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08.15 19:56
한국 최초의 여성 근대 화가, 문필가
( 1920년 초의 나혜석)
https://ko.wikipedia.org/wiki/%EB%82%98%ED%98%9C%EC%84%9D
나혜석 거리에 있는 김도근의 ‘잠들지 않는 길’
요즘 교양 수업으로 듣는 미술 감상 수업에서 나혜석에 대한 얘기가 나왔습니다. 잠깐 언급만 하고 지나갔지만 갑자기 호기심이 생겨 이 분에 대해 검색해 봤더니, 위키에 자세한 얘기들이 많이 정리되어 있네요.
나혜석이 한국 최초의 여성 근대 화가라는 점에는 이견이 없지만, 이 분이 '독립운동가'인가에 대한 논란이 최근 일고 있더군요.
아마도 나혜석이 학창 시절 3.1 운동 참가와 함께 5개월이 넘는 옥고를 치른 점은 분명하지만, 이후의 삶에서 독립운동에 대한 뚜렷한 행적이 없기 때문으로 보입니다. 물론 화가로 활동하면서 그림을 팔아 모은 자금들을 독립운동 단체에 기부하고, 이혼 이후 어려운 삶을 살 때 조선 총독부의 친일 인사 참여를 거부한 점은 높이 평가해야 하지만....비판자들은 이 정도 가지고서는 '독립운동가'로 인정할 수 없다고 하는 입장인가 봅니다―,.―
제 생각은, 그렇다면 이분을 '민족주의자'라고 하면 되지않나...하는 입장입니다. ( 굳이 앞서서 목숨 걸고 활동한 사람들과 구분을 해야한다면 말이죠.)
사실 나혜석과 그 요란한 이혼 스캔들을 일으켰던 두 남자, 맞바람을 핀 남편 김우영 그리고 불륜을 저지른 최린은 모두 적극적인 친일 활동덕에 스캔들로 깨진 명성을 극복하고 온갖 부귀영화를 다 누렸거든요.―,.― 오로지 나혜석만 총독부의 친일 활동 제의를 거절하고 그 찬 바람 다 맞고 살았네요.
( 총독부는 그 보복 조치로 나혜석이 프랑스로 출국하려는 걸 금지해 버렸구요. 이건 정말 안타깝습니다.…ㅠ… 만일 나혜석이 만년의 삶을 프랑스에서 보냈다면, 근대 서양화법이 어떻게 한국식으로 안착하는지 볼 수 있었을 텐데요. 나혜석 개인의 삶도 훨씬 나았을 것이고(-_ど)
(나혜석의 친필 편지들)
http://news1.kr/articles/?801509
나혜석의 1927년 6월15일자 편지/사진제공=수원시청 © News1
나혜석이 영국에서 보낸엽서/사진제공=수원시청 © News1
(서울=연합뉴스) 우리나라 최초의 서양화가이자 문필가였던 정월(晶月) 나혜석(1896-1948)의 친필 편지가 처음으로 공개됐다.
편지는 나혜석이 1931년 11월29일 지인이던 일본의 실업가 야나기하라 기치베 부부에게 보낸 것으로, 이혼 이후의 심경이 드러나있다. 사진은 일본 구마모토대 강사 우라카와 도쿠에 씨가 오사카 모모야마학원 사료실에서 발굴해 인용한 것을 서정자 초당대 명예교수가 발견, 수원박물관과 함께 입수했다. 2012.8.31 << 서정자 초당대 명예교수, 수원박물관 제공 >>
http://news.naver.com/main/read.nhn?mode=LSD&mid=sec&sid1=103&oid=001&aid=00057880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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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의 문학 작품들)
( 2014년에 개정 증보된 나혜석 전집)
나혜석은 화가이면서도 문필가이기도 했죠. 특히 당대의 대표적인 신여성으로서 여성해방에 대한 많은 논설과 시와 희곡을 쓰기도 했고.
