명절 부근에 만나게 되는 나보다 나이가 많은 사람이 나를 힘들게 하는 것 중 하나가 과거를 꺼내어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 지나간 시간에 대한 이야기는 처음 듣는 얘기도 아니고 여러 차례 들은 이야기가 대부분입니다. 이야기의 내용은 그들이 어리거나 젊은 시기에 경험했던 일이거나 지금은 저세상으로 가신 분에 대한 기억 같은 것입니다. 예전에는 그 얘기 몇 번째 한 거잖아, 라고 끊기도 했었는데 언젠가부터 아무말 없이 듣거나 듣기가 정 괴로울 땐 딴 생각을 하더라도 말하는 사람을 중단시키지는 않습니다. 심지어 내가 더 잘 알고 있는 일이라 말하는 이가 왜곡시킨다는 것을 아는 경우에도 별말 보태지 않기도 하고요. 


나이 들면 왜 자꾸 지나간 이야기를 하게 되는 것일까. 되새길만한 중요한 일은 과거에 일어났으며 더이상 새로 생긴 일에 큰 흥미가 없어서 그런 것이기도 하겠지요.

그리고 시간이라는 것이 현재 이 순간일 뿐이라면 참 의미 없고 하찮다는 것이 느껴져서가 아닐까 생각됩니다. '시간이, 지나간 세월이 찰나의 연속일 뿐'이라는 것에 대한 반발의 마음은 누군가 일깨워줘서가 아니고 그것에 대한 저항의 필요가 나이든 사람에게는 직감적으로 몸으로 느껴지므로 자신의 시간을 이야기화 하고 싶어하는 것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이렇게 하고자 함에 구체적 정보의 정확성이야 좀 떨어진들 어떻겠습니까. 


한병철 저자의 '서사의 위기'에 이를 뒷받침할 수 있는 구절이 있어서 옮깁니다.

'시간은 갈수록 원자화된다. 반대로 이야기는 연결을 의미한다. 프루스트에 따르면, 이야기하는 사람은 삶에 몰입하고 자신의 내면에서 사건들을 잇는 새로운 실을 뽑아낸다. 그럼으로써 고립되지 않은 관계들로 이루어진 조밀한 망을 형성한다. 그러면 모든 것이 유의미해 보인다. 이 서사 덕분에 우리는 삶의 우연성에서 벗어날 수 있는 것이다.' 

이 책은 사람에게 이야기가 어떤 의미인지 실존 인물과 문학 속의 인물들을 가져와서 변주해가며 설명하고 있습니다. 이야기가 없다면 시간은 파편화된 우연의 누적일 뿐이지 않겠느냐고. 그리고 청자의 모범으로 작품 '모모'의 주인공을 가져와 서술합니다. 저처럼 건성으로 듣지 않으며 화자를 몰아가지 않고 조용히 듣되 공감의 자세로 듣는 훌륭한 청자는 화자가 말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막힌 곳을 뚫을 수 있게 돕는다고.   



'서사의 위기' 나머지 부분을 조금 더 소개하겠습니다. 뒷 부분은 인간에게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가 현대에 와서 어떻게 변질되었는지 말하고 있습니다. 

스마트 시대인 현대에 이야기는 어떤 상태가 되어 있는지 - 신자유주의 체제에서 서사는 모든 사람을 스스로 자기 자신의 기업가가 되게 하며, 스스로를 생산하고 스스로를 공연하는 성과 서사(!)의 성격이 되었음을 말하면서 공동체 이야기의 형성을 어렵게 한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서사는 상업에 독점되고 스토리텔링이 아닌 스토리셀링이 되어 소비되고 있다고 합니다. '좋아요'를 통해서요.

이런 부분은 그저 세상의 변화다,라며 생각없이 꾸역꾸역 살다가 문득 '이야기'에서조차 소비자1로 자리한다는 것을 깨달으니 섬뜩하죠. '감정은 이성을 거치지 않고 행동에 영향을 미친다. 그럼으로써 인지적 방어 반응조차 피해가는 것이다. 자본주의는 이야기를 의도적으로 자신의 것으로 전유함으로써 전반성적(반성이 일어나기 이전) 층위의 삶을 점령해 버린다. 그럼으로써 의식적 통제와 비판적 성찰을 피해간다.' 

책의 마지막 부분을 좀더 옮겨 보겠습니다. '스토리텔링은 오로지 한 가지 삶의 형식, 즉 소비주의적 삶의 형식만을 전제한다. 스토리셀링으로서의 스토리텔링은 다른 삶의 형식을 그려낼 수 없다. 스토리텔링의 세상에서는 모든 것이 소비로 환원되기 때문이다. 우리로 하여금 다른 이야기, 다른 삶의 형식, 다른 지각과 현실에는 눈멀게 한다. 바로 여기에 스토리 중독 시대 서사의 위기가 있다.'


이용하는 인터넷 서점에 언젠가부터 '투비컨티누드'라는 개인 창작활동 지원 블로그?가 존재하고 있습니다. 무슨 글이든 가능하다는 면에서 네이버 블로그와 비슷하지만 책 이야기가 주가 됩니다. 주제나 글감을 정해서, 아님 일기 형식의 잡문이라도 글을 올리고 방문자 수, 구독자 수나 '좋아요' 수 같은 걸로 포인트 적립이 되는 거 같습니다. 좋아요를 누르는 사람도 소소한 적립이 되는 것 같고, 글쓴이는 자기 글을 유료화할 수도 있네요. 글 몇을 읽기만 해서 소소한 액수가 얼마인지, 정확하게 돌아가는 사정을 알진 못합니다만. 

한병철의 '서사의 위기'와 연결지어 생각할 거리가 되었습니다. '좋아요'를 많이 받는 글은 기존의 서점 활동 인맥이 있는 사람이 당연히 포함되고요. 일상 글은 재미와 정보, 책 관련 글은 세밀하게 읽은 글이면서 정보가 담겨 있으면 더 괜찮은 글이 되는 것 같습니다. 당연한 소리네요. 이 '투비'라는 곳에 글을 쓰는 사람 중엔 책을 내 본 사람도 보이고 책을 낼 기회가 없었거나 역량이 모자라거나 하지만 글쓰기에 진심인 사람들이 보입니다. 방문자 수를 늘이며 유지하려면 지속적으로 게시글이 올라와서 노출되어야 한다는 점이 중요한 것 같은데 이는 다르게 말하면 나의 새 글이 이전 글을 계속 아래로 밀어내는 것입니다. 소비되고 잊혀지는 사이클이 아닌가 싶기도 합니다. 인터넷 서점과 글쓰기를 하고자 하여 통로를 찾는 사람 양쪽에 윈윈이라고 보면 될 것인지. 한병철 저자의 말처럼 서점의 마케팅 수단으로, 스토리셀링의 또 하나의 증거물은 아닌지. 그렇다면 어쩌란 말인지, 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궁금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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