scm203762551496.jpg



제가 향후 몇십년간은 절대 다시 안보겠다고 결심한 영화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의 [어메리칸 허니]입니다. 이 영화가 주는 감흥은 저에게 개인적으로 너무나도 특별하고 고유한 것이라 저는 이 영화를 다시 보면서 그 때의 감흥을 흐트려버리고 싶지 않습니다. 언젠가는 또 보겠지만, 그 때는 그 최초의 감동을 잃어버릴 각오를 하고 다시 보는 경험이 되겠지요. 제가 호주 워홀을 가있을 동안 그 불완과 설렘이 뒤엉킨 시간이 어떻게 이렇게 영화로 나올 수 있는지 너무 신기했습니다. 아마 미국에서 잡지 파는 일을 직접 했던 사람들은 저보다 더한 기시감을 느꼈겠죠. 어디로 가는지도 알 수 없고 일을 하면서 돈을 버는 것 같긴 한데 도무지 앞이 보이지는 않고 함께 하는 시간은 그래도 즐겁고 두근대는 그런 시간을 영화로 접하면서 저는 그 시간을 다시 지나는 것 같은 기분을 느꼈습니다. 어떤 순간 영화는 기억으로 작동하기도 합니다.


안드레아 아놀드의 [피쉬탱크]는 [어메리칸 허니]의 원본 같은 느낌이었습니다. 아직 어린 여자, 개차반 가족, 마음을 잡아끄는 다정한 남자, 그러면 안되지만 자꾸 끌리는 주인공, 시궁창 같은 세상, 그리고 주인공이 의지하는 유행가 혹은 흑인 음악들... 안드레아는 젊은 여자의 상실감과 어리석은 희망을 찍고 싶어한다는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렇게 찍은 [피쉬탱크]에 보다 본격적인 미국의 본토 힙합과 그 힙합에 휩쓸리며 열정과 불안을 뒤섞는 여러 사람들, 그리고 미국의 각 지역이 품고 있는 스산한 풍경들이 확장팩처럼 더해진 게 [어메리칸 허니]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이야기꾼은 평생 하나의 이야기만 한다고 하는데 저는 안드레아 아놀드가 다시 한번 이런 상처받고 무모한 빈민 소녀의 이야기를 찍어주길 기대합니다. 그래야 저는 또 [어메리칸 허니]를 간접적으로라도 느껴볼 수 있을테니까요.


한편으로는 이 영화를 나중에 보게 된 게 다행이라는 생각도 했습니다. 아마 제가 이 영화를 먼저 보고 [아메리칸 허니]를 봤다면 아메리칸 허니를 두번째 소녀 이야기로만 인식했겠죠. 제가 [아메리칸 허니]를 먼저 봤기에 그 작품을 안드레아 아놀드 감독의 완성된, 가장 기본적인 세계관으로 인식하고 온전히 받아들일 수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 다음 시간이 흘러서 [피쉬탱크]를 볼 수 있었기에 이 작품을 오히려 프리뷰처럼 인식하는 것 같습니다. 영화는 매우 좋았습니다. 아직도 이 세상에는 계급을 뛰어넘는 영화들이 많이 모자란 것 같습니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2399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1434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1775
123082 한국 감독과 매즈 미켈슨 外.jpg [18] 보들이 2014.03.14 5746
123081 나이를 먹고 <베르사유의 장미>를 다시 보니 색다르군요 [30] 차페크 2012.10.21 5746
123080 공주와 평민 남성의 결혼 Tip [28] Isolde 2013.06.10 5746
123079 언니네 이발관의 가장 보통의 존재를 싫어하는 이유 [9] Jordi Savall 2011.10.30 5746
123078 서민의 삶도 이젠 체험하는 시대 [59] jim 2011.08.08 5746
123077 간통죄, 연예인 스캔들 [34] catgotmy 2010.10.18 5746
123076 봉준호 신작 <설국열차> 첫 스틸컷 [11] 김레디 2013.01.15 5745
123075 제시 아이젠버그 잘생기지 않았습니까? [17] SnY 2010.10.05 5745
123074 남의 찌질함을 못견디는 것 [35] 루이루이 2013.10.18 5744
123073 인스턴트 짜장면 2종 비교 [27] 푸른새벽 2010.08.07 5744
123072 예쁜 남자 아역배우들 [8] 자두맛사탕 2013.04.29 5742
123071 인터넷 연애 상담 얼마나 믿으세요? / 여초 커뮤니티는 남자를 증오하는가 [33] 라뷔 2012.12.29 5742
123070 스노우캣 블로그 왜 닫혔을까요?? [6] 핏. 2012.05.22 5741
123069 유시민 父女의 분열 [17] 닥터슬럼프 2011.11.03 5741
123068 위대한 탄생 잡담 (김연우는 제작진에게 무슨 죄를 졌길래) [7] 슈크림 2011.03.26 5741
123067 본인이 예쁜걸 아는군요ㅎㅎ [7] 은한 2010.10.17 5741
123066 [기사 링크] 호주 신문의 '한인여성 성매매' 실태 보도 [32] 어쩌다마주친 2012.08.31 5740
123065 Sight & Sound의 역대 영화 베스트 50이 발표되었는데... 충격 [21] mithrandir 2012.08.02 5740
123064 ▶◀ 루리웹이 죽었슴다 [16] management 2011.09.29 5740
123063 지드래곤-쿠데타를 보고 감탄했어요 [20] 종이연 2013.09.02 5739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