( 판화 작품, 농부)
( 1920년 무렵의 초상화)
( 신여자지 1920년 4월호에 실린 나혜석 판화, 김일엽 선생의 가정생활)
( 김우영과의 결혼)
( 파리 유학 시절)
( 자화상)
1042명 참여 ‘나혜석 자화상’ 완성
http://www.hani.co.kr/arti/society/area/480697.html
.....경기 수원시 팔달구 행궁길 ‘행궁동 레지던시(창작마을)’에 한국 최초의 여류 서양화가 정월 나혜석(1896∼1846)의 자화상(사진)이 31일 모습을 드러냈다. 지난 3월27일 ‘우리들의 자화상으로 나혜석 자화상 만들기’ 작업이 시작된 지 2개월여 만이다.
그림은 창작마을에 입주한 작가 31명 외에 행궁동 주민들, 세계문화유산 화성을 찾은 관광객 등 1042명이 참여해 타일 한조각씩을 만드는 식으로 완성됐다. 이날 모습을 드러낸 타일 그림의 규모는 높이 15m, 너비 8.5m로, 건물 3층 높이에 이른다. 가로·세로 20㎝ 크기의 타일 3000장이 들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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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근 수원시에서 지역 사업의 일환으로 '나혜석 사업'을 활발하게 하고 있네요. (정부에서는 나혜석을 이 달의 문화 인물로 선정한 적도 있고) '나혜석 거리 조성' 그리고 여기에 더해 ' 나혜석 기념관 조성'을 추진하다 재정적 이유로 수원 현대 미술관과 통합....최근엔'나혜석 생가 조성'작업까지....이런 저런 말들도 많은것 같지만 ( 독립운동가냐 아니냐 거기다 아버지와 남편과 애인의 친일 활동 얘기까지...그런데 이건 나혜석 가족의 일이지, 나혜석이 그랬다는 건 아닌데… -_-;;)
지난 1970년대부터 복권된 나혜석에 대한 학문적, 역사적 연구들이 결실을 맺는것 같습니다.
( 해인사 풍경)
(1927년, 남편과 함께 유럽여행에 오르기전 찍은 사진)
나혜석처럼 기차 타고 유럽에 가고 싶다
http://h21.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32048.html
...근대 신여성의 효시라고 하는 나혜석, 그녀의 유럽 여행은 남녀평등과 예술에 대한 새로운 영감을 얻는 계기가 되었다. 1927년 나혜석은 기차를 타고 한반도를 벗어나 중국 만주와 옛 소련 모스크바를 거쳐 프랑스 파리까지 여행했다. 철도를 통해 조선 여성이 근대를 경험한 것이다. 나혜석이 파리 여행을 할 수 있게 했던 경의선은 1950년 한국전쟁 발발 이후 운행이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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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혜석은 한국 최초로 유럽 여행을 한 여성이기도 합니다. 이때는 기차를 타고 유럽으로 갔네요? @.@ 여튼...이 유럽 여행 덕분에 나혜석의 이후 작품에 1920년대 유럽을 풍미한 '야수파'의 영향이 보인다고 미술평론가들은 지적합니다.
( 1940년대 추정, 무희)
( 1930년대, 홍류동)
제5회 ‘조선미술전람회 도록’(1926)에 실린 나혜석의 특선작 ‘천후궁’(사진=김달진미술자료박물관)
1920년대 프랑스 파리에 머물며 근교 마을 풍경을 담은 유화. ( 최근에 발견됨)
( 화령전 작약)
( 동시대의 화가 이인성의 작품입니다. 1930년대 한국에서 유행한 서양화풍들)
( 1933년, 자화상)
( 1938년, 엘리자베스 키이스, 민씨가문의 여인)
당시 일본과 한국을 오가며 두 나라를 소재로 많은 작품을 남긴 스코틀랜드 출신의 영국 화가의 작품입니다.
키이스는 일본의 전통 화풍에 매료되어 한국인들과 한국 풍경도 전통 일본화 양식으로 그렸습니다만....이것도 시대를 말해주는 것이니까요^^;;
(검색하다가 예뻐서 줏어왔습니다ㅋ)
( 풍경, 연도 미상)
다음은 나혜석을 기억하는 현대 한국 화가들의 작품입니다.
http://www.kgnews.co.kr/news/articleView.html?idxno=416954
( 거울, 2015 조성훈, 나혜석 작품을 모티브로 한 현대 미술작품)
...나혜석의 ‘자화상’을 주제로 그린 ‘거울’ 작품을 선보이는 조성훈 작가는 “여권신장, 여성인권에 힘썼던 나혜석이 이상향은 양성평등이 실현된 곳일 지도 모른다. 그렇다면 그녀의 이상은 지금과 서로 맞닿아 연결돼 있다. 이상과 실현 사이 가려진 연결고리 안에 놓여진 나혜석의 삶을 표현했다”고 설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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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제15회 나혜석미술대전 대상 수상작 이영숙 作 '꿈에서 깨어나다'.
