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1.15 02:28
- 2006년 영화입니다. 장르는 뭐, 그냥 드라마라고 봐야겠죠. 그것도 역사 드라마! 런닝 타임 2시간 17분. 결말 스포일러는 피할 게요.
(대부분의 포스터 이미지들이 뭔가 에로틱 스릴러스런 분위기인데 반해 요건 멀쩡하다... 싶었는데 본토 포스터네요.)
- 때는 1984년, 동베를린입니다. 주인공은 슈타지의 유능한 요원으로 현역으로 뛰면서 후진 양성 일도 하고 있는 '비슬러'라는 양반이에요. 건드리면 바사삭 소리가 날 것 처럼 건조한 표정에 감정을 드러내지 않고 자기 일에 충실합니다. 라고 하면 부정적으로 들리지만 뭐랄까, 알고 보면 되게 이상적이고 순수한 구석이 있죠. 그 나이를 먹고도 정말로 자신이 일하는 체제와 그 이상에 궁서체로 진지한 사람이거든요. 어떻게 보면 멍청한 것 같기도 하고... (쿨럭;)
암튼 이 양반이 어찌저찌해서 극작가와 배우 커플을 도청하게 되는 게 발단입니다. 타겟은 극작가이고 이 놈의 약점을 찾아내서 매장시켜 버리고픈 높으신 분의 개인적 욕심으로 굴러가는 미션인지라 좀 별로입니다만 그래도 조국을 위해서라면! 이란 맘으로 성실하게 열정적으로 임무에 임하는 주인공인데요. 계속 도청을 하다 보니 이 두 사람과 그들의 삶이 꽤나 매력적이기도 하고. 또 이 도청을 통해 자꾸 접하게 되는 이들의 예술 세계나 취미도 빠져들게 되는 면이 있구요. 그렇게 이들의 삶에 과몰입해 버린 주인공은 어느샌가 이들의 삶에 개입을 하기 시작합니다. 그리고 이 때 쯤 드디어 작전의 목적인 '큰 건수'가 드러나기 시작하는데...
(드디어 이 익숙하기 짝이 없는 스틸샷을 직접 영화로 확인했다구요!)
- 실제 역사를 진지하고 무겁게 다루는 이야기 별로 안 좋아합니다. 비극적 드라마도 별로 취향이 아닌 데다가 예술가들이 나오는 이야기는 좀 더 별로에요. 그냥 제 취향이 그런 거니 뭐라 해명(?)할 생각은 없습니다만. 암튼 그래서 개봉 당시 그렇게 호평이었던 이 영화도 안 보고 건너 뛰었죠. 도청 & 심문 전문가가 주인공이고 당연히 스릴러 요소가 있다는 걸 알고 있었지만 취향의 힘이란 그렇게 강력한 것인지라... ㅋㅋ 그래도 소재만 놓고 보면 제 취향과 닿는 부분이 좀 있으니 계속 미련만 품고 있다가 어제, 뭘 볼까 고민하기 싫어서 찜 목록에서 대충 재생 버튼을 누지른 게 이 영화였네요. 어쨌든 이렇게 16년만에 또 숙제 하나 해결!
(은근히 디테일이 좋은 영화이기도 합니다. 도청 타겟 집(아마도 바로 아랫층)의 구조를 바닥에 그려 놓은 모습.)
