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5.11.03 19:08
형장의 마리 앙투아네트(왕비의 처형 1793년 10월 16일), 윌리엄 해밀턴, 1794년, 캔버스에 유채, 152/197cm, 비질 성 박물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 대해서는 아래를 참고하세요
https://namu.wiki/w/%EB%A7%88%EB%A6%AC%20%EC%95%99%ED%88%AC%EC%95%84%EB%84%A4%ED%8A%B8
마리 앙투아네트Marie Antoinette의 처형에 대한 이상한 이야기가 돌고 있네요.
왕비가 혁명재판에서 근친상간 혐의로 기소됐고 이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았다는 얘기 말입니다. 주석을 보니 다른 혐의 내용을 공개할 수 없어서 그랬다는데 이 무슨 황당한 소린지? 이 글에서도 언급된 스테판 츠바이크Stefan Zweig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전기 (1932년)에서도 이 사건에 대해 상세히 다루고 있는데, 그런 고발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혁명정부의 재판에서는 최종 공판에서 그 근친상간에 대한 혐의 내용을 제외한다고 분명히 명시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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재판을 앞두고 병사들의 감시를 받는 마리 앙투아네트
마리 앙투아네트가 마지막을 보낸 파리의 콩슈에즈리 감옥(현재 박물관)
재판정에 들어서는 마리 앙투아네트, 폴 들라로슈, 1857년, 조각을 위한 밑그림, 미국 의회도서관 소장
....재판장 에르망은 명백하고 객관성이 충분하지 않은 수백 가지의 죄상은 전부 배제하고 모든 질문을 간단한 형태로 정리했다. 즉 마리 앙투아네트를 기소한 것은 프랑스 국민이다....그는 배심원에게 네 가지 질문을 했다.
첫째, 공화국의 적인 외국 열강에 대해서 자금 원조를 중개했고 프랑스 영토의 침입을 승인했고 그들의 군사적 승리를 지원하기 위해서 그들과 함께 음모를 계획하고 쌍방이 양해를 했다는 사실은 증명이 된 사실인가?
둘째,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투아네트, 미망인 카페는 이런 음모에 관여하고 그런 양해를 인정했다는 죄를 졌는가?
셋째, 내란을 선동하기 위한 공모, 모반이 행해졌다는 사실은 증명이 되었는가?
넷째, 오스트리아의 마리 앙투아네트, 루이 카페 미망인이 이 모반에 관여한 죄를 인정할 수 있는가?
중간 질문 : 배심원들은 법률상 어떤 결정을 내려야 하는가? 재판장은 최후의 제안 중에서 재판이 내포하는 정치적 장식을 일체 배제하고 여러 가지 죄상을 실질적으로는 단 하나로 묶었다. 배심원이 질문을 받은 것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자연에 거역하는 탕녀, 근친상간 한 여자, 낭비적인 여자인가 아닌가를 결정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전 왕비가 외국과 손을 잡고 적군의 승리와 국내 봉기를 원하고 그것을 촉진시킨 죄가 있는지 없는지 하는 것을 밝히는 것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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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판 츠바이크, <마리 앙투아네트>1932,
박광자, 전영애 옮김, 까치, 1992
대례복 차림의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엘리자베스 비제 르브륑, 1778년, 캔버스에 유채, 273/ 193.5cm, 빈 미술사 박물관 소장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를 방문하는 오스트리아 대공 막시밀리안 프란츠(오스트리아의 퀼른 대주교, 왕비의 형제), 요제프 하우징거, 1776년, 캔버스에 유채, 독일 연방 소재
1792년 6월 20일 튈르리 궁에 침입한 시민군과 마주하고 있는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 캔버스에 유채, 작자 미상의 대혁명기에 제작된 정치선전화, 프랑스 혁명 박물관 소장
1791년 6월 바렌에서 체포되는 루이 16세와 왕실 가족들, 토머스 팔콘 마샬, 1854년, 캔버스에 유채, 105/142.5cm, 개인소장
제가 인용한 글은 92년도 판이지만, 이미 저는 80년대부터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가 내란혐의로 기소되었다는 걸 알고 있었어요. 이 당시 국내에 유명했던 일본만화 <베르사이유의 장미>에서도 이 재판 부분은 츠바이크가 서술한 부분을 충실히 재현했구요.
