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9.05 22:59
- 1983년작입니다. 런닝타임은 87분. 장르는 뭐 걍 '옛날 크로넨버그 영화'라고 해두죠. 스포일러는 없을 거구요.
(볼록 티비의 추억이 떠오르는 포스터입니다. 물론 당시엔 최신식이었겠습니다만. ㅋㅋㅋ)
- 아직 파릇한 30대라 피부도 말끔한 제임스 우즈가 맡은 '맥스'라는 양반이 주인공입니다. 지역 소규모 케이블 티비를 운영하는데 뭐가 됐든 자극적인 걸 틀어대서 돈을 버는 게 최우선 과제인 양반이네요. 시작부터 시사하는 영상은 사무라이 뭐시기란 제목의 일제 소프트코어 포르노구요.
그런데 어느 날 자기네 회사 엔지니어가 '이리 와봐요 맥스, 여기 흥미로운 게 있어요' 라면서 정체불명의 스너프 영상 같은 걸 보여줍니다. 조악한 화질에 짧은 토막이라 진짠지 가짠지 어쩌자는 건지 모르겠지만 일단 맥스는 이게 당연히 연출일 거라 생각하고 자기네 방송국에 딱 맞는 자극 쩌는 컨텐츠라 생각해서 그 영상을 추적해보라고 시켜요. 그런데 그 때부터 조금씩 맥스의 일상은 현실과 환각이 뒤섞여 기괴한 일들이 벌어지기 시작하고. 나름 정보통을 동원해 찾아낸 그 영상의 관련자는 영 괴상하고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들려주는데, 그걸 믿거나 말거나 맥스에겐 점점 더 해괴한...
(원래 맥스라고 하면 당연히 헤드룸... 아, 아닙니다 아무것도.)
- 이 영화를 대충 언제 봤던가... 를 생각해 보는 의미 없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일단 분명히 집에서 VHS 비디오로 봤으니 최소 1997년 이후입니다. 그 전까진 집에 VHS 플레이어가 없었어요 ㅋㅋ 전에도 했던 얘기지만 아버지께서 대우 전자에 다니던 나아쁜 친구의 영업에 넘어가서 베타맥스 비디오 플레이어를 구입해버리는 바람에, 그리고 그게 정말 고장도 안 나고 잘 버텨버리는 바람에 말이죠. 어학 연수 다녀온 누나가 미쿡에서 구입한 플레이어를 들고 온 후에야 비디오 대여점이라는 걸 이용하기 시작했는데. 누나는 그 기기를 또 본인 방의 14인치(!) 티비에 연결해서 썼기 때문에 전 이 영화를 14인치 볼록 티비로 봤을 겁니다. 그것도 대략 20여년 전에요. 게다가 이 영화는 한국에 5분여를 뭉탱이로 삭제당하고 들어왔다니 이 쯤 되면 다시 본 게 다시 본 게 아니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죠. 대단히 신선한 기분으로 봤네요. ㅋㅋㅋ
(감독님 자체 블러 처리된 저 총. 참으로 크로넨버그스럽게 기분 나쁘고 찝찝하죠. ㅋㅋ)
- 다들 아시다시피 꽤 오랫동안 크로넨버그를 대표하던 영화였습니다. 크로넨버그가 한동안 만들어냈던 '첨단 기술 갖고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사람 몸이랑 기계가 참으로 보기 싫게 한 덩이가 되고 뭐 이런 이야기'의 시작 격이니까요. 이 경우엔 영상물, 특히 티비와 비디오 테이프를 소재로 이야기를 풀어내는데. 예나 지금이나 '시대를 한참 앞서간 선견지명'이라는 평가가 자동으로 뒤따라옵니다만. 흠. 글쎄요 전 크로넨버그 이야기를 할 때 그런 쪽으론 그렇게... 크게 공감하지는 않는 쪽입니다.
뭐랄까, 제게 크로넨버그의 영화들은 최신 테크놀로지에 꽂힌 영특한 문과생이 만드는 영화들 같아요. 기술 그 자체에 대해 잘 이해하는 이야기라기 보단 그 기술에 매우 문과적인 의미를 부여하고 그걸 바탕으로 거의 브레인 스토밍하듯 아주 격렬하고도 과하게 상상의 나래를 펼치면서 그걸 싹 다 영상으로 옮겨 버린다는 느낌이랄까요. 그러다보니 종종 '엑시스텐즈' 처럼 본인이 다루는 소재에 대해 아는 게 없다는 게 다 티가 나는 영화가 튀어나오기도 하구요. 요 '비디오드롬'은 그래도 뭔가 적절하고 또 잘 들어맞는 구석들이 많은 편입니다만. 그래도 역시 대단히 문과적이라는 느낌이 드는 건 마찬가지였습니다. ㅋㅋ 솔직히 얻어 걸린 거 아닙니까 감독님!!