- 영화의 초반과 마지막에 주인공 극작가의 연극 공연 장면이 나옵니다. 일단 짧지만요. 그리고 이 연극의 원래 주연 배우가 바로 극작가의 애인이죠. 그리고 주인공은 이 커플의 삶을 뭔가 실시간 무대본 드라마 감상하듯 즐겨요. 그러다가 나중엔 이 사람들 삶에 끼어들어서 스토리를 만들고 결말까지 만들어 버리죠. 그러니까 연극을 연출하는 사람들의 인생을 연출하는 사람의 이야기인 겁니다. 이렇게 겹겹이 형성되어 있는 이야기 구조가 재밌더라구요. 아마 똑똑하신 분들이라면 이걸 떡밥 삼아 창작자 - 작품 - 수용자의 관계에 대해서 몇 페이지가 넘는 분량의 이야기를 풀어 놓으실 수 있겠지만 전 그런 사람이 아니어서. ㅋㅋㅋ
('구 동독 체제 그 자체'를 온몸으로 맡고 계신 센터의 빌런님. 아 근데 뭔가 인상과 체구가... 아, 아닙니다;;;)
- 보는 내내 구동독의 지배층은 정말 쓸 데 없을 정도로 열정적인 변태들이었구나. 라는 생각을 했습니다. 극중에서 묘사되는 모습이 얼마나 현실을 제대로 반영했는진 모르겠지만 암튼 이 영화 내용을 기준으로 생각하면 감시해야할 대상이 너무나도 많았을 텐데요. 그걸 또 대충도 아니고 이렇게 각 잡고 감시하려면 거기 들어갈 인력과 시간과 돈이... 농담이지만 '이딴 데 돈을 쓰니 나라가 그 꼴이 났지!' 라는 생각이 절로 들었습니다. 대체 동독 리즈 시절에 슈타지는 전부 몇 명이나 되었던 거에요? 이렇게 슬림하지 않은 정부라니 허허. 곤란하군요.
(거대한 관료주의 조직으로 인간 소외를 일으키는 사회 속 개인의 비극을 풍자해보고자 열심히 구도를 잡아 보았습니다!)
- 어찌보면 정말 고루하다 싶을 정도로 '정통 멜로'의 길을 따라가는 이야기입니다. 적어도 극작가 커플의 경우엔 그래요. 뭔가 되게 익숙한 느낌이기도 하구요. 일제 강점기 역사 때문에 한국에서도 대략 비슷한 이야기들 종종 나왔죠. 비밀 저항의 길을 택한 젊은 이상주의자 예술가, 서로에게 위협이 되는 상황에 빠져 버리는 슬픈 연인. 이야기를 파국으로 몰고 가는 나아쁜 역사와 그 역사의 하수인들. 이런 장르를 싫어하다 보니 참 오랜만에 이런 걸 봤는데. 괜찮았습니다. 생각 외로 이 커플들 이야기가 디테일이 풍성하고 입체적으로 잘 짜여졌더라구요. 뻔한 이야기를 안 뻔하게 만들어냈다. 라는 말로만 쉬운 것을 잘 해 낸 각본이었습니다.
(참 뻔한 설정과 구도로 만들어진 인물들인데도 다들 절실하게 느껴지니 그냥 각본을 잘 썼다고 밖엔.)
'정통적'인 걸로 따지면 주인공 비슬러의 스토리 라인도 만만치 않아요. 세상과 교류 별로 없이 고독하게 살며 자신의 일에만 단순 고지식하게 집착하던 양반이 자기가 멀리하던 부류와 함께 하다 영향을 받아 변화하는 이야기이기도 하고. 또 이런 '저항 운동가' 스토리 라인에서는 거의 필수 요소급으로 들어가는 캐릭터인 것인데요. 이것도 역시 좋았습니다. 일단 주인공이 그렇게 변심하도록 영향을 주는 과정이 디테일하면서도 다채롭게(그냥 그 커플의 인간적 매력, 그들 때문에 전해 듣게 되는 예술 작품들, 그 시국에 눈 앞에 벌어지는 권력층의 부패상 등등) 보여져서 설득력이 있었구요. 뭣보다 배우님이 참. '와 독일 사람이다!'스럽게 생기신 분께서 '고독한 독일 아저씨는 이럴 거야'라는 선입견을 그대로 형상화한 것 같은 캐릭터를 연기하시는데 뭔가 그냥 설득력이 쩌는 느낌. ㅋㅋ 게다가 은근히 귀여운 구석도 있으셔서 이대로 걍 해피엔딩 코믹극으로 가도 재밌지 않았을까, 뭐 그런 생각을 하며 열심히 봤습니다.
(귀엽지 않습니까?)
(격정적 예술가 Life의 폭풍 바이브에 빠져 들어 버린 비련의 주인공님.)
