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2.09 23:16
최근 몇달은 육체적으로 꽤 고됐어요. 딱히 힘든 일이 많았다기 보다는 그것을 소화해야할 피지컬이 노쇠한 거겠죠.
예전엔 다 깡으로 버텼다고 하는 그런 얘기들도 따지고 보면 깡이 아니라 체력이었던 것 같아요,.
며칠 전에는 정말로 피곤한 몸으로 퇴근했어요. 이래저래 몸과 마음이 지쳐 집에서 아이와 대화할 에너지도 없었던 것 같아요.
"아빠. 아빠. 있잖아. 오늘 000에서 00가.."
"나중에 얘기하면 안될까? 아빠가 지금 힘이 너무 없단다."
"응!"
천천히 옷을 갈아입고 씻은 후 쇼파에 앉았어요.
"아빠. 아직도 힘이 없어?"
당시의 제 심정은 정말로 아이의 말을 들어줄 자신이 없었습니다. 끝내 다정할 자신이 없었죠.
"응. 조금만 있다가 "
아이는 더 보채지 않고 곁에서 조용히....제가 힘을 내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아이를 가만히 쳐다보다가 우리 둘이 채 몇분도 되지 않은 사이에 있었던 셋팅에 진심으로 응해주기로 했습니다.
이 녀석 얼굴을 보면서 점점 힘을 내야지.
그리고 힘이 어느 정도 채워졌을 때 최고로 다정한 얼굴로 오늘 있었던 00와의 일을 들어주자.
"자. 이제 힘이 다 채워졌다."
아이는 아까의 대화를 방금 전에 했었던 것 처럼 이어갔습니다.
"00가 선생님한테 엄청 혼났는데 하면 안되는 말을 해서 혼난 거거든? 근데 난 처음 들은 말인데 그 말은 절대로 해서는 안되는 말이래."
"그게 무슨 말인데?"
"하면 안되는 말이라서 할 수는 없어."
"그래도 해줘. 아빠 궁금해."
"안돼. 근데 나도 하고 싶긴 한데... 그래도 선생님이 절대로 하면 안되는 말이랬어."
"아...아빠 듣고 싶은데..."
"음..궁금해?"
"응"
"하면 안되는데 어떡하지? "
"괜찮아. 아빠한테는 괜찮아."
아이는 오늘 내내 그 말을 계속 하고 싶었던 거죠. 하루 종일 내내 그 말을 입밖으로 꺼내고 싶은 것을 참아왔던 거에요. 그래서 제가 오기만을 기다렸던 것 같습니다.
아이는 잔뜩 들뜬 표정으로 제게 다가왔어요. 그리고 제 목을 팔로 감고 귀에다 대고 조그만 목소리로 속삭였습니다.
"........ㅆ ㅣ 팔"
뜬금없지만, 그 순간 몸에 닭살이 돋을 만큼 좋은 냄새가 났습니다. 긴장됐던 몸과 마음이 푹신푹신 이완되는 냄새.
모든 상황과 맞물려 지금 이 순간을 위해 지난 몇달이 존재했던 것 처럼 충격적으로 좋은 냄새가요.
아이는 그러고는 웃으면서 도망가버렸어요.
아빠 귀에다가 쌍욕을 속삭이고 도망가는 자식이라니....
2022.12.10 00:53
2022.12.10 03:11
2022.12.10 08:12
올해들어 읽은 글중에서 제일 따뜻한 것 같아요. 나누어주셔서 감사합니다. 아이에게뿐 아니라, 자신에게도 다정함을 잃지않으시기를.
2022.12.10 12:50
다들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이런 이야기들이 되게 많은데 용기를 내서 몇 개 더 풀어보고 싶네요.
앗. 그런데.... 지인들이 보면 알 수 있는 사연들은 안되겠군요. 듀게에 제가 있다는 것은 비밀입니다. ㅎㅎ
2022.12.10 15:23
꼭 좀 풀어주시길 바랍니다. 오늘 가봄님글을 보고 저도기운을 좀 내어서 제 아들에게 좀 더 신경을 쓰게 된 하루였어요. 다짐이 얼마 오래 안갈것 같긴하지만요. 하하..
2022.12.13 18:42
아...
저 먼 나라 스웨덴에 있는 저도 웃습니다. 너무 사랑스러워요. 하하
저의 아들은 아직도 '엄마 힘들어 Charge 해야해' 하면 옆에 와서 붙어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