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보의 고향에서 보낸 열흘

2020.01.11 06:57

어디로갈까 조회 수:787

프랑스 북쪽에 위치해 있는 샤를빌에서 휴가 중 열흘을 보냈습니다.  보스의 별장 - 이라지만 그의 아내가 조상에게서 물려받은 150년 된 고택- 으로 마치 타임머신의 유리창을 통해 다른 시대를 엿보고 있는 듯한 느낌을 주는 집이었어요.

샤를빌은 특별히 내세울 만한 유적이나 풍광은 없는 도시입니다. 이 도시가 광채를 발한다면 그 이유는 단 하나 아르튀르 랭보가 태어나고 묻힌 곳이라는 점이죠.  시 이전에 존재 방식 자체가 하나의 '사건'이었던 랭보. 그는 샤를빌에서 부르주아의 위선과  보수적인 현실에 반발하는 청소년기를 보낸 후, 여러차례의  시도 끝에 파리로의 가출에 성공했습니다. 그리고 베를렌과 파행적인 관계를 맺으며 살다가, 비극적인 이별 후 고향으로 돌아와 '침묵들과 밤들과 표현할 수 없는 것'을 기록한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발표했죠.

'침묵'과 '밤'이란 그가 추구한 시, 언어로써 설명하기 어려운 시의 본질 자체를 의미하는 것이겠지만, 샤를빌이라는 공간에 대한 은유로 읽어도 무방하다고 생각해요.  그토록 샤를빌의 빛과 색감이 내는 분위기는 독특했습니다. 얼핏 보기엔 평범하고 세속적인 도시이지만, 샤를빌은 관광자의 시선으로 허술하게 훑고 지나갈 수 없는 귀족적인 일면을 지니고 있는 공간이에요. 

그 아름다움의 이유 중 하나는 햇빛입니다.  겨울인데도 보이는 게 아니라 들려온다는 느낌이 강할 만큼 음악적이었어요. 빛은 액체처럼 흐르며 광채를 띠었는데, 마치 각각의 사물들을 다른 방식으로 비추는 듯 애절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시선이 아니라 몸이 느끼게 되는 멜랑코리함을 포함하고 있어서 모호하게 어두운 느낌이었습니다. 고요, 외로움, 낯섦... 같은 이미지들로만 구성된 세계, 근원만의 세계가 그곳에 있었습니다.  

제가 머물렀던 보스의 집은 분위기가 특별한 집이었어요. 내부의 모든 색이 단순하게 색이라고 받아들일 수 없는 미묘한 역사적 감각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것들은 마치 시간의 변주처럼 아득하고도 다채로웠어요. 
바르트가 명명한 '모순된 공간' - 좁고 집중되어 있으면서 한편으론 아주 멀리까지 뻗어 있는 공간이라는  개념을 설명해주는 듯했지요.

감정이 동하는 대로 공간을 울리며 음악을 듣다가 창문 앞에 서면,  무심히 뻗어 있는 먼 도로 위로 가끔 자전거나 트랙터가 지나갔습니다. 그 뿐 세상이 제게 보내오는 어떤 유혹이나 도전도 없는 시간이었어요. 
저는 하루 종일 바다에 떠 있는 부표처럼 의식을 닫고 시간의 밀썰물만을 느꼈습니다.  부표인 저는 먼 것을 보거나 깊은 것을 생각할 필요가 없었어요. 어떤 음악의 한 소절인지 알 수 없는 노랫말이 때없이 머릿속을 느리게 흘러다녔습니다. '아무것도 하지 않고 평화롭게 누워 있네. 겨울은 깊어가고 잎은 저절로 대지에 묻혀 사라지네."

샤를빌에서의 일주일은 모든 격한 감정들과 외부의 공격이 잠시 멈추었던 심해저의 시간이었습니다. 살아 있다는 감각을 잊을 정도로 '이유없이 살게' 되는 그런 시간이 일 년에 적어도 며칠 정도는 제게 꼭 필요합니다. 
랭보가 말했 듯, '나는 타자이다'라는 체험을 하므로써 자신의 나르시시즘에 자극을 받는 시간,  자신에게 집중하면서도 이건 내가 아니라는 느낌을 가져보는 시간, 현재의 내 모습이 내가 원하던 상과 좀 다르다는 걸 자각하게 되는 시간, 그래서 반사능력이 반성능력으로 바꿔지는 시간...  말이에요.

샤를빌을 떠나오던 날, 저는 견딜 수 없는 감정으로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고 싶었어요. 먼 곳으로 여행을 다녀온 사람이 자신이 돌아왔음을 알림으로써  떠나기 전의 자신과 만나고 싶어하는 감정이었겠죠.
서울의 한 친구와 통화를 했습니다. 그런데 또랑또랑한 그의 음성이 들려오자 그만 말문이 턱 막혀버려서 손가락으로 벽만 두드리며 의미 모를 웃음소리만 들려주고 말았습니다. 언어들이 제 몸에서 모두 빠져나가버린 것만 같았어요. 
제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었을까요?  '진공상태의 천국에서 보낸 열흘' -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자각할 수 없는,  우주로 날아가 별이 되어버린 그 시간에 대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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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보의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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