물론 당시 혁명정부는 왕비의 내란 혐의에 대해 심증만 있을 뿐 증거를 확보하지 못해 왕비의 재판 당시 무리하게 기소를 밀어부쳤던 것도 사실입니다만, 그렇다고 근친상간이나 동성애 같이 시중잡배들이 떠드는 소문들로 왕비를 재판할 뜻은 없음을 분명히 했죠. 서두에서 재판장 에르망이 밝혔듯,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를 기소한 것은 프랑스 국민이고 그렇다면 국민의 뜻에 따라 현 혁명정부를 위협하는 유럽의 대불동맹 체제에 왕비가 어떤 역할을 - 프랑스에 대한 반역혐의 - 했는지에 대해 밝히는 것이 중점이 되야 할 테니까요. (결국 혁명정부는 왕비의 반역에 대한 증거를 ( 외국 정부와 내통한 혐의 ) 입증 못하고 무리하게 사형 언도를 내리고 말았습니다만....왕비의 반역에 대한 증거는 사후에 드러나게 됩니다.)
역시 같은 츠바이크의 책에 나오는 얘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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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마리 앙투아네트가 공화국에 대한 반역죄를 범한 것을 증명할 수 있는 기록이 세상에 알려져 출판되어 있다. 비엔나의 기록 창고와 페르젠의 유품 속에서 발견된 것이다. 그러나 이 재판은 1793년 10월 16일에 파리에서 행해졌기 때문에 그 당시로는 이들 기록은 전혀 검사의 손에 들어가지 못했다. 실제로 범한 반역죄에 유효한 증거는 단 하나도 재판 전체를 통해 배심원에게 제출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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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장으로 가는 마리 앙투아네트
왕비 개인의 풍모를 본다면, 그녀의 운명은 인간적으로 많이 딱하긴 합니다만...외국 군대를 끌어들여 제 백성을 학살하려 했던 것 만큼은 그냥 넘기기가 힘들군요. 물론 반란을 일으켰으니 왕비 입장인 그녀로서는 그들이 이미 제 백성이 아니었을 테지만 말입니다....
왕비가 아들과 근친상간을 저질렀다고 고발한 자는 에베르인데, 그는 이 사악한 고발 때문에 훗날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 때 목숨을 잃게 됩니다. 이 고발은 당시 재판장이었던 에르망 조차도 어처구니 없다고 기소에서 제외해야 한다는 의견을 내놓았었고, 그 때 로베스피에르는 이 더러운 중상모략이 혁명재판의 신성함을 더럽혔다고 노발대발 했었는데 말입니다.
( 로베스피에르의 걱정은 사실이 된 것 같군요. 최소한 여기 한국에서만큼은 말입니다. 이제는 프랑스 혁명에 대한 욕을 할 때마다 - 더 정확히는 공포정치 - 왕비가 뒤집어 쓴 저 억울한 근친상간의 누명 얘기를 한단 말이죠. 실제는 저 죄목으로 재판을 받지도 않았는데, 사실은 중요한 것이 따로 있지 않습니까. 왕당파들이 외세 끌어들여 자국내에서 반란을 일으키려고 하는 일은 상당히 심각한 일 아닌가요? 상식적으로 생각해 봐도 당시의 혁명정부가 이 문제로 집중을 해야지 왜 되지도 않는 스캔들 거리로 최종 평결을 하겠습니까? 그런데, 왜 이런 엉뚱한 얘기들이 도는 건지...저 위키를 빨리 수정하던가 해야겠네요.)
생 드니 성당의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영묘, 에드와르 골과 피에르 페티, 1830년, 대리석, 파리
2015.11.03 19:55
2015.11.03 20:02
보통 내전이 일어났을 때 흔히 보이는 상황이죠. 한국사를 생각해 본다면 구한말에 동학 농민 봉기 일어났을 때 조선 정부가 청나라에 군대 요청한 일이나 그에 따라 일본군도 들어왔던거 생각해 보면…암담하죠.
