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긴바낭]지브리와 어릴적 이야기

2010.08.29 03:21

산체 조회 수:2537


밑에 paul_님이 올려주신 지브리 관련 댓글들을 읽고 있자니 옛날 생각이 많이 나네요...



그래서 몇자 적어보려 합니다. 지브리 작품과 관련된 저의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예전부터 지브리 작품들을 보신 분들이라면 아실테지만, 예전에는 지브리 만화 보는게 쉬운일이 아니었어요.

왜냐하면 그게 일본만화였기 때문이죠. 90년대 중반 이후 공식적으로 일본문화가 개방되기 전까지 일본 만화를 판매 유통한다는 것 자체가 불법이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러니 그런 작품들을 보려면 어둠의 경로를 거쳤어야 했죠.


제가 처음 접했던 작품은 토토로였습니다.


아는 학원 선생님이 비디오 테이프를 빌려주셨는데,

그게 복제가 이상하게 된 버젼이라 토토로의 전반부는 문제없이 봤는데 후반부는 무자막으로 감상했었습니다-_-;;

중학교 3학년 짜리가 일본어를 할 수 있을리 없죠. 왜 고양이가 날뛰는지 영문도 모르고 봤습니다.

그 다음에 본 게 모노노케 히메였던거 같은데, 사실 그건 약간 지루하게 봤어요. 어린 저에게는 만화가 너무 심각하게만 보였나 봅니다.


그 다음이 라퓨타, 바다가 들린다, 나우시카였습니다. 그것들은 컴퓨터로 봤어요. 2장짜리 cd로.(바다가 들린다만 1장) 확장자는 dat파일. avi도 아니고!!

지금 용산역은 굉장히 깔끔하고 잘 정돈된 현대적인(?) 지하철역이지만 불과 10여년전만 해도 용산터미널과 연결된 구름다리는 마계로 통하는 입구같은 분위기였습니다.

그 통로을 뚫고 지나가면 용팔이의 소굴로 지금도 악명높은 터미널 상가가 있고 그 곳을 지나 선인상가등 주요 컴퓨터, 전자기기 매장으로 갈 수 있었죠.

그리고 그 어귀 혹은 구석 혹은 길바닥 어디 쯤에 이런저런 영화나 게임을 불법복제해서 팔던 노점들이 있었습니다.

사실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았군요. 요새에도 토렌트 등에서 얻은 최신 영화 파일을 길거리에서 DVD로 복재해서 파는 경우를 심심치 않게 볼 수 있으니 말입니다.

단지 차이라면, 그때에는 용산에 가야만 그러한 불법복제물들을 만날 수 있었다는 겁니다. 지금 극장에 걸려있는 최신영화도 아니고 나온지 10년이 된 만화영화들을.


그러다보니 굉장히 신기한 레어템을 만날 수도 있었는데, 저같은 경우에는 그러한 경로를 통해 지브리 작품 ost모음집을 손에 넣기도 했습니다.

지브리가 공식적으로 그런 앨범을 발매한적은 없어요. 제가 알기론 얼마전에 작년인가 재작년쯤에 지브리 작품들의 노래들을 재편곡한 앨범이 나왔는데

제가 가지고 있던 앨범은 그런게 아니라 정말 각 애니메이션에 삽입되었던 원곡들을 모아놓은 시디였던 겁니다.

그런데 그 시디에는 세상에 부클릿도 있었어요. 각 애니메이션의 삽화와 함께 노래 제목도 적혀있는. 그걸 나이먹어서도 잘 듣고 다녔는데 제대할 때 두고 왔을 겁니다...


그리고 on your mark는 집안 컴퓨터에 저장해두고 하루에 최소한 두번 이상씩 봤던 거 같습니다.

어떻게 받았는지 아세요? 그때는 인터넷 전용선이라는 개념이 없었죠.

전화선 모뎀으로 통신을 하는데 전화국에서 심야시간에만 정액으로 모뎀 사용을 가능한 상품을 내놨었습니다. 그런데 제가 그 상품에 가입되었던게 아니라,

제 친구가 그 상품을 통해 말그대로 밤 새도록 인터넷을 했던 거죠. 그 친구가 밤새도록 모뎀을 돌려서, 약 30~40메가짜리 클립하나를 받는겁니다.

그럼 그걸 받아서 어떻게 친구들한테 나눠주느냐. 하드 카피라는걸 하는건데요, 말 그대로 pc에 하드를 띄어서 쭐래쭐래 친구네 집에 가 자료를 받아오는 거 였습니다.

전용선이 없으니 이런 식으로 받은 4분짜리 클립하나가 그렇게 귀중할 수 없었더랍니다. 말그대로 보고 또 봤지요.

on your mark는 지금도 컷의 연결을 외우고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반딧불의 묘, 귀를 기울이면, 붉은 돼지 등은 친구들과 함께 구청에서 관리하는 어떤 문화시설에 모여 단체관람을 했었습니다.

그게 구청에서 공식적으로 해주는 행사가 아니었고, AV 시스템이 갖춰져 있는...이라고 해봐야 프로젝션TV정도 였네요.

하여튼 그런 장소를 대여해서 주말마다 또래 친구들 10명 정도가 모여서 보는거였죠. 용산에서 구한 그 cd들을 가지고.