제 16회 나혜석미술대전 대상작 박진양 '시골장날'
▲ 이선미 作 '나래울'
2013년 제17회 나혜석미술대전 대상작 이선미의 '나래울'
▲ 대상 박양예 作 '화려한 하모니 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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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4, 제18회 나혜석미술대전 대상작 박양예의 '화려한 하모니
▲1일 오후 서울 성동구 왕십리 갤러리아포레 페이지 스페이스에서 근대미술체험전 'NO MORE ART' 언론설명회가 열렸다. 이날 전시장에 마련된 '나혜석의 파리, 자아를 찾아-모놀로그'섹션에 나혜석의 배역을 맡은 여인이 오래된 이미지들을 배경으로 문학을 낭송하고 노래를 부르며, 시대적 억압에 굴하지 않고 의연하게 인간의 삶을 추구했던 신여성으로서의 나혜석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다.(사진=왕진오 기자)
그리고 당시의 여성교육
http://news.unn.net/news/articleView.html?idxno=148428
( 초창기 이화학당 학생들)
( 1886, 초창기 이화학당 한옥교사)
( 1931년, 명신여자고등보통학교( 숙명여대) 금강산 수학여행
( 1930년, 명신여자고등보통학교 운동회)
▲ ‘신진여류의 기염’ 난에는 차미리사를 포함, 김활란, 나혜석 등 신여성 열 명의 글이 연재됐다.
차미리사는 논설을 통해 여사는 교육을 통해 일천만 여성에게 새 생명을 주겠다는 포부를 밝혔다.
‘일천만 여자에게 새 생명을 주고자하노라’(동아일보 1921년2월21일자)(출처=한국역사정보통합시스템)
...차미리사는 1897년 남편과 사별하고 중국유학 이후 1905~1910년까지 한인교육기관인 대동교육회·대동보국회 회원으로 대동신문 발간에 참여하는 등 한일민족계몽운동을 전개한 여성독립운동가다.
또한 1920년 조선여자교육회를 설립, 순회 강연을 통해 민족 실력 양성을 역설하고, 1923년 근화학원을 설립해 민족교육과 무궁화사랑운동을 전개했다. 1925년 보통학교를 졸업한 여학생들을 위한 고등과를 신설하고, 영어과와 음악과를 한층 높여 전문부로 변경, 기존의 직업교육은 6개월 수료과정의 재봉부를 운영했다. 같은 해 근화여학교로 정식 인가를 받았다. 하지만 차미리사는 이후 1940년 조선총독부의 압력에 의해 덕성여자실업학교 교장직에서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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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성여대 창립자 차미리사 선생의 논설이 실려있군요. 당대 페미니즘 경향에서 나혜석과 차미리사는 서로 대립되는 주장을 펼쳤는데, 나혜석이 급진적인 연애론과 성적 자유론을 외쳤다면 차미리사는 여성해방에서 '자유 연애론'을 뒤로 미룰 것을 주장했습니다. 그 보다는 여성에게 급한 것이 '경제적 독립'이라는 것이었죠. 차선생의 주장에 따르면 "여성들이 경제적으로 자립을 할 수 있다면, 여성의 성적 자유는 자연적으로 해결될 수 있는 문제"라는 겁니다. 그래서 여성교육에 있어서도 실무적인 직업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했고.
이런 생각의 차이가 있었지만, 나혜석과 차미리사의 공통점은 둘 다 확고한 민족주의자였다는 겁니다.
( 오늘은 광복 70주년 기념일)
2015.08.15 20:54
2015.08.15 21:05
2015.08.15 21:21
2015.08.15 21:57
신사임당도 한 시대를 대표하는 화가라…사실, 이 양반을 '현모양처'로만 해석해서 그렇지, 이 분도 여성이 학문을 연마하고 예술 활동을 하는 것을 억압하던 시대에 꿋꿋이 자기만의 창작 세계를 열어간 뛰어난 서화가랍니다.
