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다섯살 때 뉴욕에 갔어요

아무 목적 없이 여행을 할 수 있었던 귀한 기회였죠

아침에 눈뜨면 맨해튼으로 버스 타고 나와서

걷고 싶은 지역으로 가서 하루종일 걷고, 보고, 먹고 싶은 것을 맛보았어요

 

어느 일요일 아침, 그린위치 빌리지의 에이미스 브레드에서

아침 빵을 사먹으며

건너편의 비상계단 가득히 쳐진 벽돌집을 연필로 그렸어요

그렇게 해서 완성된 그림은 제 맘에 꽤 들었습니다.

나중에 결혼을 해서 아이가 생기고, 훗날 그 아이에게 이 그림을 보여줄 수 있다면 얼마나 뿌듯할까,

라는 생각을 했었답니다.

네 엄마가 이런 식으로 여행을, 여행에서 보고 느낀 것들을 받아들이고 남겼단다, 라고 보여줄 수 있을 테니 말이죠.

 

 

고등학교 때에는, 오랫만에 지금 듣고 있는  My best Friend's wedding OST의 Say a Little frayer  for you를 들으며

가슴 설레어 했었어요.

영화 속에서의 그 장면을 좋아해요. 따뜻하고, 재미있고.

 

 

스물세살에 첫 연애를 할 때, 만나던 분이 저와 함께 맛있는 음식을 하는 좋은 장소에 가는 걸 좋아했어요.

2월 말 추위가 덜 풀렸을 때 삼청동 부근에서 그분을 만났다가, 함께 차를 타고 평창동 쪽의 어느 산책로로 올라갔습니다.

그리고 나서 내린 곳은 어느 아늑한 가정집 같은 레스토랑.

사실 음식은 그렇게 인상적이지 않았습니다. 하지만 산속에 이런 레스토랑도 있구나, 하고 놀랐던 기억과

레스토랑 같지 않은 따뜻하고 조그만 그곳의 구조,

그럼에도 정중했던 웨이터 할아버지,

밥 먹고 함께 걸어나오던 길에 아롱진 불빛, 이런 것이 기억에 남아 있어요.

비록 마음 깊게 교류하지는 못했지만, 그때 그분이 날 아껴 주었구나 하는 기억도 어렴풋이.

 

 

 

그런 시간으로부터 멀리 떠나온 지금,

시간은 물론이고 처지마저도 달라진 지금,

그런 시간들을 떠올리면 대체 무슨 소용일까 싶어집니다.

 

같이 사는 남편에게 아낌받지 못하고-남편은 한 가정의 가장으로서 책임을 다하는 사람입니다. 다만, 그와 별개로 아내로서 여자로서

아낌받는다는 느낌을 그에게서 잘 받지 못합니다. 이것에 관한 이야기는 자세히 하다 보면 다른 이야기가 되어버리니까 여기서 줄일게요-,

30넘은 평생에 처음으로 가져본 사랑스런 아이에게는

때때로 소리를 지르게 되고.

나중에 저 아이에게 뉴욕에서 그린 제 그림을 보여준다고 해도

'그래서 뭐? 엄마는 어릴 때 내게 소리나 지르는 대단찮은 엄마였잖아'라는 말을 듣는다 해도 할 말이 없을 거예요.

매일매일 아침마다 더러워진 집안을 마주하고, 그것을 치우고, 그것이 반복되는 생활에서 벗어날 수 없는 나날입니다.

돈이 모자랄까 봐, 남편이 다른 생각을 할까 봐, 아이가 말썽피우고 다칠까 봐, 그런 것들로 전전긍긍하는 나날들.

 

 

 

이런 상황에서 저 멀리 떨어진 날들의 추억이 가끔 생각나면, 그것들과 가끔 마주치게 되면

냉소적이고도 허무한 마음으로 자문하게 됩니다.

내게 그 날들은 대체 무슨 소용이 있을까? 결국은 그 날들은 지금에 와서 하나도 제대로 쓰임이 없는데.

내가 그렇게 빛나고, 꿈이 있고, 소중히 대접받던 사람이었다는 것을 지금에 와서 생각한다고 뭐가 달라지는데, 하는 생각요.

 

비혼 때, 막연히 외로울 때 저런 추억들을 떠올릴 때와는 또 다른 느낌입니다.

아마 '가능성'의 문제인 것 같아요.

비혼 때에는 저런 추억들을 떠올리면 조금은 외롭고 허전하고 그래도,

이렇게 막막하지는 않았던 듯합니다.

 

 

여러분에게도 따뜻하고 정말 나 자신이 빛나던 그런 시간이 있을 거예요.

그리고 만일 지금에 와서는 그 모습과 완전히 멀어져 버렸고,

정말 천지가 개벽하는 변화가 있지 않는한 그 모습을 다시는 찾을 수 없는 상황이라면

 

어떻게 생각하시겠어요,

그 아름다웠던 시간은 지금에 와서 무슨 소용이 있는 것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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