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루드비히 비트겐슈타인(1889~1951)은 지하세계에서 온 악마였다. 두려움과 놀라움을 불러일으키는 인물이었다. 누구든 그 앞에 서면 오금을 펴지 못했다. 형형한 눈빛이 빛을 내면 주위의 모든 힘이 무력해졌다. 압도당하고 주눅들고 주저앉았다. 철학 세계에서 비트겐슈타인이라는 이름은 그 자체로 마법의 주문이었다. 그 기묘한 이름이 거명되는 것만으로도 탄성 아니면 신음이 흘러나왔다. 공포와 경이, 매혹과 당혹 사이에서 사람들은 어쩔 줄 몰랐다. 당대 최고의 석학도 그의 목소리 앞에 서면 기가 꺾였다. 달변의 혀가 말을 듣지 않고 여유 만만했던 표정이 얼어붙었다. 카리스마야말로 이 전례 없는 지적 폭군의 인격을 요약하는 말이다. 강의실이든 토론장이든 그의 말은 원자폭탄처럼 터졌고 소용돌이처럼 주변의 모든 것을 삼켰다.
그는 딴 세상에서 온 사람이었다. 고대 그리스의 철인이 지금 이곳으로 걸어나온 것만 같았고 구약성서의 선지자가 시나이 산에서 방금 내려온 것만 같았다. 이 도덕의 폭군, 순수의 전사는 한 점의 거짓도 한 치의 가식도 용납하지 않았다. 그가 거처하는 세계에서 기만이나 부정은 정상 참작의 여지가 없는 범죄였다. 그는 탄핵하고 심판하는 데 한순간의 망설임도 주저함도 없었다. 이 지식의 전제군주 앞에서 누가 마음을 놓을 수 있었겠는가. 그가 사라지면 사람들은 폭정에서 해방된 듯한 평화를 느꼈다. 예언자의 주술에 걸려들어 자신의 전 존재를 헌납한 소수의 사도만이 이 철학의 회오리바람에 휘말려드는 것을 행복으로 여겼다.
그러나 사실을 말하자면 그는 추종자를 거느릴 생각도 없었고 무리를 이끌고 거들먹거릴 생각도 없었다. 그는 숭배 받으려고 설교한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 자신과의 투쟁이었다. 평생을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불안과의 힘겨운 분투였다. 그는 철학적 안개가 걷힌 명료성의 대지를 찾아내려 모험했고 정신을 편히 내려놓을 확실성의 토대를 닦으려고 노동했다.

 

* 비트겐슈타인이 초등학교를 전전하는 사이 그의 이름은 빈과 케임브리지의 철학계에서 거대한 명성으로 자라났다. <논리철학 논고>를 썼다는 비트겐슈타인이 실제로 존재하는 사람인가를 둘러싸고 갑론을박이 벌어질 정도였다. 비트겐슈타인은 말하자면 전설 속의 인물이었다. 빈 대학 철학교수 모리츠 슐리크(1882~1936)는 <논리철학 논고>를 출간 직후 읽고서 즉시 비트겐슈타인 숭배자가 되었는데, 어느 날 이 '전설 속 인물'을 직접 만나야겠다고 마음먹고 그를 수소문했다. 비트겐슈타인이 오테르탈이라는 벽촌에서 교사 생활을 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아낸 그는 한 무리의 학생들을 데리고 그곳을 찾아 떠났다. 슐리크의 아내는 그때의 남편이 어떤 상태였는지를 이렇게 기술했다. "거의 경외스러운 존경심으로 비트겐슈타인이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천재 가운데 한 사람이라고 설명할 때 남편은 마치 성지 순례를 준비하는 것 같았다."

(...중략...) 비트겐슈타인의 저녁식사에 초대받고 돌아온 슐리크에 대해 그의 아내는 이렇게 회상했다. "(슐리크는) 무아경의 상태로 돌아왔다. 그는 별로 말이 없었고 나는 물어보지 말아야겠다고 느꼈다."


* 1949년 봄 그가 20년을 바쳐 쓰고 깁고 고친 <철학적 탐구> 원고가 타자본 형태로 모습을 드러냈다.
1949년 여름 비트겐슈타인은 제자 노먼 맬컴(1911~1990)의 초청을 받고 생애 처음으로 미국을 방문했다. 가을 학기 초에 맬컴은 늙은 스승을 코넬 대학 철학과 대학원생 모임에 데리고 갔다. 그때의 일을 대학원생 가운데 한 사람이 이렇게 회상했다.
[그의 팔에는 윈드 재킷과 낡은 군복 바지를 입은 가냘픈 노인이 기대어 있었다. 만일 지성으로 빛나는 얼굴이 아니었더라면, …… 거리의 부랑자로 간주했을지도 몰랐다. …… 그리곤 그 충격적인 말이 들렸다. "비트겐슈타인 교수님,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 하고 블랙이 말했다. 블랙이 '비트겐슈타인'이라고 말하자마자 그 자리에 모인 학생들이 숨을 크게 멈추는 소리가 났다. …… '비트겐슈타인'은 1949년의 철학 세계에선, 특히 코넬에선, 신비스럽고 두려운 이름이었다. 그 숨이 멎는 소리는 만일 블랙이 "플라톤, 한 말씀 부탁드려도 되겠습니까?"라고 말했다면 생겼을 것과 같은 것이었다.]
이 만남 직후 비트겐슈타인은 쓰러졌고 영국으로 돌아온 뒤 전립선암 판정을 받았다. 그는 암에 걸렸다는 소식에 전혀 놀라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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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명섭의 <광기와 천재> 중 발췌했어요. (이 분의 책 3권 - 담론의발견, 니체극장, 광기와천재 - 읽었는데 다 좋답니다.)

비트겐슈타인이 엄청난 철학자인 것은 알았는데(이 사실 자체만 ㅎ), 막 생전에 실생활에서도 위엄 무시무시하고 쩔고 막 이랬던 분인 줄은 몰랐네요. 와..

네이버내서재에 찜해뒀던 비트겐슈타인 평전의 제목('천재의 의무') 볼때마다 아니 얼마나 천재길래 평전 제목까지 이러한가 하며 매혹됐었는데 ㅎ

광기와천재로 비트겐슈타인에 대해 조금 맛보니 저 평전 빨리 읽고 싶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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