(뭘 얻어 걸려. VR 머신까지 예견했건만!!!!)
- 솔직히 지금 와서 보니 초반부의 전개는 살짝 좀 산만한 느낌입니다. 일단 좀 느려요. 그리고 그 와중에 여러가지로 '의미심장한 메시지'를 담은 장면들이 줄줄이 나오는데 그게 그렇게 매끄럽게 잘 연결되어 있는 느낌은 아니구요. 여기에 추가로 딜을 넣는 게 왓챠의 자막이었습니다. 뭔가 좀 번역이 매끄럽지가 않아요. 좀 어색한 문장이 자꾸 튀어나오는데 이게 이 영화에 자주 나오는 선문답스런 대사들과 섞여 버리니 오역인지 아닌지 고민하느라 영화 내용에 집중을 못하게 되던. ㅋㅋㅋ 영상은 크라이테리언 판본이라 그런지 깔끔하고 좋았는데 자막은 좀 불만이었습니다.
(불에 타서 오그라든 거 아니구요. 참으로 귀여븐 비디오 테이프죠. 꼬물꼬물!)
- 근데 뭐 메시지고 이야기 전개고 간에 다 됐구요.
본격적으로 주인공이 맛이 가기 시작한 후 부터는 그냥 지금 봐도 쩐다는 느낌입니다. 자연스럽게, 그러면서도 아주 거칠게 현실과 환상을 오가면서 충격을 주는 연출도 좋구요. 그러다 결국엔 그 둘이 그냥 하나가 되어 버리면서 생기는 기괴한 분위기도 사람을 훅 잡아 끌어요. 특히 막판엔 거의 현실이 아닌 꿈의 논리로 이야기가 전개 되는데 이 때는 장면과 장면의 배치와 이어 붙이기도 굉장히 절묘하다고 느꼈습니다. 하워드 쇼어의 음악도 크게 한 몫 하구요.
그리고 빼놓을 수 없는 게 크로넨버그의 전매 특허였던 기괴하게 불쾌한 아이디어들과 그걸 살려낸 특수 효과죠. 전설의 그 권총 고정(?) 장면이나 누군가가 폭사하게 되는 장면. 뭣보다 맥스의 배에 생기는 그것(...) 같은 건 참으로 쓸 데 없이 참신할 뿐더러 이후 숱한 영화나 (일본) 만화들에 영향을 줬구나 싶었구요. 대체로 그 시절다운 아날로그 수제 특수 효과들이 깔끔하게 구현되는 가운데 몇몇 장면들은 지금 볼 때 '저 시절에 저걸 어떻게 만들었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훌륭하더라구요. 좋은 아이디어와 (당시 기준) 훌륭한 기술이 결합돼서 만들어진 훌륭한 볼거리였어요.
(옛날 옛적 잘 사시던 큰외삼촌댁 티비랑 닮아서 반가웠습니다.)
- 그래서 대충 마무리하자면요.
흠결 없이 완벽한 걸작!!! 이냐면 그건 좀 아닌 것 같구요. 하지만 워낙 강렬한 장점들, 뇌리에 깊이 새겨지는 한 방들이 있어서 매력적인 영화에 가깝다고 느꼈습니다.
저예산의 한계로 전체적인 때깔은 좀 그 시절 평범한 영화 같은 느낌이다가도 힘 준 장면들이 나오면 감탄스러운 비주얼이 튀어나오는 것도 재밌었구요.
그 때나 지금이나 오락물로 즐겁게 볼 성격의 영환 아니지만 그렇다고해서 재미 없는 영화도 아니구요. 초반만 살짝 넘기면 끝까지 몰입해서 보게 되는 작품이니까요.
암튼 '그 크로넨버그의 그 작품' 얘길 하면서 뭘 정리해보겠답시고 길게 늘어 놓는 것도 웃기네요. ㅋㅋ 재밌게 봤습니다. 끝.