- 그 와중에 스릴러스러운 측면에서도 꽤 괜찮았어요. 사실 주인공 커플에게 닥치는 위기들은 걍 당연하게 받아들여졌는 데 반해 주인공 본인에게 계속해서 닥치는 위기 상황들은 상당히 쫄리더군요. 생각해보면 당연하네요. 그 커플들이 뭔 일을 벌일 땐 늘 수호천사 주인공이라는 쉴드가 작용하고 있었지만 정작 주인공 본인은 계속해서 쉴드 하나 없는 맨 몸으로 그러고 있었으니. 또 주인공이 그 커플 생각해서 해주는 일들이 계속해서 오히려 일을 나쁜 쪽으로 진전시키는 전개들도 아이러니한 느낌 들면서 재밌었구요.
그리고... 나름 유머도 꽤 있는 영화였습니다. 볼 땐 몰랐는데 다 보고 나서 생각해보니 그래요. 특히 막판에 주인공이 일하는 곳에서 뒷자리 앉아 있던 양반이 초반에 식당에서 서기관 동지 갖고 드립 치다가 진땀을 뺐던 그 분이라든가... 라는 건 분명히 유머였겠죠. ...그랬겠죠? ㅋㅋㅋㅋ
(자고로 저항 좌파 지식인들이란 이렇게 좀 지저분 룩을 해줘야 제맛이죠.)
- 암튼 뭐.
역사적 비극을 진지하게 다루면서 또 예술 만세! 도 외치고. 그 와중에 휴머니즘에서 희망도 열심히 찾구요. 여러가지 떡밥들을 하나로 잘 엮어서 재밌게 잘 짜낸 영화였습니다. 제 취향은 아니지만, 잘 만들어서 그냥 재밌게 잘 봤구요.
특히 역사도 잘 알고 예술에도 관심 많은 교양인 분들께서 보시면 훨씬 재밌게 보실 것 같은, 그런 영화였네요. 비꼬는 게 아니라 정말로 그런 느낌이었어요. ㅋㅋㅋ 여튼 이렇게 왓챠의 찜 목록에서 또 하나를 지워봅니다.
+ 에필로그격... 은 아니고 그냥 최종 엔딩으로 가는 과정에서 나오는 도서관 장면에서 깜짝 놀랐습니다. 아니 그 시절에 이미 그렇게 일반 대중들에게 정보 공개를 다 했다구요? 보면 2차 대전 후의 모습도 그렇고 독일인들은 여러모로 지구 최강의 반성문 특화 민족이 아닌가. 그런 생각이 들었네요. 애초에 그럴 짓을 안 했다면 더 좋았겠지만요.
2022.11.15 08:12
2022.11.15 15:38
네 참 여러모로 잘 만든 영화이고 특히 영화제 같은 데서 각광 받을(?) 스타일 영화구나... 싶었어요. 역사와 예술 얘기 하면서도 뭐 특별히 어렵거나 헷갈릴 것 없이 쉽게 쉽게 잘 풀어내는 실력도 인상적이었구요.
와이프가 그런 일 하는 사람이었다니 세상 참 재밌네요. ㅋㅋ 연기하는 데 도움도 받고 그랬을 것 같은데, 바로 다음 해에 돌아가셨다니 더 농담은 못 하겠구요.
네 좀 씁쓸한 유머여야 영화 톤이랑 어울리니까요. 전 마지막에 주인공 친구 겸 상사가 주인공에게 '20년' 드립 친 것도 그런 류의 다크한 유머 같더라구요. 20년이 뭐임 이제 장벽 붕괴 몇 년도 안 남았구먼. ㅋㅋ
2022.11.15 16:43
감독이 이 작품으로 유명세를 얻고 곧바로 할리우드에 가서 안젤리나 졸리, 조니 뎁이랑 투어리스트라는 영화를 찍었는데 폭망했던 모양이더라구요;;; 이후로 오래 절치부심하고 2018년에 작가미상이라는 자국 작품으로 돌아와서 명예회복을 했습니다. 저도 꽤 좋게 본 작품인데 러닝타임이 3시간을 넘어가서 선뜻 추천해드리기가 그렇네요 ㅋ 참고로 타인의 삶에서 작가 역할로 나왔던 배우도 또 나옵니다.
