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2.05.26 16:22
미야베 미유키의 에도 시대 미스터리물 <외딴집>을 읽고 이어서 <얼간이>를 읽었어요.
작년 가을 쯤에 <누군가>를 읽었는데 저는 <외딴집>이 훨씬 낫더군요.
시대물이라 시간의 거리만큼 여유를 갖고 양해하는 마음 같은 게 깔린 상태로 읽게 되는 것 같습니다. 다른 문화라는 것이 현대물보다 자연스럽게 전제되고 있는 그대로 보게 되는 모양입니다. 그리하여 <얼간이>도 읽게 되었는데 오...이건 좀 더 재밌게 읽었습니다.
<외딴집>은 바닷가 마을이 배경인데 이곳의 사연 있는 빈 집이 악행을 저질러 귀양살이 오게 된 전직 고관의 거처로 정해집니다. 마을이라고 했지만 이 지역은 중앙 막부와는 독립적인 행정 구역으로 바다를 끼고 어업과 조개 염색으로 재정이 탄탄한 현입니다. 전직 고관이 이곳의 외딴 집에 갇히는 것을 계기로 중앙 정부와 토호 세력들 끼리의 암투가 전개되고 주인공들은 그 틈바구니에서 공동체를 유지하고 본인들도 살아남기 위해 머리를 쓰고 몸을 쓰는 내용입니다. 여기서 이야기를 이끄는 절대적으로 중요한 부분이 절이나 신사를 중심으로한 민간 신앙입니다. 바다 영향 아래 사는 마을이니 만큼 생계와 직결시켜 여러 잡신을 믿고 있는 민중들, 그것을 이용하여 권력을 유지하려는 세력들의 소문 유포와 조작이 나와요. 지금 일본 사회에 전통으로 남은 부분도 많지 싶어요. 중심 인물들이 아주 선하고 올곧습니다.
<얼간이>가 <외딴집>보다 재밌었던 이유는 주인공이 아주 선하거나 아주 바른생활맨이 아니라는 점과 살인 사건으로 시작하는 소설이지만 페이지를 넘기다 보면 살인 사건에 대한 궁금증은 어디론가 가버리고 당시 에도의 시시콜콜한 생활상을 읽는 재미에 빠지게 된다는 점에 있습니다. 소설은 팽창하는 에도에서 온갖 직종을 가진 평민들이 사는 공동 주택이 주요 무대입니다. 이 공동 주택은 '나가야'라고 불리는데 돈 많은 개인이 관리인을 따로 두고 소유하는 형태입니다. 뎃핀 나가야라는 곳에서 살인 사건이 일어나고 이 동네 치안을 담당하는 주인공인 하급 무사 헤이시로가 평소의 게으름과 일 크게 벌리지 않기의 노선에서 할 수 없이 벗어나 사건을 알아 보는 내용입니다. 그러니 소매를 걷어붙이고 날카로운 눈매로 본격 수사를 한다기 보다는 늘 하던 식으로 매일 들리던 식당에 들려 간식을 사먹고 식당 주인이나 관리인과 잡담을 하고 나가야 주변 상황을 살핀 뒤 집에 와선 방바닥을 뒹굴며 되짚어 생각을 해보는 식입니다. 그러다가 사건의 윤곽이 잡히자 출중한 주변의 능력자들 손을 빌게 되고 주로 일다운 일은 이 조력자들이 다 하는 것이죠. 헤이시로는 완벽한 상태나 질서를 지킨답시고 일의 실체를 다 헤집기 보다는, 조금 눈 감고 가는 상태가 낫다는 생각을 갖고 있고 <외딴집>의 인물들과 비교하면 신에 대한 경외 같은 것도 없어요. 신앙이란 게 믿는 만큼 효과는 없는데 번거롭기만 하다고 생각합니다. 에도 시대 무사로선 상당히 쿨한 태도죠. 소설은 주인공이 살짝 무르고 어설퍼 보이는 듯 쉽게 살려고 하는 듯 그리고 있지만 실은 이 사람을 통해 건실한(헤이시로도 이만하면 충분히 건실합니다? 근데 소설 제목이 '얼간이'네요!!) 등장인물을 강력하게 지지합니다. 본인은 허허거리는 듯하지만 실제로는 그 여유로 오토쿠 같은 도덕적인 인물의 꽉 막힌, 그래서 다치기 쉬운 순정을 보호하는 역할을 하는 것이죠.(오토쿠는 아픈 남편 수발을 오래 한 후 혼자 식당을 운영하면서 남 일도 내 일처럼 보살피는 매우 씩씩하고 강직한 심성의 인물)
<얼간이>에 나오는 평민들 공동 주택인 나가야와 그 관리인, 운영 방식 같은 걸 보면 좀 기숙사 비슷합니다. 이웃 살림 살이나 사정도 속속들이 알고 있고 이사 같은 일도 분명한 이유가 없으면 괜히 말이 나고 의심스럽게 본단 말이죠. 우리도 조선 시대 작은 마을에선 비슷했겠지만 대도시였다는 에도에서 이 '나가야'라는 곳은 사생활이란 게 거의 없던 걸요.
