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4.01.07 17:30
새해 첫 책으로 읽었던 [시간의 향기]는 후반부로 가면서 예상보다 힘들었어요.
하이데거 인용이 많아지면서 어렵더라고요. '노동'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헤겔, 한나 아렌트 인용도 나오고요.
한두 개의 장은 거의 소화가 어려웠으나 이 책에서 그 부분에 머물고 있다고 이해할 수 있는 것도 아닌 거 같고 그래서 가자가자하고 글자만 읽으며 다음으로 넘어갔어요. 경우에 따라 이런 읽기도 괜찮습니다. 어려운 인용들을 넘어가도 이 책에서 말하고자 하는 것을 알아 듣는데 큰 지장은 없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위에 언급한 철학자들의 시간 개념이나 노동과 소외에 대한 방대한 사상을 저자가 필요한 부분만 옮겨 오다 보니 단순화된 느낌이 든다거나 적은 분량 안에 섭렵하듯 언급하는 것이 내용 이해를 어렵게 하고 글이 산만하게 느껴진다는 감은 있었습니다. 저자의 이전 책에 비해서요. 본인의 생각을 그 자체로 논하기 보다 다른 철학자들의 생각을 반박하는 과정을 통해 내용을 전개시키는 철학적 글은 이래서 쉽게 접근이 힘든 모양입니다. 계통에 대한 이해와 선행지식이 부족한 독자는요. 문외한이지만 그런 생각이 들었습니다.
하여튼 한병철의 앞서 읽은 책들보다 어려웠다는 뜻입니다. 역시 '시간'이란 문제는 난제인 모양이에요. '시간의 향기'라고 달콤한 수필인양 제목을 달고 있지만요. 책 전체로 보면 대략 70% 정도? 이해했을까요.ㅎ 그래도 이 책의 강조점은 알아 먹겠고, 좋았던 부분, 건질 부분도 꽤 있었습니다.
제목은 중국에서 19세기까지 사용되었다는 '향인'이라는 향시계에서 힌트를 얻은 것 같습니다. 도장 형태로 된 향인데 타면서 문자 같은 모양이 드러나게 되어 있다네요. 물이나 모래 시계와 달리 흐르고 새어나가지 않아서 시간이 속절없이 사라진다기 보다 시간이 가면서 향이 공간을 채워서 시간의 공간화, 지속성의 인상을 준다고.
시간의 가속화에 휩쓸리는 대신 머무름과 머뭇거림, 중단과 사색을 통해 자기 동일성을 찾아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저자에게 공간을 향기로 채우는 시계가 강한 인상을 준 것 같아요.
이 책의 결론을 한 문장으로 얘기하면 사색적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책의 끝에 나오는 문단 일부를 옮겨 봅니다.
'활동적 삶은 시간을 소모한다. 여가 시간 역시 계속 노동의 강제에 예속되어 있는 까닭에, 사람들은 여가 시간에조차 시간과 다른 관계를 맺지 못한다. 사물은 파괴되고, 시간은 허비된다. 사색적 머무름은 시간을 준다. 그것은 존재를 넓힌다. 활동하는 것 이상의 존재가 되도록. 삶은 사색적 능력을 회복할 때, 시간과 공간을, 지속과 넓이를 얻을 것이다.
모든 사색적 요소가 추방되어버린 삶은 치명적인 과잉활동으로 귀결된다. 그리고 인간은 자기 자신의 행위 속에서 질식할 것이다. 사색적 삶을 되살려야 한다. 왜냐하면 이러한 삶만이 숨쉴 수 있는 공간을 열어줄 것이기 때문이다.'
마지막엔 [피로사회]에서도 인용했던 니체의 관조 강화에 대한 말을 반복하며 마무리합니다. 저자의 책을 몇 권 읽다 보니 어떤 생각을 가진 분인지 조금은 감이 와요.
한 가지 덧붙이자면, 저자는 자신의 생각과 궤를 같이 하는 게오르그 짐멜이라는 철학자의 글을 옮기는데 이분 표현이 재미있었습니다. 짐멜은 이렇게 썼다네요.
'우리 연구자들은 말하기를, 언젠가 우주의 모든 온도 차이는 사라지고, 모든 원자는 균형 상태에 도달하며, 에너지는 전 존재에 고르게 분산될 것이라고 한다. 그러면 운동의 시대는 끝나고, 우주적 게으름의 영원한 제국이 시작된다. 우주적 게으름은 현세적 사물들의 질서 자체에 의해 정립된 궁극의 목적인 것이다. 이런한 목적을 앞서서 실현할 수 있다는 데 인간의 고귀함과 위엄이 있다. 인간은 가장 게으른 시간에 최상의 의미에서 소우주가 된다.'
ㅋㅋ 고무적이지 않습니까. 만국의 게으름뱅이들이에게 기쁜 소식 같습니다.
언급되는 철학자들 다 그렇지만 특히 짐멜은 스쳐지나가듯 책제목만 본 생소한 분입니다. 사회학이나 철학에 관심 있으신 분은 잘 아시겠죠. 저서들을 찾아 봤는데 [돈의 철학]이 특히 눈에 띄었습니다....만 1092페이지 분량에 책값도 정말 눈에 띄네요. 2013년에 새로 번역돼 나왔다는데 또 절판되는 거 아닌가. 읽으신 분 있으실까요.
새해 첫 주는 그냥 이래저래 보내고 둘째 주부터 시작이라고 봅니다.
한 주에 두 권 읽기를 마음 속으로 계획했어요. 대부분 책은 천천히 읽는데 두 권이 무리는 아닐지 모르겠습니다. 부지런하면 안 되는데 말입니다.
2024.01.07 23:32
2024.01.08 09:56
저도 소심하게 소우주 하나 하겠습니다.
근데 짐멜이란 철학자는 100년도 전에 돌아가셨는데 그 이후에도 게으른 사람들이 인정(?)을 못 받는 거 같아서 아쉽네요. 언제쯤이나 그 세상이 올지...
2024.01.09 19:08
맞아요. '시간의 향기' 좀 더디게 읽게 돼요. 천천히 걸어가는데도 중간중간 벤치에서 쉬어줘야 함 ㅋㅋ
중반부까지는 감탄했는데, 후반부는 약간 아쉬운 것 같기도 했고요 ㅎㅎ 그래도 이것저것 수확한 부분들이 있어서 좋았네요.
그나저나 게으름 얘기하니, 최근에 몽테뉴글 읽다가 웃은 부분이 있어서.
[마음의 기질을 따르는 데 익숙해져 있고, 지금까지 억지로 이래라저래라 하는 사람도 없이 스스로 가장 만족스러운 속도로 꾸준히 걸어왔다.
그래서 점점 약해지고 남에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으며 오직 나 자신에게만 유용한 사람이 되었다.
이렇게 게으른 것은 타고난 성향이라 억지로 발휘할 필요도 없다. 태어나면서부터 그랬으니 그 상태에서 멈출 수 밖에.]
2024.01.09 21:58
네, 저도 잘 읽었다 싶으나 후반에 다른 철학자 인용이 많은 부분에서 저자의 장악력이 좀 약한 느낌이 들었습니다. 본인은 알겠지만 전달로만 봤을 때 충분히 요리해서 내놓지 못하는 것 같은.
짐멜도 몽테뉴도 게으름의 의미를 강조하거나 본인이 게으르다고 하는 것이 게으른 저는 반갑기도 하지만 한편으론 속지 말아야지라는 생각도 들어요. 이분들이 기준으로 삼는 부지런함과 게으름은 저같은 이와 차원이 다르다는 깨달음이 문득 들더라고요.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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