있다가 이제서야 생각났다는 듯 손을 쭉 뻗으면서 표현하는 연기 디테일이 좋았음
11. 리듬과 연주법, 페달을 밟지 않고 연주하는 바흐의 평균율, 등등 피아노 전문 지식마저 필요한 부분까지 꼼꼼하게 연출했음
12. 김희애가 바흐의 평균율을 왜 페달 안 밟고 연주했냐고 유아인한테 물으니까, 유아인이 '왠지 음표와 음표 사이에 페달을 밟지 말라고 적혀 있는 것 같아서요' 라고 대답한 장면!! 정말 감동했음. 저도 그 곡을 쳐봤기에 그게 무슨 소린지 알 것 만 같아서.
13. 유아인이 입시에 슈베르트 준비했다고 하니, 김희애 남편이 '아 그거! 아 갑자기 눈물 날라그래' 라고 말하는데 진짜 리얼하게 연기한 것.
한 편 반 정도밖에 안 봤는데 아아악.. 너무 많아요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