+ 근데 생각해보니 이거... '링'의 그 전설적인 장면의 원조 같지 않습니까. ㅋㅋ 되게 비슷한 장면이 두 번 정도 나오죠. 그 장면 특수 효과도 참 신기하구요.
(생각해보니 '폴터가이스트'에도 비슷한 장면이 나왔든가요.)
++ 예전에 볼 땐 여기 주인공 여자 친구 역으로 나오는 배우님의 정체를 몰랐죠. 팬이 아니었거든요.
+++ 사실 제가 가장 다시 보고 싶은 크로넨버그 영화는 '스캐너스'인데요. 이게 예전에 분명 iptv에 있었는데 이젠 없네요. 끄응...; 이것도 옛날에 비디오판으로 보고 못 봤거든요. 이것 역시 이후 일본 망가, 애니메이션쪽으로 미친 영향이 상당한 영화로 기억합니다.
2022.09.06 01:47
2022.09.06 02:29
'미래의 범죄' 이거 빨리 국내 들어와야 하는데 말이죠. 그래도 지금껏 크로넨버그 영화들 중에 국내 수입 안 됐던 건 거의 없으니 이것도 들어오긴 하겠죠. 가업(?)을 성공적으로 물려 받은 아들래미 영화와 비교해봐도 재밌을 것 같아요. ㅋㅋ
말씀대로 그냥 그 상상력 자체가 쇼크였죠. 이후로 몇 편의 영화에서 리바이벌(?)을 해도 적응은 안 되던 그 상상력. ㅋㅋㅋ 말씀대로 요즘 영화들도 좋으니 그러려니... 하지만 그 시절이 그리울 때가 있습니다. 역시 '미래의 범죄'를 기대해 보는 걸로.
2022.09.06 07:34
제일 아래 사진은 영화잡지등에서 단골로 나오던 것이군요. 플라이도 그렇고 한창 화제가 된 당시에는 영 보기 불편했던 영화들입니다. ㅎㅎ 지금에 와서 다시보면 또 새로운 감상일 것 같긴해요.
2022.09.06 09:10
이제와서 당시의 쇼크가 죽은 상태로 보면 오히려 더 재밌는 것 같기도 합니다. 내용이나 의도가 더 잘 들어오는 느낌이에요. ㅋㅋ
2022.09.06 11:01
오랜만에 다시 한번 봐야겠어요. 테크에 꽂힌 문과생이라는 표현이 너무 좋네요 ㅎㅎ
베타맥스 플레이어를 실제로 써보셨다니! 저는 한국에서도 팔았는지 몰랐어요. 베타맥스 테이프도 구할 수가 있었나요 아니면 홈비디오 전용이었을까요? ㅎㅎ
2022.09.06 13:55
국내 발매 초기(=80년대 초반)엔 있었어요. 흔하진 않아서 동네 비디오 가게엔 없었고 버스 타고 시내까지 나가면 아주 큰 비디오샵 구석에 베타맥스로 만들어진 영화나 애니메이션들이 아주 소량 꽂혀 있었죠. 근데 당연히도 금방 사라졌구요. ㅠㅜ 결국 친척 어른을 통해 공테이프 서너개를 얻어서 방송 녹화 머신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아기공룡 둘리, 스타워즈1, 지옥의 외인부대('공포의 외인구단'인 줄 알고 녹화했다가 인생 애니가!) 같은 걸 각각 수백번 넘게 반복 감상하며 어른이 되었다는 슬픈 추억... ㅋㅋㅋㅋ
2022.09.06 12:12
항상 로이베티님의 글 잘 읽고 있는 숨은 애독자입니다. 다른 작품은 몰라도 이 '비디오드롬'은 못 참을 것이 대학 축제 때 학교 작은 소극장에서 이걸 틀어 줬는데 정말 저 혼자만 봤어요. 무슨 내용인지도 전혀 모르는 상태에서 영화를 봤고 극장에서 나오는데 숨이 턱 막힐 정도의 한창 뜨거운 대낮 햇빛을 맞으며 갑자기 현기증이 났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합니다. 어찌보면 영화 자체의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영화의 음울함과 상반되는 94년도의 막걸리 날것 같은, 많은 사람들의 축제 분위기 속에서도 어찌 저 혼자 저 영화를 보게 되었던 것인지 하는 운명적(?)인 느낌을 부여하고 싶어지는 현장이었습니다. :) 요즘 세대로 표현하자면 극장을 나오니 이세계였다, 라고 할런지요. 아무튼 이를 계기로 데이빗 감독님의 영화는 한창 찾아서 잘 보기도 했었네요. 좋은 글 항상 감사드립니다.
