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벽을 봤습니다. (스포 약간)

2010.08.28 01:48

mithrandir 조회 수:28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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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영화를 보신 분들은 아시겠지만, '개벽'은 참 이상한 영화입니다.
일단 - 오늘 관객과의 대화에서도 잠깐 언급이 되었지만 - 이 영화는 1대 교주도, 전봉준도 아닌 
엉뚱하게도 2대 교주인 최시형을 주인공으로 다루고 있습니다.
여기서부터 관객들은 갸우뚱하겠지만, 어쨌든 이 영화를 보려는 사람들은 
대부분 "진중한 전기물"이나 "스펙타클한 역사물"을 기대하겠죠.

근데 이 영화는 시작한지 30분이 지나고 1시간이 지나도록 주인공이 줄기차게 도망만 다닙니다.
이덕화는 등장하자마자 도망다니고, 보따리 싸고, 도망다니고, 보따리 싸고, 도망다니고...
어떤때는 그 주인공이 도망다니는 산천의 묘사가 영화 속 사건들보다 더 중요하게 느껴질 정도입니다.
그리고 그 산천 풍경 위로는 엄청난 분량의 설명 자막이 뿌려지고,
최시형이 만나는 많은 사람들은 이야기를 생략하면서 정작 그를 쫓는 부자는 큰 비중으로 다루고 있죠.

제가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는 그 이상하고 뻔하지 않음 때문에
개벽이라는 영화가 뭔가 다르게 느껴졌고 뭔가 훌륭한 영화라고 느꼈더랬습니다.
한참이 지나 - 필름으로는 처음으로 - 이 영화를 다시 보니,
예전의 그 느낌은 착각이 아니라 제대로 본 것이었더군요.
기억속에서 기대했던 것보다도 더 좋은 영화였고, 더 숨막히는 영화였습니다.

정말 신기한 것은 - 역시 오늘 관객과의 대화에서도 언급된 내용입니다만 - 
이 영화를 보고 있노라면 지겹도록 도망만 다니는 주인공들에게 어느새 감정이입을 하게 되는데,
그런 와중 눈치채지 못하는 사이 - 마치 동학교도들의 교세가 커진 것 처럼 - 영화의 스케일은 거대해져있고,
그 거대한 스케일과 감정이입된 등장인물들은 영화는 갑자기 - 무책임하게 대충이 아니라, 정말 제대로, 갑자기 - 끝내버립니다.
그래서 이 영화를 보는 저는, 마치 조선 후기 동학이 기세를 떨치다가 열강들 손아귀에 사그러들었던
그 때 그 시대에 들어가 그대로 느끼고 경험한 듯한 시간을 보내게 됩니다.

다들 아시다시피 이 영화는 국내에서도 해외에서도 미지근한 반응을 얻었고,
요즘에 와서 재평가되고는 있습니다만 워낙 쟁쟁한 임권택 감독님의 걸작 리스트 속에서
많은 관객들에게는 잊혀지고 있는 작품 중 하나입니다.
하지만 이 영화가 가진 그 이상한 정서, 
그리고 무서울 정도로 끝까지 밀고 나가는 힘과 균형은
비디오로 이 영화를 처음 봤을 때 제게 만다라나 짝코, 서편제나 취화선보다도 더 깊은 인상을 남겼고,
필름으로 이 영화를 다시 본 지금 그 깊은 인상을 다시 한 번 박아넣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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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뻔한 언급 또 하나.
이 영화는 동학을 다루고 있고, 당연하게도 영화 후반에는 전봉준이 등장합니다.
극중에서는 이덕화가 분한 최시형의 온건주의와 김명곤이 분한 전봉준의 급진주의가 충돌하지만,
영화는 어느 한 쪽에 무조건적인 지지/경멸을 보내지 않고
양쪽의 치열하고 절실한 주장을 동시에 보여주며 그 균형을 끝까지 유지합니다.
역시나 이러한 점 때문에 개봉 당시에는 "양쪽에서 다 욕먹는" 작품이었다고 하고,
이는 마치 '태백산맥'이 개봉 당시 좌우에서 동시에 욕먹었던 것을 연상시키기도 합니다.
분명 임권택 감독의 작품 세계는 무책임한 양비론이나 비겁한 방임주의와는 다른 것으로,
어찌보면 논쟁을 촉발할 수 있는 "텍스트"로서도 큰 기능을 할 수 있는 작품들이라고 생각하는데요.
이건 90년대 초반에도 그랬지만 2010년이 반도 더 지난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적용될 수 있겠죠.
근데 시대가 그렇게 지났는데도 이 영화가 유효하다는 것은,
세상이 달라지기만 하고 나아지지는 않는다는 비관적인 반증인 건지,
아니면 그저 잘 만든 영화가 시대를 뛰어넘는 보편성을 가질 수 있다는 건지 모르겠습니다.
후자이길 바라지만, 전자의 생각이 머릿속을 떠나지 않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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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관객과의 대화에서도 이야기가 나왔지만 
이 영화 개봉 당시 이혜영씨가 사극에 어울리지 않는다는 지적이 많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리고 전 그 때도 그랬고 지금도 그랬지만, 그 의견이 여전히 이해되지 않습니다.
오히려 이혜영씨의 서구적인 마스크는 영화 속 캐릭터에 절묘하게 맞아떨어졌다고 생각하는데 말이죠.
게다가 젊은 역부터 노역까지 연기하면서도, "연기력 과시 서커스"가 아니라 진짜 "나이들어가는 캐릭터"를 제대로 연기했다는 점에서, 
개벽은 이혜영씨의 가장 뛰어난 연기 중 하나라고 생각합니다.

아, 물론 후반에만 등장하면서도 존재감을 뿜어낸 김명곤씨나, 
당시만해도 비밀이었던 대머리까지 보이며 열연한 이덕화씨의 열연은 더 말할 필요도 없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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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상영했던 버전은 비디오로만 출시된 long 버전이었습니다.
보관용 필름이기 때문에 상영은 오늘 한 번으로 끝.
영문자막판이었고 오프닝과 엔딩 크레딧 모두 영어로 되어 있더군요.
다음번 상영은 극장개봉판의 short버전이지만, 이쪽도 "감독판"이긴 마찬가지이니 
오늘 상영 놓치신 분들은 너무 후회 안하셔도 될 듯 합니다.
전 short버전도 다시 한 번 감상할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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