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10.13 00:13
1.
먼저 '아직 끝나지 않았다'부터. 2017년에 나온 프랑스 영화입니다. 런닝타임은 90분. 스포일러는 없구요.
(프랑스 영화니까 영어 포스터 말고! 라고 찾다가 엉뚱한 걸 올려 버렸네요;)
- 한 부부의 양육권 재판 장면으로 시작합니다. 정확히는 합의, 조정 만남 같은 건데요. 대충 보아하니 여자 쪽에선 남편이 폭력을 행사해서 큰 딸, 어린 아들이 모두 아빠를 보기 싫어한다고 주장하고 있어요. 어느 날 휙! 하고 도망쳐서 숨어 살고 있는데, 문제는 남편 쪽의 양육권 주장으로 인해 정기적으로 자식들을 만나게 해야 한다는 거죠. 게다가 급하게 도망치느라 뭘 제대로 처리하지도 못해서 직장도 잃었고 경제적으로도 쪼들립니다.
물론 남편 쪽은 자긴 문제 없고 아내가 다 거짓말 하는 거라 주장해요. 최소한의 양육비는 분담하겠지만 아내가 당장 원하는 큰 돈은 못 주겠다고 버티고, 아내가 주장하는 폭행도 다 없었던 일이므로 자식을 계속 만나야겠다. 확실한 증거도 없지 않느냐? 뭐 이런 거죠.
판사는 결론을 2주 후로 미루고, 아내는 도망치듯 법원을 떠납니다. 그리고 뭐... 이런 이야기를 하는 영화라면 어느 쪽이 문제일지는 뻔하지 않겠습니까. 판결이 나지 않아 그동안의 상황을 이어가는 2주 동안, 폭력 남편이자 아빠의 무시무시한 압박이 시작됩니다.
(포스터 사진의 진실. 이 뒷통수는 판사님입니다. ㅋㅋ)
- 장르물이 아닙니다. 특별한 드라마틱 전개도 없... 진 않지만 대체로 건조하고 냉정한 분위기를 유지하구요. 무슨 반전이나 비밀 같은 걸 숨기고 있는 부분도 전혀 없습니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영화가 끝날 때까지 엄청난 긴장감이 이어져서 다 보고 나면 지쳐요. 클라이막스에 일어나는 사건은 그냥 완벽한 호러구요. (실제로 모 유명 호러 영화의 비슷한 장면 생각이 많이 났습니다. ㅋㅋ) 몇 년간 나름 호평 받은 호러, 스릴러들 참 많이도 봤지만 이만큼 긴장되고 무시무시한 기분으로 본 영화는 없었던 것 같으니 장르물이라고 쳐도 되는 걸까요(...)
(이게 뭐라고 그렇게 긴장됐는지.)
- 근데 이 영화의 포인트는 이런 겁니다. 그렇게 90분간 긴장에 절어 있다가, 압도적인 공포감까지 덤으로 느낀 후에 가만히 생각해보면 이 영화의 스토리는 우리가 살면서 신문 사회면에서 별로 드물지 않게 접할 수 있는 그런 평범한 사건들이었다는 거죠. 아니 뭐 막판엔 한국에선 보고 듣기 힘든 서양쪽 이야기들만의 스페셜 아이템이 등장하긴 합니다만. 사실 그건 소소한 차이이고. 본질적으로 어떤 상황, 어떤 사건이었는가... 를 생각해보면 역시 그냥 익숙한 사건인 게 맞아요.
평소에 뉴스에서 그런 사건들을 접할 때마다 하이고... 한숨을 쉬며 안타까워하긴 하지만, 그냥 그 정도 체험으로는 우리가 전혀 실감할 수 없는. 정말 그런 상황에 처한 사람들이 느끼는 압도적인 절망감과 공포감을 90분동안 아주 빡세게 체험 시켜준다는 면에서 매우 공익성이 큰 영화라 하겠습니다.
(저는 모르는 배우님이신데 아주 살짝 제레미 아이언스 닮으셨...)
