재미있는 책을 읽을 때는 "어떻게 되는 거야?" "그래서 끝에가서 어떻게 되는데?" 라면서 빠르게
단숨에 읽어가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두꺼운 책이라도 잠깐 사이에 다 읽어 버리게 되는 겁니다.

작년에 제가 읽은 책 중에는 "영원한 전쟁"을 읽을 때 그랬습니다.
스타쉽 트루퍼스 류의 우주전쟁에 참전한 병사가 경험담을 들려 주는 형식이었는데, 구성도, 내용 세부도, 결말도
저는 스타쉽 트루퍼스 보다도 훨씬 더 재밌게 봤고,
근작으로 더 유명한 "노인의 전쟁" 같은 책보다도 더 재밌게 읽었습니다.
한 며칠 짬날때 마다 읽어야지 하고 시작한 책이었는데, 이틀만에 다 읽어 버렸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한 발짝 더 나가서,
훨썬 더  재미난 책을 읽다보면,
너무너무 재미나서 손에서 놓을 수 없을 정도로 열심히 읽게 되고
완전히 몰입해서 등장인물들의 사연에 진짜처럼 안타까워하고,
책 속의 세상이 영영 끝나지 않으면 좋겠다고 생각할만큼 책 내용에 푹 빠져서 보게 되는 경우가 있습니다.
이럴 때는 책을 읽으면서 남은 책 분량이 줄어드는 것이 아깝다고 느껴질 정도로 아쉽게 느껴질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책을 읽으면서 자꾸 남은 분량을 의식하게 됩니다. 벌써 끝나면 안돼... 하면서 말입니다.

중독성있는 TV프로그램 볼 때에도 TV프로그램 끝나는 시간이 다가오는 것이 아쉽게 느껴져서
자꾸 시각을 확인하던 경험도 있는데(다른 분들도 있으신지요?), 이것도 비슷한 느낌이지 싶습니다.

작년에 읽은 책 중에는 이런 것들을 꼽아보자면,


1. 세계문학단편선 데이먼 러니언

읽은 뒤로 부터 항상 칭송하고 다니고 있는 책입니다.
그런데 그러면서도
혹시 다른 사람들도 다들 이책을 읽어서 새로운 차원을 알게 되면, 나는 밑천 떨어지지 않을까, 싶어서
왜인지 이상하게 또 남들이 읽는 것이 조금 질투나기도 하는 그런 오묘한 기분을 들게하는 책이었습니다.

무척 웃기고, 결말도 대부분 유쾌하게 끝나는 단편 소설들인데,
그러면서도 내용에는 비정한 세상사나 현실적인 사회상을 찍고 넘어 가는 것들이 많은 점도
절묘했던 이야기들이었습니다.

오. 헨리 단편 소설 같은 농담과 페이소스가 뒤섞인 분위기인데
좀 더 현대적인 도회풍이 강해진 느낌이라는 생각도 듭니다.

이번에 세계문학단편선으로 나온 책들 중에,
유명작가인 헤밍웨이나 포크너가 많이 언급되는 편이고,
장르 애독자들에게는 러브크래프트나 해밋이 언급되는 편인데,
그 모든 작가들의 책보다 단연 가장 재밌게 읽은 책이 데이먼 러니언이었습니다.

이 책의 이야기들은 
같은 등장인물들이 군데군데 조연, 단역으로 출연하는 하나의 세계관을 이루고 있는
단편들이 에피소드처럼 계속 나오는 형식이라서
책이 다 끝날 때 쯤 되면, 이 사람들이 나오는 이 재미난 도시 뒷 거리를 계속 더 구경하고
싶다는 생각에 더 책이 끝나는 것이 안타까웠던 것 같기도 합니다.

여운이 남아서, 데이먼 러니언의 다른 단편이나, 영화로 나온 것들도 찾아 다니고 그랬습니다.
책 표지에는 "아가씨와 건달들" 원작도 있다고 적혀 있는데,
사실 "아가씨와 건달들" 내용과 이 책에 실린 단편은 약간 거리가 있는 편입니다.
오히려 이 책에 실린 단편의 영화판, 각색판 중에 우리에게 가장 친숙할만한 것은
성룡의 "미러클"이라고 생각합니다..


