덥네요, 겨울 얘기나 한번...

2010.07.30 16:21

차가운 달 조회 수:1813

 

 

 

내가 만화 영화 스노우맨의 주제곡 "walking in the air"의 멜로디를 처음 들은 것은 스물두 살 때였다.

 

나는 전철역 근처의 어느 분식집에서
한 여자애와 함께 라면과 순대 따위를 먹고 있었는데
분식집 벽에 걸려 있는 텔레비전에서 문득 귀를 쫑긋하게 만드는 어떤 노래가 흘러나왔다.
겨울이었고, 겨울이 제법 추웠던 시절이었다.

 

이제 이름은 기억나지 않지만 어느 아이스크림 CF의 배경음악이었다.
그 노래가 흘러나오는 순간
나와 그 여자애는 동작을 멈출 수밖에 없었다.
비록 짧은 CF 배경음악에 불과했지만 그렇게 아름다운 노래는 처음이었다.

 

그 노래가 고작 아이스크림 CF만을 위해서 만들어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분명 원곡이 따로 있을 거라고 추측했지만 그것이 어떤 곡인지 알 길은 없었다.
어쨌거나, 단 한 번 들은 것만으로도 나는 그 멜로디를 내 기억의 깊은 곳에 묻어 두었다.

 

스노우맨,
영국에서 만든 그 26분짜리 단편 만화영화를 보게 된 것은 몇 년 후의 일이었다.
비디오점에서 볼 만한 영화를 고르다 우연히 발견했고
비디오 케이스의 그림이 맘에 들었기 때문에 보기로 했다.
일반적인 셀애니메이션이 아닌 파스텔톤의 색연필로 그림을 한 장 한 장 그린 아름다운 영화였다.
그리고 그림만큼이나 내용도 아름다운 영화였다.

 

마당에 만들어 놓은 눈사람과 함께
얼어붙은 겨울 바다를 날아가
눈과 얼음이 가득한 동화의 나라로 여행을 가는 소년.

 

소년이 눈사람의 손을 잡고 겨울 하늘로 날아오를 때부터 그 노래가 나오기 시작했는데,
나는 지금 내가 듣는 노래가
그해 겨울 어느 분식집에서 들었던 그 CF 배경음악의 원곡이라는 사실을 알아차렸다.

 

마치 빈 소년합창단이나 파리 나무십자가 소년합창단의 노래를 연상시키듯
미성을 가진 한 소년이 부른 노래였다.

 

얼마 후에는 어느 라디오 심야 방송에서
뉴에이지 음악가 조지 윈스턴이 편곡한 피아노 연주곡으로도 들었고,

 

더 나중에는 또 다른 뉴에이지 음악가인 필 쿨터의 노래로도 들었다.
원곡을 포함해 수많은 버전의 walking in the air 가 있지만
나는 필 쿨터의 노래가 가장 마음에 든다.

 

물론 요즘도 나는 그 노래를 종종 듣는다.
문득 잠에서 깨어난 새벽
이름도 모르는 누군가에게 메일을 쓰고 싶을 때나,
불을 끄고 이불 속에 누워서도 그 노래를 듣는다.

언젠가는 내 손으로 직접 연주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한다.

 

왜 그런지는 모르겠지만 나는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내 영혼의, 만약 인간에게 영혼이라는 것이 있다면, 아주 은밀한 부분까지 위로를 받는 듯한 기분이 든다.
그 노래를 맨 처음 들었을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렇다.

 

눈을 감고 있으면 피아노 건반이 한 음 한 음 울릴 때마다
아주 쓸쓸해지기도 하고 또 아주 슬퍼지기도 한다.

 

그 노래는 또 내가 어릴 때 읽었던 겨울에 관한 동화들도 떠오르게 한다.
안데르센의 '눈의 여왕'이라는 동화,
핀란드 작가 토펠리우스의 '별의 눈동자'라는 동화,
모두 눈과 얼음으로 뒤덮인 아주 차가운 동화들이다.
한 번 읽고 나면 때로는 무서운 느낌마저도 드는 그런 동화를
나는 어째서 그토록 좋아했을까.

 

그리고, 오스카 와일드의 '거인의 정원'이라는 동화 역시 떠오른다.

 

 

넓은 정원을 가진 한 거인이 있었다.
어느 날 거인은 멀리 여행을 떠났고 오랫동안 돌아오지 않았다.

 

동네 아이들은 매일같이 그 정원으로 가서 놀았다.
잔디가 깔려 있는 그 넓은 정원에서 아이들은 즐거웠다.

 

하지만 어느 날 거인은 오랜 여행에서 돌아왔고
자신의 정원에서 아이들을 모두 쫓아낸 뒤 문을 꼭꼭 닫아걸었다.

 

그 뒤로 바깥 세상의 계절은 계속 바뀌어 갔지만
문을 닫아걸은 거인의 정원에는 오직 겨울만 계속되었다.

 

 

남아 있는 이야기가 더 있지만 별로 하고 싶지 않다.
내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은 거인의 정원에 겨울만 계속되는 대목이다.

 

스물두 살 겨울 어느 분식집에서
나는 첫사랑이라고 말할 수 있는 한 여자애와 라면과 순대 같은 것을 먹고 있었다.
그 여자애와 함께 한 처음이자 마지막 데이트였다.

 

나는 라면을 먹던 중 텔레비전에서 어떤 멜로디가 나오자 잠시 동작을 멈추고
그 여자애와 함께 가만히 귀를 기울여 노래를 들었다.

 

지금도 나는 어둠 속에 누워서 그 노래를 들을 때마다
그 겨울의 분식집,
내가 좋아하는 겨울에 관한 동화들,
그리고 내 영혼 어딘가의 겨울만 있는 정원에 대해서 생각한다.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9959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8926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9233
122642 테트리스에 대해 [4] catgotmy 2023.03.15 336
122641 소울메이트 [2] DJUNA 2023.03.15 724
122640 에피소드 #28 [4] Lunagazer 2023.03.15 90
122639 프레임드 #369 [6] Lunagazer 2023.03.15 117
122638 오늘 서울아트시네마에서 마지막으로 상영되는 자크 타티의 위대한 걸작 <플레이타임> 초강추! ^^ [8] crumley 2023.03.15 461
122637 펜데믹이 사실상 종결되었습니다. [3] soboo 2023.03.15 1186
122636 물이 너무 차다, 우리 봄에 죽자 [5] Kaffesaurus 2023.03.15 1075
122635 네이버 블로그 [1] DJUNA 2023.03.15 640
122634 3월 15일 [3] DJUNA 2023.03.15 465
122633 서부 전선 이상 없다 [2] DJUNA 2023.03.15 623
122632 여기는 감옥입니다 감옥! [15] Lunagazer 2023.03.14 909
122631 프레임드 #368 [2] Lunagazer 2023.03.14 117
122630 라즈베리 상은 블론드가 받았네요 [2] 쥬디 2023.03.14 466
122629 닌자거북이 (1990) catgotmy 2023.03.14 167
122628 키보드 이야기한 김에 마우스 잡담도... 돌도끼 2023.03.14 208
122627 그냥 키보드 잡담 [4] 돌도끼 2023.03.14 295
122626 룸 이스라엘 버전 돌도끼 2023.03.14 171
122625 왜 자꾸 남의 이름을 베낄까 [1] 예상수 2023.03.14 409
122624 더 글로리 몇 회 남겨 놓고 쓰는 감상.. [3] 딸기와플 2023.03.14 736
122623 홍차우, 키호이콴 [5] DJUNA 2023.03.14 957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