죽창 든 농민군 VS 자동 소총 든 일본군
그 결과는…
2015.11.03 20:12
2015.11.03 20:23
왕비의 재판이 행해진 순간에도 프랑스의 혁명 정부는 왕비의 친정인 오스트리아를 비롯한 프로이센 그리고 영국과 러시아, 스페인등 전 유럽이 대불동맹을 결성하고 프랑스를 포위한 채 달려드는 상황에서 힘든 전투를 치르고 있던 중이었습니다.
제가 옛 여인들의 상황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전쟁사에 대한 이해도 있어야 한다고 지적한 이유가 바로 이겁니다. 당시 프랑스 민중과 혁명정부가 왕비 마리 앙투아네트에게 그토록 가혹하게 굴었던 이유가 바로 저 전쟁 때문이었죠. 전 유럽이 시민혁명을 인정하지 않고, 왕조에 반역을 저질렀다고 여긴 혁명정부를 없애려고 덤벼드는 상황에서, 게다가 안으로는 왕당파 귀족들의 반란 음모가 끊임없는 상황에서, 국민 여론은 극한으로 치달을 수 밖에 없죠. 따라서 왕비의 비참한 죽음은 그런 측면으로 이해해야지, 무슨 국민들이 여자 스캔들에 미쳐서 벌어진 일이 아닙니다. 그건 그것대로도 끔찍한 일이었지만, 기저에는 더 심각한 상황이 도사리고 있었으니까요.
2015.11.03 23:56
나무위키 서술 보고 아무리 마리 앙트와네트라는 악명으로 알려진 개인에 대한 서술이라고 해도 사생활 루머인 근친상간에 대한 서술이 굉장히 자세하고 길게 쓰여있는 것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드네요. 나무위키가 아무리 익명으로 돌아가면서 쓰는 문서라도 해도 이상하군요.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상황 자체가 반역인데다가 근거도 위태로운 혁명 주도자들 측에서는 대단하고 숭고한 이유를 만들어서라도 왕비를 처형했을 텐데 근친상간 루머가 지금도 얼마나 효력이 있는지는 1789년 혁명을 싫어하는 쪽도 긍정하는 쪽도 얼마나 주장하거나 논거가 될 수 있는 사항인지는 궁금하군요.
그런데 한편으로는 바스티유 감옥 습격이 단지 폭동이었는지 어떤 정치적 함의가 정말로 있었는지 혹은 혁명 주도자들의 공포정치가 어땠는지와는 의견이 갈린다고는 해도 당시의 인권 선언(18세기 것인데...) 문서 자체는 지금도 찾으면 나오는 것은 신기하면서 아이러니하다는 생각도 드는군요.
http://www.legifrance.gouv.fr/Droit-francais/Constitution/Declaration-des-Droits-de-l-Homme-et-du-Citoyen-de-1789
2015.11.04 00:04
최근에 누군가 웹에서 집중적으로 저 근친상간설을 퍼뜨리는 것 같더군요. 왕실덕후들 중 하나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 이 사람들, 프랑스 같은 나라의 유서 깊은 왕실이 과격 혁명파에 의해 사라졌다는 걸 무척이나 안타깝게 생각하더군요.)
기본적으로 현대 민주 국가 형성이나 그걸 기초한 시민혁명에 대한 이해 자체가 안되어있는 사람들이라…
2015.11.04 00:17
2015.11.04 00:22
인권선언은 워낙 유명한 문서라서요. 한국의 중학교 사회 교과서에도 실려 있습니다. ( 그 뿐인가요…영국 명예혁명의 권리장전과 미국 독립혁명의 독립선언서도 실려 있는데요)
프랑스 혁명의 인권선언은 그냥 어디 서양 나라의 흔한 역사 문서가 아닙니다. 오늘날 민주주의 국가의 원형을 제시한 문서거든요.
2015.11.04 10:08
나무위키가 역사에 대한 서술은 괜찮게 되어있는 줄 알았더니 이렇게 심각한 오류가 버젓이 등재되어있었군요.
덕분에 잘 읽었습니다. 감사합니다.
2015.11.04 12:50
2015.11.04 11:33
나무위키를 보고 낚인 1인. 이 글 쓰신 분에게 감사를 표합니다.
2015.11.04 12:50
2015.11.04 13:18
2015.11.04 1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