- 현실적인 느낌을 잘 살려야 하는 영화이니만큼 특별한 기교 없이 심플한 연출로 일관을 합니다. 배경 음악 전혀 없이 일상 소음들을 그대로 녹여 넣고. 미장센 같은 부분에도 특별히 힘 주지 않고 최대한 일상 기록 같은 느낌으로 튀지 않게, 절제해서 찍어 놨구요. 주인공 배우들 역시 튀지 않는 분들로 뽑아 놨는데 다들 연기가 되게 훌륭합니다. 공포에 시달리며 멘탈 붕괴 직전의 상태로 간신히 간신히 버텨가는 엄마, 곧 성인이라 아빠에게 완전히 압도되진 않지만 충분히 진저리를 치며 이놈의 집구석을 떠나고 싶어하는 딸, 그리고 어린 나이에 무시무시한 아빠에게 시달리면서도 어떻게든 엄마와 가족을 지키려고 애쓰는 갸륵한 아들래미. 다들 너무나도 리얼해서 클라이막스 장면의 공포가 엄청나게 살아나요.
그리고 참 죄송한 말씀이지만 아빠 역을 맡으신 분... 이 분이 정말 걸작이었습니다. 걍 평범하게 덩치 큰 동네 아저씨 느낌으로 나오시는데. 본인 나름대로는 이 모든 상황이 억울한 미친 놈 역할을 너무 잘 하셨어요. ㅋㅋㅋ 이 분이 그냥 뚱한 표정으로 아들을 쳐다보기만 해도 기분이 부들부들합니다. 각본과 연출의 힘도 컸겠지만, 암튼 정말 잘 해버리셨네요.
(장르물들에선 흔히 나오는 장면인데, 이런 장면을 이렇게 쩌는 몰입감으로 본 적이 없어요. 허허.)
- 이런 이야기라면 당연히 사회 시스템에 대한 비판이 들어갈 텐데. 이 영화 역시 그런 부분이 있기는 합니다.
하지만 그게 핵심은 아니라고 느꼈어요. 처음 나오는 법원 장면도 그렇고, 마지막에 전개되는 큰 사건 부분도 그렇고. 시스템의 한계 지적도 있긴 하지만 그게 문제다! 라기 보단 그나마 존재하는 시스템도 적극적으로 활용하기 힘든 가정 폭력 피해자들의 심정이나 입장을 보여주는 데 더 주력하는 느낌이었구요.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가정 폭력의 공포 그 자체였습니다. "법적으로 따져볼 때 지금의 시스템도 어쩔 수 없다"라는 니들 얘긴 잘 알겠는데 니들이 함 당해 봐도 그런 말이 나올까? 라는 느낌이랄까요.
(그래서 우리 불행 소년의 장래는 어떻게 될 것인가!!!!)
- 암튼 뭐... 나름 안 소심하게 추천할만한 무시무시하게 공익적으로 잘 만든 영화였습니다.
다만 실제로 폭력 부모를 체험하며 자라서 트라우마가 있다든가 이런 분들은 안 보시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임팩트가 정말 크거든요.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 보고 나서 더러운 뒷맛이 길게 남는 류의 이야기는 아니었다는 것 정도.
진지한 드라마 좋아하는 분들도, 공포나 스릴러류의 장르물 좋아하는 분들도 다 인상적으로 볼 수 있을만한 잘 만든 영화였구요.
2.
'모든 것을 잃기 전에'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의 감독과 출연진이 이보다 5년 전인 2012년에 만든 30분짜리 단편 영화입니다.
(어쨌든 포스터는 있습니다!)
- 길게 말할 것 없이, 그러니까 이게 1편이고 '아직 끝나지 않았다'가 후속편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아니면 그냥 둘을 합쳐서 한 편의 영화라고 생각해도 되구요. '아직 끝나지 않았다'에서 대사로 간단히 설명되는 가족들의 남편 탈출 이야기에서 가장 결정적인 순간을 보여줍니다.
