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8.28 13:02
평소보다 느슨하게 글을 써보고 싶은 마음이 들었습니다. 한 마디로 [놉]에 대해 아무말이나 하고 싶어요.
(영화 [놉]의 스포일러라고 할 수 있는 내용들이 아래에 있습니다)
근사한 고전영화 인용과 상징 분석으로 글을 쓸 수 있다면 제 허영심을 채울 수 있을텐데, 아쉽게도 아는게 별로 없어요. 이를테면 이런 이야기 말이죠. 영화의 내용은 영화를 찍는 과정이 반영된다, 라거나. [놉]을 본 이후 처음 드는 생각은, 당신을 유명한 사람으로 만들어 줄 수 있는 삶의 한 구석 "소재"라는 것이었습니다. 감독 조던 필은 예전부터 재미난 "소재"로 짧은 개그 영상 클립 같은 걸 만들어 왔고, 직전에 좋은 평가를 받은 두 영화도 소재에 빚을 지고 있는 것 같더군요. 조던 필은 영화를 찍어갈수록 자기가 다루고 있는, 오프라 윈프리를 만날 정도의 강렬한 "소재"를 다루는 것에 대해 토로하고 싶지 않았을까 생각했습니다.
영화에서는 두 개의 "소재"가 나옵니다. 원숭이 '고디'와 '진 자켓'이죠. 리더필름에서부터 음향으로 그 상황을 들려주고, 이후에도 조금씩만 보여주죠. 관객으로서 그 끔찍한 사고를 '보고 싶기는 하다'는 생각을 영화를 보는 과정 중에 계속 하게 되는데, 그런 기괴한 마음은 대체 현 미디어 시장에서 무엇일까 생각하게 되더군요. 모두들 대참사인지를 알면서도, 그 당사자는 아직도 트라우마에서 벗어나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저열한 재연극으로 사람들을 웃길 생각이나 하게 되는 것이죠. 카메라 앞의 말을 대하는 헐리우드 촬영진을 보면 "소재"를 다루는 예의라고는 찾아볼 수 없습니다.
조던 필은, 옆 집이 인생의 대단한 체험인 UFO로나 여기는 옆집처럼 지금 다루고 있는 아주 위험한 "소재"를 예의를 차려 직접 바라보지 않으며 앞으로도 찍어가겠다는 말을 하지 않았나 싶었습니다. 기왕이면 그렇게 안하는 사람들을 관객이든, 신미디어든, 늙은 감독이든 모두 후루룩 짭짭해서 갈아버리기도 하고요. (심지어는 관객들의 차량 배터리까지도 아낌없이 사용해주고요.) 넓은 평원에서 바람에 날리며 자기 시선을 제대로 간수하지도 못하는 인형 풍선들과 관객들이 겹쳐 보이는건 제 아무말이겠지요.
나쁜 기적이란 뭘까, 조던 필이 영화 감독으로서 너무 잘 되버린 것일까, 그런 헛된 생각도 해 보고요. [놉] 영화를 한 마디로 줄이면 '직접 바라보지 않아야 그것을 포착할 수 있다'인데 자신은 익명성으로 두면서 세상 모든 것들을 바라보고자 하는 욕망으로 가득한 현대 미디어 세계에서는 정말 대대손손 장인 정신으로 말밥 주기 위해 외계인이 나타나도 집에 들어가야 한다는 OJ가 생각닙니다.
영화를 보며 들었던 몇몇 궁금증들. OJ는 아버지가 진 자켓 때문에 죽었음에도 불구하고, 보통의 괴수 영화와는 달리 딱히 복수심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아주 많은 관객 후루룩도 마찬가진데요, 대부분 백인들로 이루워진 그들이 죽었건 말건 소화기관에 잘 안착한 것을 관조적으로 바라보고 음향효과로만 사용할 뿐 별다른 감정적 대응을 해주진 않아요. 그냥 배터리만 제공해준 고마운 관광객들일 뿐이지. 골드러시 서부시대 관광촌은 어떤 의미로 구성한 것인지. 과거의 현상을 깊이 이해할 생각은 없이 맛만 보는 관광객은 쩝쩝 하고 싶다? 그냥 아무 상관 없이 그 공간에 있을 것 같은 관광지일수도 있겠습니다만.
원숭이 고디 컷에서, 꼿꼿이 서있는 신발 한 짝을 안 볼 수가 없는데요. 도대체 뭘까 계속 생각하다가 '나쁜 기적'의 직접적 설명인가 생각해보기도 했고요. 어떤 사람은 그 신발을 바라봐서 리키가 살았다고도 하는데 그런 연출이 있었는지는 모르겠군요. 리키의 비밀 박물관 신발 액자 밑에 설명이 쓰여 있었을까요? '나는 기적같이 이 신발 덕에 살 수 있었다.' 나온 김에 리키를 스티브 연으로 택한 이유는 뭘까요, 이 자리에 백인 남자를 두기 그래서? (생각난 김에 중간에 등장하는 '가짜 소재'인 외계인 아이들 등장씬이 떠 오릅니다. 진짜 외계인으로 마무리할 수도 있었을텐데.)
이상한 형태로 변해 팡팡 터지는 녹색 커튼들을 가진 진 자켓은 왜 그렇게 디자인된 거며 잘 숨어있다가 갑자기 그렇게 변한 걸까요? 구애 행위인지 뭔지. 약간 스크린 같은 색으로 보이기도 했지만. 원숭이 고디와 리키 사이에 있었던 녹색 커튼과 확실하게 같은 디자인인걸 보면 분명 의도된 것인데. 그리고 진 자켓은 왜 OJ네 농장을 화장실로 택한 것인지... 이런 저런 이상한 의문들만 떠오릅니다.