아... 거기서 저는 예전 그녀와... 따위의 얘기는 더 해서 무얼 하겠습니다.


그리고 처음으로 극장에서 본 지브리 작품이 센과치히로. 그건 바로 그 구청에서 같이 주말마다 만화를 보던 그 친구와 두 손잡고 봤습니다.

신촌 녹색극장에서요. 신촌이 주 생활권인데 녹색극장을 모르신다고요? 부럽습니다. 어흑ㅠ



고양이의 보은은 어영부영 넘어갔고...

하울의 움직이는 성은 군대에서 봤어요. 저는 해군에서 군생활을 했고, 섬 한가운데 짱박혀 있던 터라 최신 영화를 구해보는게 쉬운 일이 아니었습니다.

끗발(육군표현으로는 짬밥)이 좀 되는 부사관들이 최신영화를 다운받아 시디를 부대에 들여왔는데 수요일 문화활동 시간에 컴퓨터로 혼자서 이어폰끼고 봤습니다.

당직 교대 시간이 다 되어서 막판에는 막 돌려봤다죠. 짧은 시간이었지만 히사이시죠의 음악과 함께 저도 따라 공중을 산책하는 묘한 경험도 했던거 같습니다.


그 이후에 나온 영화는 같이 보러갈 사람이 없어서 극장에서 안보고 주로 DVD 빌려서 봤네요ㅠ

귀를 기울이면은 극장서 개봉할 때(메가박스에서만 했었죠) 또 봤고....



얼마전 붉은돼지 속편에 대한 뉴스가 떴을 때 그렇게 마음을 설랬더랬습니다.

지브리 작품들은 저에게 단순한 영화가 아니었거든요. 뭐랄까 제 추억 한부분 한부분과 얽혀있는 인생의 부분같은 느낌입니다.

그들은 사실 감독도 다르고(주로 미아자키 하야오 할배의 것이긴 하지만) 내용도 분위기도 따지고 보면 조금씩 다 다른 개성 넘치는 개별적 작품들이지만,

지브리라는 이름만으로 제 기억속에 보이지 않는 끈으로 연결되어 기억의 한 줄기를 이루고 있어요.

붉은돼지 속편의 뉴스는 그러한 끈이 앞으로도 이어질거라는 희망과 같은 의미라서 그렇게 좋았던 모양입니다.



저만 이런건 아닐거 같아요. 저와 비슷한 시기를 거쳐온 많은 분들이 이런 느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지브리에 대한 애정과 신뢰와 때로는 실망이 따르는 것 같습니다.




주절주절 옛 이야기를 늘어놨더니 밤이 늦었네요.

마지막으로 미아자키 하야오 감독님께 마음속으로 부탁하나만 하면서 마무리 해야겠습니다.




할아버지 죽지 마세요ㅠ 오래오래 살아서 벽에 *칠 하면서도 작품활동 해주세요!!


번호 제목 글쓴이 날짜 조회 수
공지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DJUNA 2023.04.01 31867
공지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엔시블 2019.12.31 50859
공지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DJUNA 2013.01.31 361154
120420 할 줄 아는 게 없다는 것. [11] Hill 2010.08.28 3604
120419 피라냐 대박! [21] 폴라포 2010.08.28 5074
120418 킥애스의 클로이 모레츠 팬은 없나요? [11] 걍태공 2010.08.28 3843
120417 [사진] 제주이지만, 제주이지 않은 그런 보편적인 사진.. [10] 서리* 2010.08.29 3264
120416 또다른 '소원을 말해봐' [16] 메피스토 2010.08.29 4263
120415 빅버드(수원월드컵경기장)에 다녀왔습니다. [3] 白首狂夫 2010.08.29 2039
120414 듀9. 미국 대중문화나 헐리우드의 역사 앨비 2010.08.29 1860
120413 Olivia Munn (1980) [3] nishi 2010.08.29 2828
120412 [기괴한 유튭] 스펀짚밥 [11] 불별 2010.08.29 2811
» [긴바낭]지브리와 어릴적 이야기 [5] 산체 2010.08.29 2537
120410 오늘은 마이클 잭슨의 [2] 세상에서가장못생긴아이 2010.08.29 2017
120409 자고 일어나니 반가운 소식이... "김태호 총리 후보 오늘 중대발표…사퇴 가능성 높아" [12] Carb 2010.08.29 2801
120408 dvd 보면 이정도 나오시나요 [7] 가끔영화 2010.08.29 2552
120407 은혜로운 상사.. [2] 고인돌 2010.08.29 2051
120406 꿈보다 해몽이 더 뛰어난 케이스 중에 하나. [3] 자본주의의돼지 2010.08.29 2371
120405 김태호가 사퇴하는군요 [6] 메피스토 2010.08.29 3369
120404 오늘 서울아트시네마 [재키 브라운] 상영 전에 원작소설 증정이벤트 있습니다. Wolverine 2010.08.29 1809
120403 2011년 개봉작 리스트.. 기대만발 [17] 서리* 2010.08.29 4083
120402 여러 가지... [15] DJUNA 2010.08.29 3459
120401 한국에서 인디아나 존스 류의 영화가 나온다면 어떨까요? [14] 외팔이 2010.08.29 2502
XE Log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