단편이다 보니 단편 형식에 맞게 짜여진 구성이 좋습니다. 아무 설명 없이 아들, 엄마, 딸이 합류하는 모습을 보여주고. 왠지 모를 긴장에 휩싸인 엄마의 불안한 모습. 그리고 직장에 가서 갑작스런 퇴사 통지를 하며 떠날 준비를 하고. 대충 '아, 가정 폭력 때문에 도망치는 상황이구나' 라고 관객들이 깨닫고 나면 그 곳으로 남편이 찾아오고, 난데 없이 터지는 긴장감!!! 뭐 이런 식인데요. 역시 마지막에는 장르물 뺨치게 스릴 넘치는 클라이막스로 마무리되는 인상적인 단편입니다.
(위의 그 분의 5년 전 비주얼. 아직 덜 고생하셔서(?) 상대적으로 풋풋하십니다.)
- 따로 더 길게 얘기할 건 없겠고. 둘 중 하나만 보고 싶으시다면 그냥 '아직 끝나지 않았다'를 보시는 편이 낫습니다. 차마 그런 이야기를 90분동안 고통 받으며 보고 싶지 않으시다면 단편 쪽을 보셔도 좋겠구요. 만약 둘 다 보시겠다면... 이야기 순서를 생각하면 단편을 먼저 봐야겠지만, 전 그냥 '아직 끝나지 않았다'를 먼저 보시는 편이 나을 것 같네요. 이유는 별 거 없고 그냥 두 시간 짜리 영화는 좀 길잖아요. ㅋㅋㅋㅋ 아무래도 장편 쪽에 단편에서 보여주고자한 테마가 다 들어 있으면서 조금 더 들어 있기도 하구요.
+ 그러고보면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번역제를 정말 기가 막히게 잘 만들어 붙였네요. 단편에 이은 속편(?)격 이야기니까 '아직 끝나지 않은' 것이기도 하고. 또 제목 그 자체가 이 주제에 어울리게 강렬한 인상이기도 하고. 또 영화 속에서 남편이 저 말을 몇 번 해요. 아직 내 말 안 끝났거든!? 이라든가. 우리 아직 끝난 거 아니잖아!! 라든가...
++ 영화 특성상(?) 쓸만한 짤을 찾기가 힘들었던 와중에 이 사진을 보고 뿜었습니다.
아니 이 양반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2022.10.13 08:46
2022.10.13 09:20
아내 배우가 뭔가 '혼신을 다 하는구나'라는 느낌으로 잘 했다면 남편 배우는 뭐 아무 것도 안 하는 것 같은데도 그냥 위압감과 불쾌감이 팍팍. 무명 배우였다면 배우 인성을 의심하게 될만한 명연기였습니다. ㅋㅋㅋ
그냥 본격 장르물 찍어도 잘 만드시겠다... 싶었던게. 사실 이게 직접적인 물리적 폭력은 의외로 막판까지 거의 안 나오잖아요. 남편 저 놈이 터질까 말까 터질까 말까 하면서 한 시간을 넘게 끌어가는데도 긴장감 유지되는 게 대단하더라구요.
그 평론가님은... 이혼하고 전처에게 무고를 당한 경험이라도 있는 걸까요. ㅋㅋ 남편에게 과몰입하셨네요. 영화 속에서 굳이 따지자면 남편 아빠에서부터 문제가 있었던 걸로 짐작할 순 있는데. 굳이 아무 힌트도 없는 아내 쪽까지 상상을 하며 바라볼 필요가...
2022.10.13 10:04
전 극장에서 봤는데 아직도 그날 긴장감이 가득했던 극장 분위기가 기억이 날정도로 숨참고 고르며 봐야하는 영화죠 여러 측면으로 좋은 영화죠. 단편이 있었군요 그것도 왓챠에 조만간 봐야겠습니다. 이용철씨 저런 말하기로 유명하죠 <피닉스> GV때도 남편을 용서하고 잘 살아야 해피앤딩이다 이런식으로 말했었죠 그래서 지적도 많이 받는데 오히려 자신이 억울하다라고 하는편으로 알고 있어요 헐 쓰고 보니 이 영화 아버지랑.... 아닙니다 ㅎㅎ 하필이면 방금 서산 가정폭력 살인사건 기사를 보고 이 글을 봤네요. 아들이 아버지를 무기징역 내려달라고 국회에 청원 넣었다는데 그거 동의하고 와야겠네요
2022.10.13 10:15
그 GV에서 니나 호스가 안이쁘다 뭐 이런 망언도 했던 걸로 알고 있습니다. 뭐 그냥 일반관객이라면 모를까 그냥 주연배우 안이쁘다는 얘기가 평론가를 전문직업으로 삼고 있는 사람이 작품 분석해주는 자리에서 할 말인가 싶습니다.