북한에서는 신사임당을 안견과 함께 조선 초기의 쌍벽을 이루는 대표적인 화가로서 평가하고 있습니다. 무엇보다도 이 분의 작품은 '여성적인 미술'로서 남성들의 화풍을 모방하지 않는 - 중국풍 산수화나 사군자화 - 자신만의 독자적인 영역을 갖추고 있습니다. (물론 작품들이 모두 전칭작이라는 한계는 있습니다만―,.― )
게다가 신사임당에 대해 남아있는 조선 시대 기록을 살펴보면, 당대에는 사대부들이 그녀의 작품에 대한 찬사와 함께 시서화에 몰두하면서도 훌륭히 가정 생활을 잘 이끈 것에 대한 호평이 주류를 이루다가, 후대에 가면서 여성이 그림을 그리고 시를 썼다고 그녀를 미묘하게 비난하는 평들로 바뀌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_-;;
( 대표적으로 우암 송시열 "…신부인께서 여성의 부덕에 어울리지 않는 시서화에 몰두한 것은 이해할 수 없는 일이다…")
결론은, 우리까지 신사임당을 현모양처만 했다고 비판할 필요는 없다는 겁니다^^;; ( 물론 그 분에게 일과 가정 다 성공해야 한다는 슈퍼우먼적 이미지가 없는 건 아닙니다만, 그건 신사임당 잘못도 아니고요 ―,.― )
2015.08.16 10:57
2015.08.16 12:36
2015.08.16 00:30
2015.08.16 04:38
2015.08.16 08:27
2015.08.16 11:01
2015.08.16 12:36
무슨 말씀이신지? 당시 식민지 조선 지식인 중에 민족주의자 아닌 사람이 어딨냐구요? 그럼 그 양반들 1930년대 이후 거의 친일파로 돌변한 건 생각 안하시나요?@_@ 지금 혹시 친일파도 예전에 민족주의자였으니, 일제에 빌붙어도 민족주의자다…뭐, 이렇게 말씀하시는 건 아니죠?ㅋ
본문을 보셨으면 아시겠지만, 제가 나혜석에게 높이 평가하는 부분은 이혼 스캔들로 모든 걸 잃어버린 상황에서도 조선 총독부의 친일 인사 권유를 끝까지 거부한 그 강한 민족의식입니다. 저 시절 남자 지식인들 외에도 신여성 지식인으로 유명한 김활란이니 모윤숙이니 하는 여성 명사들도 다 친일 행위로 변절하는 상황이었어요. 이렇게 반민족 행위자들이 속출하는 상황에서 끝까지 일제에 협력을 거부한 사람에게 '민족주의자'라는 타이틀이 어떻게 구차할 수 있나요?@_@
2015.08.16 14:37
2015.08.16 14:46
2015.08.16 23:41
나혜석 어떤 그림은 폴 세잔 같은 느낌을 주기도 하네요 ^^
2015.08.17 12:12
나혜석은 프랑스 인상주의의 영향을 많이 받았습니다. 이는 비단 나혜석만이 아니라 당시 한일 서양 미술가들의 공통된 현상인데, 말씀을 듣고 보니 특히 색채 감각면에서는 세잔의 영향이 큰 것 같군요.
