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03.25 20:18
소설이 200페이지가 안 되어서 금방 읽네요. 저는 책 읽는 속도가 느린데 이 작품은 페이지를 열어놓고 뭉그적거리게 만드는 소설은 아니었어요.
한 여자의 장례식장에서 중심 인물 네 명이 소개되며 이야기가 시작돼요. 여자의 남편, 정부, 옛애인이었으며 친구로 남은 두 남자. 이 중에 죽은 여자 몰리의 애인이었다가 친구로 남았고, 서로가 또한 오랜 친구이기도 한 클라이브와 버넌이 주인공입니다. 클라이브는 유명 작곡가이고 버넌은 전국일간지의 편집국장입니다.
68세대였고 이제는 다들 영국 사회의 상류 계층이 된 사람들입니다. 이 부분에서 소설의 목표가 짐작되실지도요.
두 중심 인물의 직업 세계가 이야기 전개에 중요합니다. 그래서 소설의 짧은 분량에 비해 꽤 소개되는 편인데 저는 클라이브 부분에서 곡을 쓰는 과정을 읽을 때 소설 쓰기의 과정과 비슷하다는 생각이 들어 인상적이었어요. 제가 써 본 건 아니고ㅎ 책에서 본 것이지만요. 소설가가 쓴 작곡가의 일이니 당연한 것 같기도 합니다.
'암스테르담'을 다 읽고 나자 생기는 감정에서 제가 이언 매큐언의 소설을 별로 챙겨 읽지 않았던 이유를 알 것 같았습니다.
이 소설의 형식은 잘 짜인 거 같고 역자의 후기에 나오는 말대로 '절묘한 솜씨'가 느껴집니다. 그런데 그 잘 짜인 구조 안에 담긴 후반의 결정적 사건이 설득력이 떨어진달까 급작스럽습니다. 등장하는 네 명의 장년 남자들이 다 비호감입니다. 그 중에 두 명은 대놓고 역겹게 그리고 있고 두 명은 내면을 따라가게 해서 변명을 듣게 하는데 마지막에 가면 클라이브가 내내 매달려 일하던 교향곡처럼 이 둘의 내면의 목소리가 용두사미의 느낌이 있습니다.
'이러이러한 내면 풍경의 절실함이 어떤 행동을 가져오게 함'이어야 하는데 '이런 행동을 할 정도니 얼마나 내면이 파손된 상태였겠느냐'로 매듭지으려 한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사실 저는 소설을 읽으면서 잘 짜여져 있는가, 기교적인가, 등을 의식하지 않아요. 인물의 매력에 많이 끌리는 편이고 사건의 재미, 이야기 자체의 설득력이 중요한 편입니다. 평범한 독자는 대부분 그럴 걸요. 읽고 나니 참 좋았네, 왜 그런가 생각해 보니 균형 있게 잘 짜여진 이야기란 점도 한 가지 이유야, 이러지 않을까요. 그런 좋은 소설을 뒷받침하는 '보이지 않는' 이유 부분은 전문가들이 분석하겠지요. 그런데 이 소설은 구조나 기교를 이야기하게 되네요... 아마 내용상 급작스러운 느낌이 있어도 제가 이입할 부분이 많거나 애정이 가는 인물이 있었다면 다르게 감상했을 것 같습니다. 작가가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인물들을 비판적으로 보면서 거리를 두고 전개시키는 작품은 독자에게 애정을 얻기가 힘들다라는 생각을 해 봅니다. 이입이니 동화 같은 것을 유도하지 않으면서도 마음을 쥐고 흔드는 훌륭한 소설들은...고전이 되겠지요. 그래서 고전이 달리 고전이겠습니까.
번역은 좋았어요. 박경희라는 분인데 독일에서 번역학을 공부하셨네요. 독일 소설을 더 많이 번역한 거 같은데 영어도 잘 하시나 봅니다.