2022.11.15 17:42
투어리스트 보지는 않았지만 기억은 나는데 그게 이 감독이었군요. ㅋㅋ 헐리웃 진출에서 성공이란 게 쉬운 게 아니죠 참...
2022.11.15 08:59
센터의 빌런 님은 무식하고 거만한 느낌이 많이 나네요. 다리가 보이지 않지만 틀림없이 쩍벌일 것 같고요.
개봉 때 본 영화지만 쓰신 글을 읽어도 세부가 잘 떠오르지 않아요. 이래 가지고선 교양인이 될 희망은 접어야, 아니 이미 접었다고 해야 겠습니다. 입력 조금 해 둬도 어디로 가버렸는지 다 휘발되어 버렸으니까요. 휘발되기 전에 재입력 과정이 계속 따라야 할 텐데 그런 부지런함은 턱없이 부족하고요. 초중고 때 입력해서 남아 있는 걸로 평생 밑천으로 사는 거 같기도 하고 ㅎㅎ
암튼 지금 희미한 기억에 예술가스러움이 부각되는 파트가 볼 때는 조금 거북했으나 다 보고 나서는 전체적으로 만족스러웠다는 것 정도예요. 다시 보고 싶은 생각이 듭니다.
2022.11.15 15:45
(그렇죠? 좀 인상이 비슷하죠? ㅋㅋㅋ)
아뇨 개봉 때 보셨으면 이미 16년 묵은 건데 그게 세부가 잘 떠오르면 대단한 겁니다. ㅋㅋ
'초중고 때 입력해서 남아 있는 걸로 평생 밑천' <- 이거 저도 많이 느껴요. 이후에 입력된 게 양은 훨씬 많은데 세월 지나면 오래 됐더라도 더욱 확고하게 기억에 박힌 게 살아남는 것 같더라구요.
2022.11.15 10:21
개봉때, 씨네큐브에서 봤던 것 같습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하네요)
영화의 많은 부분이 잘 기억나지 않지만, 결말 만큼은 아직도 뚜렷하게 기억나요.
당시, '아.. 완벽한 결말이구나.' 라고 생각했던 것 같습니다. 참 좋은 시나리오 였어요. 오랜만에 다시 떠올릴수 있어 좋네요.
2022.11.15 16:14
네 결말 참 적절하게 잘 맺었죠. 처음엔 뭐가 이렇게 길지? 했었는데 마지막 장면 찡하게 보고 나면 그게 다 필요했구나 싶었구요. 이렇게 '좋은' 영화들을 많이 안 보지만 그래도 이 정도로 잘 만들어 놓은 걸 보면 감동도 받고 기억에도 남고 그렇더라구요. ㅋㅋ
2022.11.15 18:26
제목까지 좋았던 영화입니다.
2022.11.15 19:47
대략적으로만 알고있던 당시 독일상황을 잘 모르는 관객도 확 와닿도록 초반부터 효과적으로 어떤 시대였는지 각인을 시켜주고 각 캐릭터들 설정이나 메시지가 말씀대로 뻔하다면 뻔하지만 전개는 그렇지 않으면서도 어느정도 예상은 되는 결말을 정말 아직도 생생히 기억나는 감동과 여운으로 맺은 명작이었죠.
주인공 맡으신 분이 개봉 다음해에 돌아가셨더라구요? 그런데 나중에 밝혀진 바로는 아내분이 예술가들 감시하는 실제 슈티지였다는…
저 보기만해도 비호감이 철철 넘치는 동독악역 배우분은 류승완 베를린에서도 비슷한 역할로 나왔었죠. 죄송하지만 아무래도 외모 분위기가…
그 서기관 동지 드립 캐릭터는 유머 맞기는 맞는데 되새길수록 뒷맛이 영 씁쓸한 장치이기도 하죠 ㅋㅋ 참 야만의 시대였구나 싶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