식당 주인 오토쿠가 등장하면 이 인물이 좀 부담스럽긴 하지만, 조림 음식들이 아주 맛 있게 묘사되어서 감자 조림 나도 해볼까 생각하게 됩니다.
헤이시로가 먹는 감이나 밤과자, 팥소 든 생과자나 메밀국수 같은 것도 먹고 싶어지고 싱싱한 꽁치로 소금 뿌려서 구워 먹고 싶다는 생각도 하게 되고요. 이 소설 재미가 생활상을 읽는 재미라고 했는데 주로 먹는 것만 기억나네요.
2022.05.26 20:35
2022.05.26 21:05
주인공은 메밀국수 식당이 생긴 이후로 일 등은 아니고 이 등으로 여러 그릇을 먹어서 주인을 흐뭇하게 합니다. 이 음식은 열량이 낮기로 유명하니 조만간 양껏 사드시길. 댓글을 이끌어 준 메밀국수야 고마워 ㅎㅎㅎ
2022.05.26 22: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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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2.05.26 21:43
미미여사의 에도시대물을 좋아해서 지금까지 나온 건 외딴 집을 빼고 다 봤어요. 에도시대 이야기라고 해도 주인공에 따라 결이 조금씩 달라지는 재미가 있는데요. 외딴 집도 봐야겠네요. 감사합니다.
2022.05.26 21:44
아.. 음식 관련된 이야기 좋아하시는 분이라면 "맏물 이야기"부터 보시면 어떨까 싶습니다. 본격 미미여사 에도시대물을 이 책으로 처음 시작했습니다. ㅎ
2022.05.26 22:52
이야기에 음식 상세하게 나오는 거 좋아합니다. 기억해 놓겠습니다. 요즘 바쁘실 텐데 추천 댓글 감사합니다.
2022.05.26 22:12
에도 시리즈에서 귀신 나오는 건 빼고 추리물은 좋아요. 하지만 이 이야기는 고통스러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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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병을 잘 고친다고 소문난 의원을 찾아 네즈까지
아내인 오미요를 데려간 적이 있다.
그 치료비를 마련하느라 당시 사키치는 오미요 모르게
하루 걸러 밥을 굶었다.
그 탓에 의원을 찾아갔을 때는 둘 다 병자로 비치고 말았다.
흘러오는 국수 국물 냄새, 노점에서 초밥이나 튀김을 집어먹는
직공 같은 남자들, 심부름에 나선 꼬마가 찬가게의 콩조림을 주발
가득 사서 돌아가는 모습-그 모든 것을 외면하고 그저 걷기만 했다.
솜옷을 입고 추위에 달달 떨면서 곁을 걷고 있는 오미요도
그런 모습을 다 보고 자신과 똑같이 느낄 게 분명한데도
배고프다는 소리를 한 마디도 하지 않자
사카치는 울어 버리고 싶을 만큼 비참했다.
<붉은 구슬>, 미야베 미유키
2022.05.26 22:55
찾아보니 <신이 없는 달>에 들어가 있는 작품이네요. 연작집인가 본데 평이 좋아요. 보관함에 넣었습니다. 감사합니다. 저도 귀신 나오는 거 보다 추리물 선호라 그쪽으로 고르고 있습니다.
2022.05.27 17:02
2022.05.27 19:00
추천하신 두 시리즈물은 꼭 기억하겠습니다. 헤이시로 시리즈는 안 그래도 따라가 보려고 했어요.ㅎ
<누군가>에서 좀 주춤했던 게 현실에선 더 어이없는 일이 많은데도 소설은 오히려 범행 이유나 설정 같은 걸 더 까다롭게 보게 되더라고요. 그래서 현실과 시간상 뚝 떨어진 시대물이 편했던 거 같습니다. 일본 현대 소설에 개인적으로 진입장벽이 조금은 있는 편이고요.
마찬가지로 thoma님 이 글 재밌게 읽었는데 지금 제 머릿 속엔 메밀국수 생각 뿐입니다. 제가 참 좋아하는데요... ㅋㅋㅋ
다이어트 중인데 갑자기 이 시각에 메밀국수 생각이라니. 어떡해야 한단 말입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