2022.09.06 13:59
90년대에 그런 거 많았죠. 대학교에서 동아리들이 열던 상영회들. 생각해보면 다 불법인데 말입니다? ㅋㅋ 근데 사실 저도 그 주최측이었어요(...) 지금 생각해보면 웃기죠. 구로자와 아키라, 누벨바그 영화들 같은 거 틀어대는데 빌린 소강당이 꽉 찰 정도로 사람이 많이 왔거든요. 특히 7인의 사무라이 상영 때가 대박이었는데 영사 사고가 나서 사과하며 환불줬던 암울한 추억도. ㅠㅜ 크로넨버그라고 하면 전 그런 상영회에서 '데드 링거'를 봤네요. 하하.
저야말로 댓글 감사합니다. 이런 핵뻘글을 꾸준히 읽어주시는 분들이 계시다니!!!
2022.09.06 12:35
2022.09.06 14:01
맞아요 '의무 목록' 표현 적절하네요. 저도 그 리스트가 끝이 안 보여서 감히 엄두를 못 냅니다. 과연 죽기 전에 다는 아니더라도 대부분이라도 볼 수 있을지. ㅋㅋ 댓글 감사합니다.
2022.09.06 13:56
다시 봐도 매혹적이죠? 비디오드롬과 매드니스, 스타쉽 트루퍼스를 엮어 내맘대로 미디어 3부작으로 부르고 싶네요. 감독도 다르고 제작 간격도 좀 있지만요. 제 스스로 의문인 건 매드니스와 스타쉽 트루퍼스는 다시 보기하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비디오드롬을 비롯 크로넨버그 영화들은 그게 잘 안돼요. 기억하기로는, 초기작들에서 여체를 메타포로 활용하면서 그에 대한 끌림과 공포가 비주얼적으로 기괴하게 잘 표현됐던 것 같은데 그게 걸리는 건가, 싶기도 하고. 장르적으로 속도감있는 영화들이 아니었기도 하고(스캐너스는 예외). 그래도 스캐너스는 다시 보고 싶네요. 루트 발견하심 공유주세요.
2022.09.06 14:05
말씀하신 셋 중에 지금 볼 수 있는 게 스타쉽 트루퍼스 뿐이네요. 근데 '매드니스'는 어디서 보셨죠!!? 사실 저 '매드니스'도 너무 격하게 다시 보고 싶은데 볼 수 있는 곳이 없어서 주기적으로 어디 안 올라오나 하고 매년 검색하는 영화거든요. ㅋㅋ 개봉 때 극장 가서 본 후로 다시는 못 봤어요.
말씀대로 크로넨버그 초기 대표작들은 뭔가 느릿느릿 꿈적꿈적 불쾌함이 올라오는 류라서 상쾌한 기분으로 반복 감상 시도하기는 좀 그런 것 같아요. 나이 드시고 만든 '이스턴 프라미스'나 '폭력의 역사'는 두 번 이상씩 봤는데 옛날 첫 번째 리즈 시절 영화들은 저도 두 번 본 게 이번에 본 이것 뿐입니다. ㅋㅋ
2022.09.06 15:16
2022.09.06 20:08
너무하죠. ㅠㅜ 근데 이런 영화들이 정말로 많답니다. 특히 호러 쪽은 의외로 추억의 명작 취급 받는 영화들 중에도 지금 볼 수 없는 게 너무 많아요. 흑흑. 누가 호러 전문 OTT 하나 안 만들어 주나요...
아 정말 비쥬얼 쇼크였어요. 전까지는 잔인한 영화하면 그냥 수위높은 살해장면이 나오는 호러/슬래셔물 이런 것만 생각했는데 정말 어떻게 이런 상상을 하셨는지 머릿속을 해부해보고 싶은 이런 감독도 있다는 걸 알게됐었죠.
2000년대 들어와서는 주로 비고 모텐슨이랑 다소 얌전(?)한 작품들을 만드시는데 그것도 대부분 훌륭한 작품들이라 딱히 불평할 것도 별로 없죠. 그래도 가끔 그립긴 한데 가장 최신작 <미래의 범죄>가 나름 예전의 상상력을 발휘했다는 얘기가 있어서 살짝 기대하고 있습니다. 아직 국내 개봉이 정해지지 않았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