한 가지 재밌는 점은, 프랑스 인상주의의 특징이 '철저한 사회참여 거부'라는 것입니다. 미술 양식적 측면에서는 서양회화에 혁명적인 변혁을 추구했음에도 그림의 소재나 주제면에서는 철저한 '사회참여 거부'와 함께 일상의 소박함을 강조했죠. ( 그렇다고 이들이 보수 반동주의자라는 건 아닙니다. 그냥 정치 얘기 하기 시러시러…ㅠ 딱 이런 분위기―,.― )
그래서 자신의 작품과는 전혀 다른 나혜석의 강한 정치 성향이나 사회참여 의식이 화재가 되는 것입니다. 여성해방의식도 그렇습니다. 이런 점 또한 그의 작품에 거의 보이지 않습니다. 아무래도 정신적 스승인 프랑스 인상주의 거장들의 영향이 크기 때문인것 같습니다. ( 그래서 정말 아쉽습니다.…ㅠ 그 불타버린 미발표작들…무려 800여점이나 되던데…)
현재 미술사학자들은 나혜석의 만년 작품들에는 아무래도 페미니즘을 비롯한 민족주의까지 강한 사회의식들이 담겨있었던 것 같다고 추정하고 있습니다. 일단 그 근거로 그림들이 잘 팔리지 않았던 데다가 --;; - 젊은 시절 그렸던 초기작들이 당시 집 한 채 값에 팔렸던 것 생각해 보면, 정치의식이 강하게 담긴 그림들이 상업성이 떨어지는 건 당연한 것이기도 해서 - 이 시기 쓰여진 글이나 행동들에 나혜석의 강한 민족의식이나 페미니즘 성향이 보이는데, 그렇다면 당시 그렸던 작품들에도 그런 성향이 보이는 건 당연한 것이니까요.
2015.08.19 02:42
제가 배운 기억으로는 신사임당에 대한 평가는 임진왜란 전후로 갈립니다. 소위 아녀자의 덕목, 책임 등이 강조된 건 조선 후기에 들어서죠. 일 례로 신사임당은 평생 시어머니를 모시지 않고 친정어머니를 모시며 친정에 살다가 시어머니 돌아가신 이후에야 본가로 들어갔지요. 중간에 시어머니 살아생전 살림을 합치자고 요청도 하였지만 신사임당이 장문의 편지를 써서 거절했던 일화도 있습니다. 만일 조선 후기같았으면 본인의 재주가 알려지기 전에 시부모에 대한 불효로 지탄을 받았겠죠 ;;
신사임당도 지금으로 따지면 알파걸이었겠지만 나혜석이야말로 그 당시 어마어마한 알파걸이었어요. 여학교시절 평점 99점(!)으로 졸업하고 동경 유학간 케이스였고, 일본 유학시절 학점이 매우 좋아서 당시 신문에도 날 정도의 촉망받던 인재였죠. 꽤 미인이었던지 당시 한국 유학생들이 주로다니는 길 담벼락에 '나혜석은 내꺼!'라는 유치한 낙서도 꽤 있었다고 합니다 ㅋㅋ 한동안 풍문만 있고 작품은 없다는 비아냥을 듣기도 했지만 90년대 말부터 나혜석의 소설등이 복원되면서 신지식인으로 재조명 받았죠. 경희 등의 작품에서 보면 나혜석의 문제의식은 경제적 계급 보다는 신식교육을 받은 모던 여성과 전통적 가치관 속에서 정규교육을 받지 못한 여성간의 연대의식이었습니다.
당시 민족주의자면서 계몽주의자였던 사람들은 대부분 친일의 길을 걷게 되는데, 조선이 미개함을 못벗어나 식민지 생활을 하고 있으니 선진국인 일본 밑에서 일본을 배워 계몽 되어야한다는 논리가 결국 내선일체로 이어지게 되는 반면, 나혜석은 친일 행적은 없습니다. 오히려 남편이 만주에서 공무원 생활을 할때 만주 독립운동가들이 국경을 넘게 도와주거나 군자금을 대주기도 하죠(이건 당시 독립운동가의 증언으로 나와있다고 합니다) 화가였고 자유연애를 옹호하던 것 때문에 생활도 방만 나태했을꺼라는 선입견이 있는데, 매우 살림을 잘했고 매우 규칙적으로 분단위까지 쪼개서 작품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김우영과의 결혼생활 마지막은 시댁에서 시부모와 시동생 그리고 4명의 자식을 기르며 맏며느리 노릇을 해야했는데, 그 바쁜 와중에도 새벽부터 집안 살림을 일짝 마치고 한두시간씩 짬을 내어 그림을 그렸다더군요. 나혜석에 대해 더 관심이 있으시면 "불꽃같은 삶을 살다(예전에 읽어서 제목이 가물가물합니다;;)" 라는 이름으로 나온 나혜석 평전(?)을 읽어보시면 좋을거 같습니다. 카이스트 교수가 쓴 거였는데 한길사에사 나왔었어요.
2015.08.20 09: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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