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토요일) 밖에 나가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다시 찾아온 한파 때문에 꽤 추운 날이었죠. 추운 날이지만 밖에 일이 있어서 일을 보고 밤에 들어오는 길이었는데 길 한복판에 어떤 아저씨가 누워 있더군요. 저는 술에 취해서 주사를 하는 사람들은 물론이고 구토를 하는 사람, 몸을 제대로 못가누고 휘청대는 사람, 그리고 이번처럼 길거리에 누워 자는 사람들을 경멸하는 편입니다. 저도 술을 가끔 마시기는 해도 그 정도 상태가 될 때까지는 마시지도 않고 마시고 싶지도 않거든요. 좋을게 하나도 없잖아요. 즐겁지도 않고. 아무튼 그런고로 평소에 그런 사람들을 길에서 봐도 그냥 지나쳤는데, 이번 경우는 길 한복판에 사람이 누워있는 것이기도 하고 날도 날인지라 그냥 지나갈 수는 없겠더군요. 거기다 주차된 승합차 바로 뒷부분이기도 해서 더 위험했죠. 그걸 보지 못하고 운전자가 탑승하여 후진이라도 하면 큰일나니까요.

제가 일어나시라고 여러차례 소리치니 다행히 사람은 움직입니다. 그러나 술마시고 자기 몸 제대로 못가누는 사람들 특성상 소리에 반응만 보이는 정도였죠. 오늘 같은 날 여기서 누워자면 얼어죽으니 빨리 일어나시라고 여러번 소리치니 그제서야 정신이 조금 들었는지 돌아 누워서 눈을 뜬 후 멀뚱멀뚱 저를 쳐다보며 당신 누구냐고 묻더군요. 대충 살펴보니 나이는 50대쯤 돼보였고, 행색은 초라해보였습니다. 돌아 누울 때 패딩점퍼 안쪽에는 옷에서 아직 떼지 않은 도난방지택까지 슬쩍 보였습니다. 그래도 노숙자까지로는 안보였습니다. 오랫동안 씻지않은 특유의 냄새도 나지 않았고요.

일어날 생각을 안하고 자꾸 누구냐고 묻기만 하길래 안일어나면 경찰에 신고할테니까 어서 일어나시라고 얘기하니 그제서야 엉금엉금 기는 듯한 자세를 취하며 일어나시려고 하더군요. 사실 여기까지 그리 오래걸린건 아니지만 그래도 2분은 걸렸던 것 같습니다. 한 두번 소리치는 말에 제깍 일어날 사람이었다면 거기에 드러눕지도 않았겠죠. 아무래도 잘 못일어나시는 것 같아서 한쪽 겨드랑이를 부축해드리니 혼자 일어날 수 있으니 놓으라고 그럽니다. 저는 손을 떼고 집이 어디신지 모르지만 어서 집에 들어가시라고 했죠. 그 때까지 술에 취해서 거의 정신이 없는 줄 알았는데 갑자기 어느 정도 정신이 돌아온 듯 보였습니다. 같은 질문이지만 아저씨는 아까와는 다른 또렷한 톤으로 누구시냐고 묻더군요. 정신도 꽤 돌아왔고 몸도 가눌 수 있는 것처럼 보여서, 아저씨가 묻는 말에는 대답하지 않고 추우니까 어서 집에 들어가시라는 말을 하고 저는 돌아섰습니다.

저는 전혀 기대하지 않았는데 돌아서는 제 뒤통수에 대고 아저씨가 '정말 고맙습니다' 하고 두 번이나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 순간까지만 해도 사람 하나 살렸다는 느낌 보다는 또 술취한 진상 하나 만난 듯한 느낌을 가졌는데 그 말을 듣고나니 갑자기 마음이 따뜻해지면서 뿌듯한 느낌까지 들었습니다. 그제서야 좀 실감이 나더군요. 오늘 같은 날 술먹고 노숙하다간 동사는 시간문제 아닙니까. 누군가 깨워주지 않으면 위험하죠. 실제로 제가 그 앞까지 가는 동안 몇 사람이 누운 사람을 피해서 지나치기도 했고요. 제가 깨우는 동안에도 사람들은 피해가기만 했죠. 뭐 그렇다고는 해도 제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깨웠을 가능성은 높았을 겁니다. 길 한복판이기도 했고 날도 이렇게 추운데 모두가 그냥 지나치지는 않았을테죠.

이런 거 자랑처럼 여겨질 수 있어서 쓰기가 약간 꺼려졌지만 나름 처음있는 경험이기도 해서 올려봅니다. 여러분들(특히 여성분)도 이런 일이 생겼을 때 선뜻 돕기는 어렵더라도 얼굴 찌뿌리고 피해가지만 말고 경찰에라도 신고해주시면 어떨까 합니다. 특히 이런 추운날에는 말이죠. 그런데 집에 와서 보니 제대로 집에 들어가시는지 어느 정도 확인을 해주거나 아니면 진짜 경찰이라도 불렀어야 하는거 아닌지 하는 생각이 드네요. 정신을 어느 정도 차린 듯해서 그냥 오긴 왔는데 살짝 아쉬움은 남네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29923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48880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59172
125238 끌로드 샤브롤의 [의식]을 다시 봤습니다 [6] Sonny 2024.01.15 202
125237 컴퓨터가 반고장나면 좋은 점 [3] catgotmy 2024.01.15 167
125236 오바마 전 대통령의 2023 추천작 리스트 [3] 상수 2024.01.15 380
125235 2024 Critics’ Choice Award Winners [1] 조성용 2024.01.15 146
125234 류츠신 원작 넷플릭스 시리즈 삼체 공식 예고편 [5] 상수 2024.01.15 364
125233 [왓챠바낭] 추억으로 즐겁게 봅니다. '종횡사해' 잡담 [6] 로이배티 2024.01.14 325
125232 프레임드 #674 [4] Lunagazer 2024.01.14 77
125231 컴퓨터가 망가지고 [2] catgotmy 2024.01.14 190
125230 홍콩느와르에 대해 생각해봤어요 [4] 돌도끼 2024.01.14 338
125229 라면 선전하는 아놀드 [2] 돌도끼 2024.01.14 320
125228 [왓챠바낭] 참 잘 했어요 왓챠. '이것이 스파이널 탭이다' 잡담입니다 [20] 로이배티 2024.01.14 385
125227 이런저런 본 것 들(카지노 스포일러) 메피스토 2024.01.13 159
125226 Children of Dune/린치의 듄 메시아 각본 [1] daviddain 2024.01.13 189
125225 누구일까요? 엄친아를 가볍게 뛰어넘는 사기캐 [4] 왜냐하면 2024.01.13 531
125224 이선균과 휴 그랜트 한국문화 [4] catgotmy 2024.01.13 604
125223 2023년 기준 세계 영화감독 흥행순위 [3] 상수 2024.01.13 496
125222 홍콩의 겨울은 참 좋군요 [2] soboo 2024.01.13 363
125221 프레임드 #673 [4] Lunagazer 2024.01.13 62
125220 [ott 간단 후기] 베니스 살인사건, 굿 닥터 시즌 6, 경성크리쳐 0.5 [14] 쏘맥 2024.01.13 356
125219 [핵바낭] 그냥 잡히는대로 일상 잡담 [17] 로이배티 2024.01.13 503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