2022.10.13 10:41
게다가 <피닉스> 한국 공식 첫 상영이었던걸로 기억합니다(사실 그래서 기다리던 영화라 저도 그자리에 있었네요) 무엇보다 GV라는 공식석상에서 마이크 쥔자가 저런 소릴 한다는게 어처구니가 없죠
2022.10.13 11:05
아니! 현장에 계셨군요. 이 좋은 영화를 보시고나서 저런 뻘소리를 들으시다니 안타깝습니다. 감흥 다 깨졌겠네요.
2022.10.13 12:19
'피닉스' 좋아하는 영화인데 저런 식으로 말하는 사람이 영평가라는데 화가 치미네요. 씨네21 짧은 평에도 이상한 말이다 싶은 경우가 종종 보이더니만.
2022.10.13 16:36
네 왓챠에 둘 다 있어서 편하게 봤어요. ㅋㅋ 감독님 다른 작품 뭐 있나 찾아보니 배우로 나온 것들만 나오고, 연출로 신작은 안 보이더라구요.
저 평론가라는 사람은... 아니 뭐 저런 사람은 있을 수도 있는데요. 계속 불러주는 데가 있는 게 신기하네요. 왜죠. ㅋㅋㅋ
2022.10.13 12:24
이 영화는 찜하고 아직 못 본 영화 중 하나입니다. 리뷰도 사진만 보고 후다닥 내려왔어요. 왓챠에 있는 '한니발'을 시작해서.. 일단 1시즌은 끝내려고요.
왓챠 해지신청했는데 해지일 전에 보려던 영화가 도저히 턱도 없네요. 들어갈 때마다 다음 달에도 행복을 이어가라고 종용하는 메시지가 뜨고, 갈등됩니다.
2022.10.13 19:25
제가 왓챠를 시작하던 날, 몇 시간 동안 장르별 영화 섹션을 탈탈 털어서 장대한 찜 리스트를 만들어 놓고 '이것만 다 보고 해지할 거야' 하면서 시작했는데요. ....목록이 줄지 않습니다? ㅋㅋㅋㅋ 하루에 한 편 이상씩 꼬박꼬박 보고 있는데도 중간중간 넷플릭스, 디즈니로 외도 하다 돌아와 보면 그새 새로 들어온 게 그만큼. 이젠 그냥 '이것만 보고'는 포기했어요. ㅋㅋ
근데 이 영화는 보고 해지하시는 게 어떨까요. 보기 드물게 제 취향과 thoma님 취향의 접점에 있는 영화가 아닐까 싶어서요. 하하.
2022.10.13 20:31
'한니발' 1시즌은 끝내고 봐야겠습니다. 귀가 팔랑팔랑합니다요. 로이배티 님과 왓챠가 적극 권하니 구독 유지하려고요.ㅎㅎ
2022.10.13 22:28
(후훗) 입니다. ㅋㅋㅋㅋㅋ
말씀대로 참 이게 그냥 호러물에서 살인마에게 쫓기는 주인공보다 상황이 훨씬 리얼하게 와닿아서 더욱 무서웠죠. 뉴스에서 너무 흔하게 볼 수 있는 일이다보니..
부부를 연기한 두 배우 모두 현지에서 스타급은 아니더라도 연기파로 유명하다던데 너무 잘했죠. 남편분은 정말 특히 너무 심하게 잘해서 보면서 혐오감이 그냥! 아역배우도 참 좋았고 출연진 연기는 물론 드라이한 아트하우스로 가다가 장르영화 못지않은 서스펜스를 주는 연출이 일품입니다. 이미 단편에서 보여줬던 능력이겠죠.
여담으로 국내 이용철 평론가는 “이게 과연 남편의 잘못이기만 할까?” 이런 한줄평을 남겼죠. 도대체 어떻게 보면 여기서 그쪽으로 감정이입이 가능한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