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밤중에 전화 걸기

2010.06.27 23:53

차가운 달 조회 수:3372




얼마 전 자정 무렵에 한 통의 전화를 받았어요.
한때 제가 사랑했던 여자에게서 온 전화였죠.
그녀는 멀리 떨어진 도시에 살고 있었어요.
아파트 단지 한쪽에 세워둔 자신의 차에서 전화를 걸고 있다고 했죠.
한밤에 걸려온 전화는 흔히 불길한 예감이 들게 하지만
그녀는 단지 홈플러스에 가려고 집을 나섰다가 문득 제가 생각나 전화를 걸었던 것뿐이죠.
마지막으로 통화를 한 것은 육칠 개월 전쯤이었던 것 같네요.
자주 통화를 하지는 않았죠.
우리 사이의 일들은 이미 오래전에 끝났으니까요.
어떻게 살고 있는지 정말 궁금해지면 한 번씩 전화를 하는 정도라고나 할까요.

이 시간에 무슨 홈플러스에 가느냐고 했더니
그냥 답답할 때면 한밤중에 그곳에 가는 걸 좋아한다고 하네요.
별다른 얘기는 없었어요.
말 그대로 안부 전화였죠.
그녀는 제가 어떻게 지내는지 묻고, 또 자신이 요즘 어떻게 지내는지 조용조용 늘어놓더군요.
그리고 결혼할 남자에 대해서도 얘기했어요.
예전에도 그 남자에 대한 얘기를 들은 적이 있죠.
때로는 집착이 느껴질 정도로 자기를 사랑해주는 사람이라고 하더군요.
그녀는 얘기를 나누는 도중에 차 안에서 바라보는 풍경에 대해서 한마디씩 했어요.
저기 어떤 남자가 지나가는데 술에 취한 것 같다든지, 지금 택시에서 내린 여자가 누군지 알고 있다든지, 뭐 그런 얘기 말이에요.
결혼을 하고 나면 전화를 하지 않을 거라는 말도 하더군요.
저는 그렇게 하라고 했어요.
정말 별 얘기는 없었는데도 꽤나 오래 통화를 한 것 같아요.
저는 그냥 그녀의 얘기를 들으면서 고개를 끄덕이듯 한마디씩 던질 뿐이었죠.
오빠한테 전화해서 이런 얘기나 하니까 이상해?
그렇게 묻기에 그렇지는 않다고 대답했죠.
그런데도 그녀는 왜 이 시간에 전화를 해서 이런 얘기를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혼잣말처럼 중얼거렸어요.
잘 지내라는 인사를 나눌 때까지도 정말 별다른 말은 하지 않았죠.

통화가 끝난 뒤 밖으로 나가 담배를 한 대 피웠어요.
멀리 어둠에 묻힌 산들이 있었죠.
머릿속에서 영상이 제멋대로 떠올랐어요.
사람 없는 한밤의 대형 마트,
혼자서 카트를 끌고 물건이 잔뜩 쌓인 미로 같은 진열대 사이를 돌아다니는 여자의 모습 말이에요.

짧은 연애였죠.
우리가 연인이었던 기간은 고작 보름 정도에 불과하니까요.
헤어졌을 때 우리는 함께 찍은 사진 한 장 없었어요.
헤어진 뒤에도 친구처럼 지낸 사이인가 하면, 그것도 아니에요.
우리는 아주 불쾌한 방식으로 헤어졌죠.
제 삶에서 누군가에게 그토록 화를 냈던 적은 처음이었어요.

하지만 그해 여름 제가 그녀를 사랑했던 것만은 분명하죠.
제게 있었던 단 두 번의 연애 가운데 첫 번째 연애였어요.
그녀는 잘 모르겠어요.
그녀가 저를 사랑했던 방식은 어떤 건지 정말 잘 모르겠어요.
그 사랑에는 좀 이해하기 힘든 구석이 있어요.

고작 보름이었지만 그 연애는 제 삶에 뭔가를 남겼어요.
이상하죠, 그 짧은 시간이 한 사람의 삶에 오래 지속되는 뭔가를 남긴다는 것이.
지금은 다 끝났어요.
아무래도 상관없죠.
이제는 더 이상 그녀가 전화를 하는 일도 없을 거예요.