2. 세계문학단편선 대실 해밋

세계문학단편선에서 숨겨진 보물이 데이먼 러니언이었다면,
기대하고 두근거리고, 너무 기대했다가 기대치가 높아지는 바람에 재미없으면 어쩌지, 걱정도 했는데
그 기대치 조차 산산히 날려 버릴만큼 역시 재밌었던, 이름 값을 하는 걸작이 대실 해밋이었습니다.

소위 말하는 "컨티넬탈 탐정"시리즈가 실려 있는데,
비아냥거리는 말을 달고 살면서 비정한 세상 뒷거리에서 맡은 일을 하는
고독한 탐정이 이름도 밝히지 않고 1인칭 주인공으로 나와서
하나 둘 사건을 해결해 나가는 이야기입니다.

느와르 영화, 하드보일드 탐정의 원류 그대로인데,
이 단편선에 실린 이야기들은 줄거리도 극적으로 나타나 있으면서,
고독한 탐정 느와르 영화 분위기 잡는 묘사도 멋지게 살아 있어서 특히 재밌었습니다.
이 바닥의 걸작으로 추앙 받는 필립 말로 시리즈와 비교해 보자면,
이 단편선의 이야기들이 이야기들이 필립 말로 시리즈보다 훨씬 알기 쉽게 또렷하고
더 긴장감있고 박진감있게 잘 그려져 있어서 줄거리는 단연 더 와닿고 재밌는 편입니다.

또한 단순한 잡범 마약 밀매 이야기에서, 망한 나라의 망명 귀족들의 쓸쓸한 분위기까지
다채로운 소재로 사회의 여러 모습을 비추는 시각과 거기에 어울린 인간 감정을 이리저리
파헤쳐 보여주는 내용들도 무척 훌륭했다고 느꼈습니다.

이 역시 이 멋쟁이 탐정 이야기가 계속 보고 싶어서 끝나는 것이 무척 아쉬웠고,
다른 대실 해밋 소설, 다른 컨티넨탈 탐정 시리즈를 계속 찾아 보게 할 정도였습니다.


3. 오상원 중단편선 유예

한국전쟁 전후를 소재로 비정한 이야기를 쓴 것으로 잘 알려진 오상원의 중단편집입니다.
사실 처음 책을 잡을 때만해도, 널리 알려진 "유예" 같은 소설이라든가,
이 책 말미에 실린 "훈장", "실기" 같은 소설처럼, 비참한 생활/상황을 다룬
한국 문학에서 맨날 보던 이야기, 흔히 보던 소재를 지겹도록 또 보는 것들이 있어서
별 기대를 하지는 않았습니다.

그렇습니다만, 한국 작가로는 독특한 편인 소재와 구성 방법 때문에
유난히 눈에 뜨이는 특색있는 단편 소설들이 연달아 있어서
기대를 훨씬 넘어서서 재밌게 읽었습니다.

한국판 앙드레 말로라고 할 수 있는 이야기 구성이 재밌었던 소설로는
광복직후의 혼란기를 다룬 "균열", "죽어살이", "모반" 같은 이야기들이 있었는데,
북극권의 겨울처럼 영원히 밤만 계속되는 도시의 겨울밤 같은 암울한 분위기가
신비롭게 느껴지는 것이 재밌었습니다.

앰브로스 비어스 소설 같은 느낌이 선명한 전쟁소설 단편 다운 단편인 "현실"이나,
느와르 영화 분위기가 가득한 "보수" 같은 소설도 개성 있는 배경과 소재가 
특색있는 외국 작가 같은 느낌을 타고 잘 펼쳐진 것들도 있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책 뒤쪽에 실린 "훈장", "실기"는 훨씬 평범한 내용이었는데도
앞쪽의 오묘한 비슷한 분위기의 앞쪽 소설 기억이 계속 남아서
그런 분위기의 소설을 또 계속 읽고 싶어서 책이 끝나는 것이 역시 안타까웠습니다.


작년에 책 읽어 본 것을 돌아 본 제 기억은 이정도 입니다.

혹시 여러분들도 책 읽다가 재미있어서 남은 분량이 줄어드는 것이 아까웠던 경험 있으십니까?
있으시면 무슨 책을 읽을 때였는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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