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3.10.22 16:18
헝가리를 대표하는 이스트반 사보(Istvan Szabo, 이전에는
“자보”라는 표기가 많았는데 헝가리 문화원과 협력하는 최근
회고전에 “사보”라고 나오는 걸 보면 이쪽 발음이 맞나봐요) 회고전이 열리고 있습니다.
공산국가였던 헝가리 감독이라 우리나라에서 이분 젊은 시절 작품은 들어온 바가 없고요. 아카데미상 수상으로 알려진 <메피스토>(1981)는 더빙판으로 TV에서 상영해 본 적이 있어요. <메피스토>를 첫 작품으로 클라우스 마리아 브란다우어를 주연으로 해서 실존 인물에서 영감받은 주인공이 중유럽 역사의 격랑을 겪는 영화들을 제작해서 흔히 중유럽 삼부작이라고 부르는 게 이분 대표작입니다. 저는 동네 비디오 대여점(!)에서 <레들 대령>(1985)을 2개 비디오로 본 추억이 있습니다. (3시간이 넘는 영화의 경우 VHS비디오 테이프는 1, 2부로 나누어 판매, 대여했습니다. 매체의 한계를 핑계로요.) 하지만 세번째 작품인 <하누센>(1988)은 이전에는 볼 기회가 전혀 없었고요. 삼부작의 마지막이 이전 작들보다 떨어진다는 속설에 맞게 좀 못하다는 평가가 맞았습니다.
우리나라에는 007 영화의 악당으로나 알려진 브란다우어를 무척 좋아하게 된 계기가 이 영화들입니다. 이번 영화제에 새로 본 삼부작에서는 <레들 대령>이 가장 인상깊은데요. 비교적 최근(2006)에 알려진 바이지만 사보 감독이 공산체제에서 비밀 경찰에 협력했다는게 밝려진 지금, 학생시절 ‘떠든 학생’을 고자질한 것으로 시작해서 비밀 경찰-군정보부의 우두머리가 되는 레들의 이야기가 또 다른 색채를 띄게 되네요.
사실 이 삼부작을 이해하려면 제가 중유럽 역사를 더 잘 알아야 했다는 생각이 드는 것이, 나치가 소수자를 박해하고 문화예술를 선전용으로 이용하는 나쁜 놈이라는 것만 알면 되는 <메피스토>와 달리,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을 배경으로 우크라이나, 체코, 러시아 사이들의 관계들을 알아야 하는 <레들 대령>나, 2차 대전 직전 베를린의 세기말적 분위기부터 나치의 발흥에 큰 역할을 한 국회의사당 방화사건 같은 구체적인 역사를 소재로 한 <하누센>은 좀 따라가기 어려웠습니다.
제가 이런 난관을 뛰어넘게 하는데 브란다우어의 카리스마가 큰 역할을 했습니다. 이 사람의 연기력도 그렇지만 참 인상적인 얼굴을 가지고 있는데요. 얼굴 전체를 하얗게 칠한 '메피스토'의 연극 분장이나 가면무도회에 나오는 레들 대령의 도미노 마스크, 마술 공연을 위한 하누센의 눈가리개가 각각 이 영화들을 상징하는 이미지로 기억에 남습니다.
참, ‘레들 대령’에 나오는 아르민 뮬러 슈탈의 소름끼치는 연기에 대해서 Q님이 언급한게 생각나서 검색해 보니 2020년 베스트 블루레이로 이 영화를 꼽으신 적이 있군요. 동일 제작사에서 '메피스토'와 이번 영화제에서는 놓친 '신뢰'까지 아주 싸게 팔고 있는데 사야하려나;;;;;
2023.10.22 18:32
2023.10.23 16:56
'레들 대령'은 80년대 비디오 테이프로 본 내용을 그럭저럭 기억함에도 불구하고 2023년에 극장에서 보니까 느낌이 완전히 틀리더라고요. 예전에 보았을 때는 저도 어렸기에 이 사람의 동성애 성향 같은 건 전혀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어요. 귀족출신인 동급생네 집에 머무를 때 이 집 가족이 얘가 불어를 배워야 한다고 지적할 때 이 사람들이 실제로 불어로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는 것이 이번에 깨달았고요. 러시아 소설을 읽으면 상류층 사람들이 일상 대화를 불어로 하는 묘사가 있는데 아마 헝가리 상류층도 그랬나 봐요.
2023.10.22 22:17
글 감사합니다. 잘 읽었어요. 꽤 세월이 많이 지났어도 대학 때 '써클'의 선배님들(그때는 다 형이라고 불렀죠!) 로부터 들었던 감독님들 이름은 거의 기억나요 :) 이스트반 사보는 영어 자막으로도 보고 그러다가 아마 <레들 대령>이 비디오로 나왔을거여요. 써클 룸에서 비디오로 보았는데 다들 어려워하더라고요. 하긴 그때는 인터넷도 없을 때였으니까요. 영화관에서 하는 오페라를 좋아해서 <마술피리>를 보러갔는데 클라우스 마리아 브란다우어가 책 읽어주는 할아버지로 나왔어요. 오스트리아에서는 국민 영웅인거 같더라고요. 이 분의 영화 출연 목록이어요. 전 여덟편 정도 본거 같네요.
2023.10.23 16:51
저는 브란다우어 영화 중에서 '타버린 비밀'을 극장 개봉 시에 아주 인상깊게 보았답니다. 특유의 부드러운 목소리로 슈베르트 '마왕'의 가사를 인용하면서 "이히 리베 디히"라고 말하던 장면이 아직도 기억이 나요. '메피스트'의 등장인물이 지적한 것처럼 나쁜 놈이지만 어린 아이 같이 순수한 얼굴이 가끔 비친다고 할까요. '러시아 하우스'에서 단테 역을 마지막으로 스크린에서는 보지 못했는데요. 오스트리아에서는 감독과 배우로 아직도 활동하고 있다고 들었습니다.
2023.10.23 15:26
영화의 전당 상영 정보에는 이스트반 서보라고 나오네요. 사보라고 하면 그냥 사소한 발음차이다 싶은데 서보라고 하니까 많이 낯설었어요.
2023.10.23 16:45
앗, 서울아트시네마 홈페이지는 물론이고 영화관에서 집은 종이 리플렛에도 '서보'라고 나와 있는데 저는 왜 '사보'라고 계속 생각하고 있었을까요. 회원 리뷰에서 Q님이 헝가리에서는 동양처럼 성-이름으로 표기한다며 "사보 이슈트반"이라고 표기하신 걸 읽고 계속 그렇게 기억하고 있었나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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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도 '메피스토'를 오래 전에 봤는데 매체는 기억이 안 나요. 주연 배우 이름은 못 외우지만 그 얼굴과 특유의 표정은 기억납니다. 부산 영화의 전당에서도 다음 주부터 하네요. '레들 대령' 궁금합니다.
얼마 전에 작고한 밀란 쿤데라도 이 감독과 비슷한 말이 있었는데 어떻게 정리되었는지 모르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