다만 사소한 궁금증이 한 가지 남을 뿐이에요.
그녀가 전화를 했을 때,
정말 차에 올라타 시동을 걸기 전 문득 제가 생각나 아무렇지도 않게 통화 버튼을 누른 걸까요?
아마도 그게 맞겠죠.
예전에 우리가 연인이었을 무렵 그녀는 자신이 단순한 사람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했으니까요.
단순하게 살고 싶다, 복잡한 건 싫다, 그런 말을 자주 했어요.
아마도 그래서 우리가 헤어졌다는 생각을 해요.

누구에게나 답답한 밤은 있겠죠.
혼자서는 도저히 감당하기 힘든 그런 기분을 느끼는 밤이 있겠죠.
그것이 어떤 감정이든 상관없이 말이에요.
저도 그래요.
누군가에게 무슨 얘기라도 하고 싶은 밤이 있어요.
아무 얘기라도, 아무 쓸데없는 얘기라도.

어둠 속에 누워서 핸드폰의 주소록을 뒤지는 밤이 있어요.
하지만 아무도 없어요, 전화를 하고 싶은 사람이 없어요, 아니 전화를 할 수 있는 사람이 없어요.
친구도 소용없는 밤이 있어요.
몇 번이고 주소록을 다시 살펴보지만 결국 아무에게도 전화를 걸지 못해요.
누군가와 얘기를 하고 싶지만 그게 아무라도 좋다는 의미는 아니거든요.

누군가가 있었으면 좋겠어요.
전화를 할 수 있는 누군가가.

차를 타고 30분 안에 닿을 수 있는 곳에 홈플러스가 있죠.
저도 정말 답답한 밤에는 거기나 가볼까 봐요.
그럼 좀 나아질까요.
사람 없는 매장을 한 바퀴 돌아
무엇을 사서 돌아오면 좋을까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2015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0993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1304
125195 개고기 식용금지 [11] 메피스토 2024.01.11 476
125194 [디플]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아메리카 [2] S.S.S. 2024.01.11 203
125193 프레임드 #670 [2] Lunagazer 2024.01.10 66
125192 윙코맨더 4 예고편 [1] 돌도끼 2024.01.10 103
125191 코난 잡담 두번째 돌도끼 2024.01.10 99
125190 비공식작전과 교섭을 봤어요... [1] 왜냐하면 2024.01.10 252
125189 [넷플추천] 안데스 설원의 생존자들 [10] LadyBird 2024.01.10 425
125188 2024 새해 첫 촛불집회 다녀왔습니다! [2] Sonny 2024.01.10 217
125187 악의적 포커스, 이재명을 둘러싼 논쟁을 보고 [1] Sonny 2024.01.10 342
125186 잡담 - 이런저런 영상물 [4] DAIN 2024.01.10 236
125185 [왓챠바낭] '베어' 전에 이런 영화가 있었군요. '보일링 포인트' 잡담입니다 [8] 로이배티 2024.01.09 361
125184 새해를 사는 이야기 [1] 가끔영화 2024.01.09 166
125183 프레임드 #669 [2] Lunagazer 2024.01.09 76
125182 이런 영화 좋아하실 분들도 계실 듯 murder a la mod [2] daviddain 2024.01.09 196
125181 (바낭) 노스텔지어를 자극하는 껌 광고 [1] 왜냐하면 2024.01.09 162
125180 넷플릭스 신작 원데이 예고편 상수 2024.01.09 257
125179 끝까지 똥물 뿌리는 류호정 [2] 사막여우 2024.01.09 630
125178 [근조] 프란츠 베켄바워 [2] 영화처럼 2024.01.09 206
125177 [넷플릭스바낭] 추티몬 추엥차로엔수키잉님만 믿고 갑니다. '헝거' 잡담 [8] 로이배티 2024.01.09 318
125176 연상호각본 김현주 넷플릭스 신작시리즈 선산 예고편 [2] 상수 2024.01.08 430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