어찌 되었든 소재의 본질을 빨리 파악해야 죽지 않을 수 있겠죠. 저는 이미 죽은 목숨이네요.
P.S. 아, 중간에 OJ가 헐리우드 촬영공간에서 말이 놀랐던 것 같은, 수정구가 달린 막대기를 자체 제작하는데요. (화장실 뽁뽁이에 뭔가 달았는데...) 그게 언제 쓰이긴 하나요? 이후 본 적이 없어서.
P.S.2 잠깐만 찾아봐도 [이 악명 높은 사고로 배우 경력이 단절된 리키가 제대로 된 교훈을 얻지 못한 이유에 대해 조던 필 감독은 “무슨 일이 일어나든 상관없이 주목 받기 원하는 존재로 길러졌기 때문”이라 설명했다.] 이런 이야기들이 기사로 있는걸 봐서 (이 글은 따로 안 찾아보고 작성되었습니다) 대놓고 감독이 영화의 구성 이유들을 줄줄 말하셨나 보군요.
2022.08.28 13:09
2022.08.28 13:33
2022.08.28 13:19
2022.08.28 13:36
2022.08.28 13:39
2022.08.28 14:32
영화 전반 반을 버티고 봤지만 소시쩍 부터 벼라별 유에프오 꿈을 엄청 많이 꾼 매니악이라 영화의 여운은 상당합니다.
2022.08.28 17:24
2022.08.28 18:13
2022.08.29 03:01
진 자켓 디자인은 걍 에반게리온 아닌가... 하고 생각했습니다. 닮아도 너무 닮아서요. 그 뒤에 나오는 아키라 씬까지 생각하면 거의 맞을 듯. ㅋㅋㅋ 색이 흰 색인 건 영화 초반에 UFO인 척 해야 하니까 걍 당연한 듯이 그 색이었지 않나 싶었구요. 그 내부에서 계속 나오는 네모진 모양이 카메라, 프레임 느낌이 들게 처음부터 연출한 걸 보면 영화, 뭔가를 찍는 다는 것에 대해 이것저것 할 말이 많았구나... 싶었는데 거기에서 더 깊이 생각은 안 하고 멈췄네요.
그리고 뭐 이미 많은 영화들이 나오긴 했지만 조던 필 자기 식으로 '흑인 웨스턴'을 만들고 싶었던 것 같기도 하구요. 카우보이 체험촌도 그냥 그런 맥락을 기본으로 깐 것 같은데, 또 동양인이 거기 주인으로 나오는 건 뭔 의미지... 싶었네요. 한국 팬들이랑 소통도 많이 하는 조동필씨인데 '백인을 빌런 삼느니 동양인으로 해볼까'라는 생각까진 안 했을 거고. 걍 인종 다양성 확보 차원에서 주요 배역에 동양인 하나 넣은 것 같기도 하고 음... 모르겠네요. ㅋ
마지막 '작전'에선 '죠스' 생각이 많이 났어요. 전문가(?)들이 모여서 영차영차 목표의 생태나 행동 패턴 파악해서 승부하는 게 꼭 죠스 클라이막스 느낌.
2022.08.29 08:32
2022.08.29 12:03
에반게리온 닮았다는게, 에반게리온에 나오는 사도를 닮았다는 거겠죠? 아키라 씬은 저도 알아보고, 과연 이걸 얼마나 알아볼까(?) 크큭 했습니다. (생각보다 많은 분들이 알아보겠지만.) 저는 에반게리온을 떠올리지 못해서 그렇게 생각하는 분들도 있구나 하고 생각이 듭니다. 진 자켓의 똥구멍(?) 혹은 내장 혹은 통풍구 같은 사각 화면은 보면 볼수록 영화 관객으로서의 시선이 얼마나 기괴한 욕망인가 (그걸 들여다 보고 싶단 말이야? 많이 봐라) 싶었어요. 동그랗거나 사각의 시야를 통해서 그 구멍이 어디에 뚫려있는지 별 꺼리김 없이 매 번 들여다 보고 싶어하는 우리들...
'흑인 웨스턴' ㅋㅋ. 제 느낌에는 옆 집 헐리우드와는 달리 장인 정신으로 찍어 나가겠다는 큰 포부가 느껴졌습니다. 가짜 외계인이나 쇼로 보여준 곳과는 차원이 다르다!
마지막 작전 부분 좋더군요. 지도에다가 주변 잡동사니로 위치를 턱턱 잡아가며. 완전 클리셰지만 볼 때마다 재미진 거죠.
2022.08.29 12:14
사실 이게 잔인한오후님 본문 얘기처럼 관객들의 '구경하려는 비틀린 욕망'을 풍자하고 비판하려는 의도였다면 '에반게리온'의 주제와 연결되기도 합니다. 자기 영화 보러 온 사람들에게 '오타쿠들아 이제 제발 현생을 살아'라고 말하는 게 에바니까요. ㅋㅋ
맞아요. 그렇게 지도에 잡동사니 늘어 놓으며 작전 짜는 장면은 언제나 멋지죠. ㅋㅋㅋㅋ
2022.08.29 14:22
[영화관 자리에 앉아있는 관객들을 훑는 샷]
[길거리에서 실사로 여주인공들이 걸어가는 샷]
으아아아-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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