주말 계획을 달성했는데 주말이 아직 반 남았습니다! 그래서 계획은 널널하게 세워야 합니다. 하하
2023.03.27 02:30
2023.03.27 09:45
이 책은 장편 중 짧은 편에 속해서 이입할 인물들이 없어도 읽기에 무리는 없었어요. 좋았다고 하긴 어려워서 그렇지만요. 게다가 전반엔 두 인물이 자기 일에 충실한 면이 나오고 큰 하자가 없었는데 뒤로 가면서 얄팍한 본 모습이 드러나더니 끝부분 가면서 급 흑화. '고생'까진 아니고 ㅎㅎ 약간의 당혹감은 있었습니다. 영국 문화의 한 부분을 이루지 싶은데, 상류 계층 까발리는, 그런 계통입니다.
댓글 없는 글이 외로울까 이래 야심한 시간에 글을 달아주셨네요. 일 년 전쯤만 해도 댓글이 없으면 의기소침했는데 이제 짬밥이 생겼는지 그렇게 개의하지 않습니다!(진짭니다. 예전보다는.. 진짜예요) 하여간 감사합니다.ㅎㅎ
2023.03.27 10:41
2023.03.27 17:06
저도 전체적인 수준보다 어떤 부분에 꽂혀 좋아하는 경우도 많은데 이 작가의 경우엔 아직 미처 발견을 못하고 있나 봅니다. 이분 소설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는 아주 좋더라고요.
책을 보면 요즘엔 눈도 따갑고 목도 아프고 ㅎㅎ 속도 내기가 힘들어요. 쏘맥 님 추천 도서도 함 올려 주세요.
집에 멍이님 건강은 어떤가요. 잘 지내고 있으면 좋겠네요.
2023.03.27 10:47
전 이 책을 '한영애의 문화 한 페이지'에서 듣고 사서 읽었죠. 그런데 정작 책은 라디오로 들었을 때보다는 재미가 덜했습니다. 플롯과 결말은 절묘하다는 느낌이 들고 라디오에서 듣고 받았던 인상도 바로 그거였는데 책에서는 말씀대로 그 전개 과정이 석연치 않았달까? 좀 그랬어요. 그리고 저는 둘 중에 그나마 클라이브 쪽에 조금 이입하면서 읽어서 그런지 마지막 버넌의 행위에 조금 분노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작곡가로서 묘사한 클라이브가 얼마나 실제 작곡가와 비슷한지는 모르겠는데 작곡하는 과정이 설득력이 있어서 그 부분은 재미있었어요. 버넌도 진짜 편집국장 같은 느낌이었고... 직업의 디테일한 묘사는 좋았던 것 같네요.
2023.03.27 17:18
찾아 보니 가수 한영애 씨가 진행했던 라디오 프로그램이네요. 책 소개 꼭지가 있었나 보네요.
앞 부분에 설치한 이런저런 장치가 뒤에 잘 활용되는 것은 눈에 팍팍 띨 정도였어요. 그래서 기교가 뛰어나다고 하나 봐요. 두 사람이 직업에 거의 전부를 쏟고 살고 있는 점이 후반의 행위의 이유라고 이해하려 해도 좀 무리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저도 버넌 쪽이 조금 더 급작스레 느껴졌고요. 그런 생각을 두 사람이 동시에 한다는 거 자체가 부담스런 전개였어요.
제게 장편 소설 한 권이란 영화 한 편보단 드라마 한 시즌의 호흡에 가까워요. 이건 뭐 사람마다 다르겠지만 전 그런데요. 영화 한 편이라면 비호감 무리들이 우루루 몰려나와서 지들끼리 주인공도 맡고 반동 인물도 맡고 그래서 서로 싸우든 연애를 하든 이야기만 대략 흥미로우면 충분히 따라갈 수 있는데, 드라마 한 시즌이라면 무리죠. 주요 인물들 중에 누구 하나라도 정 가는 캐릭터가 없으면 못 견딥니다. ㅋㅋ 말씀대로 주요 인물 넷이 싹 다 비호감이라면 뭐, 재미를 느끼는지 여부를 떠나 완주만으로도 훌륭한 일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드네요. 고생하셨습니다.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